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 18:13-27, 막 3:7~19, 고전 12:1-11)
교회 안의 직분이란 자리, 혹은 지위(position)가 아닌 기능(function)이고, 그 기능은 곧 섬김이다. 한국 기독교의 오래된 병폐에는 ‘주의 종’의 대한 왜곡이 있다. ‘주의 종’이라는 말은 주로 목사에 대한 별칭처럼 쓰이는데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바울의 전통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롬 1:1)고 소개한다.
당시 로마는 제국의 수도로 자유의 상징이었다. 로마인들은 노예나 이방인과는 구별되는 자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품고 살았다. 바울은 모든 이들이 흠모하는 로마의 자유 시민으로서 이런 사회적, 정치적 풍토를 잘 알고 있었지만,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를 나는 ‘자유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했다.
바울은 결코 그의 권위를 나타내려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성도들과 구별하려는 의도로 이 말을 사용한 적도 없다. 실제로 주의 종이라는 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주의 종’이라는 신앙 고백적 표현을 단순히 종교적인 권위를 대신하는 말로 사용한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종’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노예’나 ‘하인’이라는 원래의 뜻대로 ‘종된 섬김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1. 모세와 이스라엘의 전환 (출18:13-27)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의 출애굽 시작은 그의 출생과 인생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신뢰를 받지 못했다. 걸핏하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그들을 이끌고 떠나는 여정은 광야길의 환경보다 더 험난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위대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을 따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에서 기원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중재자로서 백성들을 재판하며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였다(16,20절). 그때에 모세의 장인이며 미디안의 제사장인 이드로가 그에게 물었다. ‘백성들이 어찌 모세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지’, ‘이 일이 한 사람에게 너무 중함으로 모세와 백성들 모두의 기력이 쇠할 것이므로 옳지 못함이라’(13-18절). 이드로는 자신의 판단에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대로 모세에게 조언했다(18:1).
그에 따라 모세는 백성 가운데 능력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신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분별하며 일꾼들을 세웠다. 이제 가나안으로 향하는 초기 이스라엘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세움을 입은 각 지체의 구성원들과 함께 스스로를 재판하며 공동체로서의 길로 나아간다.
2. 열두제자를 세우심 (막3:7~19)
예수께로 큰 무리가 따랐다(7절). 이는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고치심에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져라도 볼 심정으로 몰려 온 것이다(10절).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예수께서는 자기을 나타내지 말라고 하신다(12절). 이제 주님은 산으로 오르시고 거기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시며 그들에게 자신의 권능을 가지게 하셨다. 이는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시기 위함이었다(12-15절).
제자들을 ‘세우셨다’ 함은 직역하면 ‘창조하셨다’. ‘만드셨다’이다.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대표하는 열두제자를 세우신 예수님은 온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전권을 주신다. 이제 이들은 예수께로부터 받은 능력과 은사를 가지고 귀신(악)을 쫒으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구하는 종된 섬김의 길로 나선다.
3. 멀티(multi)를 원하고 찾는 세대에게 (고전12:1-11)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며 그들이 받은 은사들을 설명한다. 성령의 뜻대로 받은 은사로 그들은 서로를 섬기며, 세상으로 향한다. 본문에는 여러 섬김의 방편들이 소개되고 있다. 즉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는 것도 섬기는 것이요, 차를 운행하는 것,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것,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것, 누가 보거나 시키지 않아도 봉사하며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도 섬김이다.
연약함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도 섬김이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섬김이며, 모이기에 힘쓰는 것 역시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섬김이다. 도서관 책을 정리하는 것도 섬김이고, 읽은 책의 내용으로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도 섬김이며, 애찬을 준비하는 것도 섬김이고 설거지 하는 것도 섬김이며 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함께 유익한 교제를 나누는 것도 섬김이다.
서로 오래 참고 견디는 것도 섬김이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섬김이다. 징계하고 훈계하는 것도 섬김이고, 설교하는 것도 섬김이며,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섬김인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이다.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부여된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어느 한 사람에게 집중된 능력이 아니다. 주의 몸된 교회는 특정한 개인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내가 더 중하다거나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구하고 원하질 않는가. 세상은 다재다능한 멀티 플레이어를 선용하고 소비하나, 하나님 나라는 서로 종이 되어 서로를 섬기는 나라이다.
서로 종 되는 나라, 하나님 나라
교회는 섬기는 곳이지 운영하는 곳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과 조롱의 대상이 까닭에는 바로 ‘섬김의 영성’이 사라진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성찰과 참회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낮추고 종의 모습으로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정체성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종의 모습으로, 종된 섬김이의 모습이다.
직분은 다스리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종의 자리에서 주의 몸된 교회와 세상을 섬기며,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사람이다. 코로나 이후의 한국교회는 무엇보다 바로 이 낮아짐의 영성, 종된 섬김의 영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세상의 지도력은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토대로 한 교회의 능력은 도리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종됨의 섬김이다.
2023년은 감동과 감화로 인도하는 한 몸의 지체의식을 가지고 사랑과 일치로 세상으로 나아갈 때 교회는 성숙하고 성장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