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5:11-32, 호세아 14:1-9, 요한일서 1:8-2:6
시작하는 말씀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모두 회개에 초점을 맞춥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은 두 아들의 비교를 통해 회개한 사람과 회개하지 못한 사람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호세아서는 어떠한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며, 회개하고 돌아온 이후는 어떤 복을 받게 되는지를 말씀합니다. 요한일서는 진정한 회개란 죄에 대한 고백과 아울러 새로운 계명을 지키는 실천이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지적합니다.
1. 누가복음 15:11~32 / 회개한 아들과 회개하지 않은 아들
겉으로 볼 때 두 아들은 서로 반대된다
맏아들과 둘째아들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보다 나이 어린(네오테로스) 아들’과 ‘보다 나이 많은(프레스비테로스) 아들’입니다. 순서를 말하는 첫째와 둘째라는 의미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나이의 비교법을 통해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이 두 아들의 외적 차별성입니다. 큰아들은 기존 세대를 상징하고, 작은아들은 새로운 세대를 대변합니다. 큰아들은 전통을 중시하는데 반해 작은아들은 새로운 풍조를 따라갑니다. 두 아들은 서로 반대되는 계층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큰아들은 기존 질서를 앞세워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작은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큰아들은 신념에 사로잡혀 살고, 작은아들은 쾌락의 노예로 삽니다. 외견상 큰아들은 아버지와 가까이 있지만, 작은아들은 아버지와 멀리 있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큰아들은 정죄하는 자이고, 작은아들은 정죄 받는 자라는 점입니다. 큰아들은 자칭 ‘의인’이고 작은아들은 타칭 ‘죄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은 ‘네오테로스’와 ‘프레스비테로스’라는 말을 통해 큰아들은 율법주의자와 유대인을 가리키며, 작은아들은 당시 사회적 통념상 죄인들과 이방인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의 죄는 그 본질이 같다
이처럼 이 두 아들의 외면은 아주 분명하게 상반됩니다. 그러나 내면을 보면 이 두 아들을 얽어매는 죄의 본질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자신의 소유에 집착하고, 큰아들은 자신의 자리에 집착합니다. 작은아들은 재산권에 매달리지만, 큰아들은 장자권에 매달립니다. 작은아들은 물질에 사로잡혀 있고, 큰아들은 신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모두 써서 없애고, 큰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장자의 자리를 앞세워 자신의 동생을 마음껏 정죄합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떠나감으로써 아버지와 멀어졌고, 큰아들은 아버지와 한 집에 살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어김으로써 아버지와 멀어졌습니다.
이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 중심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본질이 같습니다. 이 두 아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징하는 인물들이지만, 그들을 얽매는 죄는 동일합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기중심의 삶, 이것은 우상 섬김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출 32:1).
출발은 같으나 나중이 달라진 두 아들
1) 작은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오다
두 아들은 출발이 같았지만 나중이 다르게 되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자기중심적 삶이 가져온 비참한 결과에 직면합니다. 그리고 소유의식과 욕망에 사로잡힌 처참한 삶에 더 이상 출구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17절). 작은아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습니다(18절). 자신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아들이었지만 아들로서의 지위를 포기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아버지에게 맡겨야겠다고 다짐합니다(19절). 그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20절). 아버지께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뉘우칩니다(21절).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기쁨으로 안아줍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와 하나 된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22-24절).
2-1) 큰아들은 동생을 정죄하다
그러나 큰아들은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더 완고하게 되었습니다. 큰아들은 돌아온 동생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신념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기준으로 동생을 정죄합니다. 동생을 가리켜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아들’(30절)이라는 한 그의 정죄는 저주에 가깝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창녀들과 동급으로 취급했다는 것은 그에게 돌멩이를 던져도 좋다는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형은 동생과의 모든 관계의 단절하고 부정합니다. 친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섬뜩함이 보입니다.
2-2) 큰아들은 아버지마저 정죄하려 들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큰아들이 아버지마저 자기 판단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아버지까지 정죄하는 것이 됩니다. 자기의 신념에 사로잡힌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분노합니다. 잃었던 작은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즐거움을 거부합니다(28절). 아버지가 공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자기의 의를 아버지의 사랑보다 우위에 놓습니다. 자신은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아버지 옆에서 늘 순종하고 살았지만, 자신을 위한 아버지의 사랑은 염소새끼 한 마리보다 못하다고 원망합니다(29절).
2. 호세아 14:1~9 / 회개 전의 죄와 회개 후의 복
호세아서의 본문도 의인과 죄인, 두 종류의 사람을 말씀합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길로 다니는 사람이요, 죄인은 하나님의 길에서 넘어지는 사람입니다(14:9). 호세아가 의인을 말하지만, 실은 모두가 죄인뿐입니다. 호세아는 죄인의 길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의인의 길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진실함이 없는 형식적인 제사, 강대국을 의지하며 전쟁을 선호하는 것, 그리고 손을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14:2~3). 호세아는 이러한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기쁘게 맞이하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합화 같이,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감람나무 같이, 포도나무 같이, 푸른 잣나무 같이 풍성하게 하시고, 복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14:5~8)
‘돌아오라’는 말에 사용된 히브리어 ‘슈브’는 구약성서 전체에 걸쳐 회개와 회복을 말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로, 누가복음의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3. 요한일서 1:8~2:6 / 회개의 두 요소
요한일서도 진리에 속하는 사람과 거짓에 속하는 사람을 구별합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며, 거짓에 속한 사람은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가 있다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9).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과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회개임을 요한일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요, 진리 안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정리하는 말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아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도 때로는 오랜 전통에 얽매이기도 하고, 새로운 흐름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소유의식과 탐욕에 사로잡혀 살기도 하고, 자기 신념의 틀에 갇혀 살아가기도 합니다. 물질세계의 포로가 되기도 하고, 정신세계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죄의 본질이 자기중심의 삶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 삶에 사로잡혀 인생을 낭비하기도 하고, 이웃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자기중심의 삶의 뿌리는 탐욕입니다. 탐욕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지적하신 죄의 본질입니다(창 3:16, 4:7).
탐욕에 따른 자기중심의 삶은 모든 관계를 파괴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뜨리고, 이웃과의 관계도 단절합니다. 결국 자기중심의 삶은 그 결과가 비참하고, 출구가 없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해결책은 단 하나, 진정한 회개뿐입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힘입어 하나님 안에 우리가 살고,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