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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3-1) - " 가난한 지혜자 " / 이성호 목사 (포항을 사랑하는 교회)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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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사순절(3-1) - " 가난한 지혜자 " / 이성호 목사 (포항을 사랑하는 교회)

관리자 2019-03-20 (수) 22:28 5년전 2868  

본문) 전 9:11~18, 마 23:1~12, 고후 11:19~30

 

1. (참회)

사순절의 세 째 주간입니다. 오늘은 먼저 교회의 오래된 왜곡에 대해 참회하고자 합니다. 

 

생명의 싹을 틔우는 봄이, 소리 없는 함성으로 다가오듯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죽기까지 낮아지심으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목회자’ 개념 자체가 잘못 이해되었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성도는 주님의 양이고, 교회는 주님이 주인이신 공동체입니다. ‘목사’라는 직분은 교회의 많은 직분 중, 가르치는 달란트를 받은 공동체를 섬기는 일원 중의 하나입니다. 

 

선교사들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목사. 목회자. 지도자라는 개념은 존경과 존중을 넘어, 예수님의 대리자와 같은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과 서양종교의 고유성을 높인, 상하의 개념을 사용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의 산물이 교회의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초기교회의 공동체성은 세상의 신분제도. 계급제도. 서열화. 조직문화에 영향을 받아, 목회자는 점차로 교회의 주인으로 승격되었고, 자칭 '주의 종'으로 섬김을 받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치 현대 경쟁사회의 성공개념이 들어와 교회부흥을 대체했듯이, 목회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기업으로 변질된 교회의 주인이 되어 군림하는 이상현상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오해되고 변질된 결과로 우매해진 사람들은 안 보이는 예수님 섬기기보다는, 보이는 목사님을 더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교인들은 진짜 ‘종’이 되었고, 목회자는 사례를 받으며 과도한 섬김을 받는 ‘가짜 종’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존경하는 저의 할아버님도 목사였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시스템과 체제로 목회자를 주격(主格)으로 격상한 잘못된 가치가 우리 모두를 타락시키고 변질시켰음을 고백합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예배가 십자가 없는 영광만을 원하는 욕망과, 출세와 성공(많음과 부함과 높음)을 기원하는 거짓 축복이 쏟아지는 주일이 되기를 않기를 원합니다. 

 

모든 성도가 다 귀하고 훌륭합니다. 모두가 단점 장점을 안고 살아가며, 그 중 각자의 장점으로 달란트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목사나 무지렁이 할머니나 모두가 귀한 성도입니다. 그리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친구들의 이웃이 아닌, 세상의 이웃이 될 줄로 믿습니다. 

 

2. (다시 보니)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실체’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구약 본문인 전도서 9장은, 행복과 성공이 사람의 행동에 달렸다는 이전의 전통적인 낙관론에서 벗어나, ‘누가 지혜자인가’를 규명합니다. 옛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일에 숙달되어 바르게 행하는 사람을 지혜자로 여겼습니다. ‘지혜’에 대한 당시의 이해는, 정신적이면서 몸으로도 일하는 어떤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온갖 능력과 수고가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으며, 모두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선언합니다(9:1).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과 잘됨의 요인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민첩하고 용맹한 장수, 총명한 자, 지식 많은 자, 부한 자들로 언급되는 모든 유력한 이들이 재앙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9:11), 그러므로 ‘가난한 지혜자’를 멸시하는 이들의 종말을 예고합니다(9:16). 

 

그런데 세상이 인정하는 ‘지혜자’의 속성은 알 것 같은데, 도대체 ‘가난한 지혜자’란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것일까, 몹시 궁금해집니다.   

 

오늘의 세상은 당시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본시 지혜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왕상3:9-12). 그러나 사람들은 그 결과에 집착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생활비를 많이 벌어들이며, 총명할수록 부를 얻는다는 식입니다. 잘되려면 똑똑해야 하고 영특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결국 지혜자가 되려는 이유는 부자가 되기 위함이요, 높아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소와 성전 기물의 기술자(출 35:10;렘 10:9)). 정책을 잘 수립하는 왕(왕상 5:12), 어려운 문제를 잘 처리한 여인(삼하 14:2), 혹은 애굽(창 41:8)과 바벨론(사 44:28)과 바사(에 6:13)의 점성가들과 마술사들이 지혜자로 높임을 받듯, 예수님 당시에도 자칭 지혜자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마 23:2). 

 

3. (잘됨과 재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둘째 본문 마태복음 23장, 예루살렘에 오르신 예수님은 터무니없이 높임을 받는 자들을 저격합니다. 말은 그럴듯하되 실천은 없는 그러나 존경받는 자칭 지혜자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과시욕, 종교적 허상을 고발합니다. 이들에게 임할 것은 잘됨이 아니라 재난입니다.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가난한 지혜자’가 되어야 함을 다시 각성시키십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1-12)

 

우리는 잘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잘됨이 ‘어떤 잘됨이냐’에 대해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방식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평화롭고 기쁜 삶을 살까요? 성령이 충만하면 고통이 사라질까요? 

 

성령이 충만하면 삶의 고통은 훨씬 심해집니다. 다른 이들의 고통이 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원치 않으면 성령 충만을 바라지 마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은 내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를 희생하여 이웃을 구하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삶입니다. 핵심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굶주린 이를 동정한다고 그들이 배부르고, 힘든 이를 동정한다고 그분들의 문제가 풀릴까요? 사랑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닙니다. 상황에 맞는 올바른 행동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자신의 고통은 해결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고통을 향해 뛰어듭니다. 고통으로만 따지자면 그 강도가 훨씬 더 셉니다. 

 

예수님이 늘 해피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스트레스가 없었을까요? 위선자들을 향해 엄중히 비판하고. 지적하고 화내시고, 그러다 그들과 갈등하고, 욕먹고 죽임당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살롬’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헛된 욕망을 버리게 된다는 삶의 지혜에 관한 말씀이지, 높임 받음과 부함에서 오는 평화롭고 기쁜 감정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3. (강함과 약함)

‘많음’과 ‘부함’과 ‘높임’을 얻는 것이 지혜라 여기던 시대가 탐욕스런 지도자를 낳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까지 삼키려하는 것을 목격한 바울은 탄식합니다. 고린도 후서 11장입니다.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19-20)

 

‘지혜’라 믿었던 것들, ‘지혜자’로 숭배하며 자랑하던 이들, 사람들을 조롱하며 멸시하는 자들, 오늘날의 누구입니까... 잘됨에 취하지 마시고, ‘자신을 낮추는 지혜’에 취하십시오. 그리할 때 주님 안의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지혜자’의 참 뜻입니다. 

 

우리는 공부 잘 하는 지혜, 직장생활을 눈치껏 잘 하는 지혜, 돈 많이 버는, 성공하는 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이 고단한 세상살이를 바르게 지키며, 키우며 살아내는 이들입니다. 어떤 부흥사는 노골적으로 지혜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복을 주신다고 선동합니다. 그가 말한 것은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탐심입니다. 

 

이벤트와 같이 화려하고 편리한 예배, 사람의 감성과 욕망을 부추기며, 더 큰 교회 더 많이 채우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더 많은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 나은 사람, 더 배운 사람, 더 부자인 사람들을 끌어 모아 그럴듯하고 더 우람하고 웅장하게 보일 순 있겠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사라진지 오래라는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은 복됩니다. 

 

끝으로 오늘 세 본문들에 등장하는 ‘청자’에 주목하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전도서), 예루살렘 성전 종사자들(마태복음), 그리고 고린도교회(고린도후서)입니다. 우리를 향한 말씀인줄로 믿습니다. 무거운 말씀을 드려, 저도 마음이 무거우나 우리 주님께서 가신 길, 깊고 넓게 묵상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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