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주현절(3-1) - " 종교개혁500주년,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여신도회 " / 인금란 목사 > 주현절

본문 바로가기

주현절 HOME > 설교올리기 > 주현절

[첫째해] 주현절(3-1) - " 종교개혁500주년,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여신도회 " / 인금란 목사

관리자 2018-01-18 (목) 15:55 6년전 2800  

 

 

종교개혁 500주년,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여신도회

(본문:  열왕기하 22:14-20, 요한 복음 2:1-11, 고린도전서 2:1~10)

 

                                        인금란 목사(여신도회 총무)

 

새해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전국의 장로교회가 여신도회 주일로 예배로 드립니다.

1937년 제 26회 교단 총회에서 1월 셋째 주일을 여신도회주일로 지키기로 허락된지 81년 동안 장로교회들이 여신도회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우리는 작년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며 ‘참교회를 세워가는 여신도회’라는 표어로 1년을 지냈습니다. 종교개혁 정신을 3년 동안은 지켜가자고 의논하여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교회’를 표어로 세웠습니다. 이 주제는 교단 총회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중세교회는 초대교회가 지녔던 생기와 기쁨, 감사가 1500년을 보내는 동안 타락하여 교회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성직자 중심의 권력을 가진 교회, 민중들은 헐벗고 고단한 삶을 사는데 교회당은 하늘을 찌릅니다. 최후심판의 두려움에 신도들을 떨게 하고, 교회당을 짓고 십자군 원정대의 돈을 마련하기 위해 부적과 같은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종교개혁 정신은 ‘아드 폰테스(Ad fontes) '본질로 돌아 가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교황의 교리나 교회법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그러니 종교개혁의 의미는 교회라는 생명공동체 안에 생긴 병을 치료하고 교회의 생명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는 우리에게도 진지한 성찰과 개혁을 요구합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비난에서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새해가 좋기는 합니다. 힘겹게 보낸 지난해, 어떻게 새해를 꿈꾸나? 막연했는데 새 시간이 열리니 ‘나 자신이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더크게 안고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절망의 나락에 우리를 그냥두지 않고 희망을 열어 줍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여러 왕중 가장 위대한 왕을 꼽자면 대부분 다윗과 솔로몬을 꼽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학자들이 꼽는 가장 훌륭한 왕은 바로 히스기야와 요시아입니다.

이들은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습니다. 특히 요시아 왕은 오랜 세월 야훼신앙을 오염시키고 더렵혀 온 이방 제사를 뿌리채 소탕하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벌인 왕입니다. 그는 성전에서 바알과 아세라 그밖의 일월성신을 숭배하려고 만든 제의 기구들을 모조리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제사장들을 내쫒고 추방하였습니다. 심지어 유다땅과 예루살렘에서 신접한 자와 우상과 모든 혐오스러운 것들을 없애고,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살려냈습니다. 그 결과“이와 같이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 기울여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주께로 돌이킨 왕은 이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열왕기하 23:25)”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당시의 종교개혁은 사회개혁과 별개가 아니었습니다. 외세를 등에 업은 부유층이 산당을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농민층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산당을 철폐한다는 것은 친(親)서민정책으로 선회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시아가 이렇게 거국적인 개혁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데는, 예루살렘 성전 보수공사 중에 발견된 두루마리가 큰 몫을 하였습니다. 그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이 요시아로 하여금 유다 사회를 뿌리째 개혁하도록 추동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 대목에 등장하는 한 이름, ‘네비아’(여성예언자)로 호칭되는 훌다에게 쏠립니다. 왕이 두루마리의 뜻을 해석하도록 특별대사들을 선발해 훌다에게 보냅니다. 힐기야 대제사장과 사반의 아들 아히감,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사반 서기관, 그리고 왕의 시종 아사야가 그들입니다. 다섯 명의 특사가 곧바로 훌다를 찾아가 두루마리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밝혀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때 훌다가 들려준 신탁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당시 유다 왕국에는 ‘나비’(nabi), 곧 남성예언자가 전혀 없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로는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도 있었습니다. 성서 전체에 걸쳐 고작해야 한두 차례밖에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훌다에 비하면, 단독 저서까지 갖고 있는 예레미야의 이름값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그 무렵 예레미야는 소명을 받고 활동한 지 5년이 지나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습니다.(예레미야서 1:2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중 관리들이 훌다를 찾아갔다면, 거기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개신교인들에게 훌다는 낯선 이름이지만, 유대 문헌에서는 제법 많은 정보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루살렘 성의 다섯 개의 문 가운데 두 개가 ‘훌다의 문’으로 불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람어 성경인 탈굼(Targum)은 훌다가 거주했던 곳을 ‘벧 울파나’(Bet-Ulpana), 곧 ‘공부하는 집’이라 소개합니다. 랍비 라쉬(Raschi)에 따르면, 훌다가 그 시대의 장로들에게 토라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훌다는 남녀를 통틀어 성경에서 특정 기록물의 가치와 의미를 판독하는 일에 종사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은 성전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곧 오늘날 신명기로 알려진 책의 핵심 장들이 야훼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훌다가 선언함으로써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개혁운동과 더불어, 광야시절부터 북왕국과 남유다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고대 역사가 재구성되고, 기록되고, 편집되는 활발한 문서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훌다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속의 수많은 문서들이 만들어지고, 수집되고, 편집되는 길을 연 최초의 신학자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훌다의 위상을 생각하면, 성경이 말해주는 정보가 너무나도 희박한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입니다. ‘살룸의 아내’라는 틀에 박힌 소개문구가 거의 전부입니다. 사사시대의 드보라의 경우, 인적 정보가 빈약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랍비돗의 아내’라는 수식어에 덧붙여 최소한 ‘에브라임 지파’ 소속이라는 것까지는 드러나 있는데, 훌다는 그런 기본정보가 전혀 노출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요시야 왕의 특사들이 훌다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이런 정보가 나와 있기는 하지요. “훌다는 예루살렘 제2구역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에게 가서 왕의 말을 전하였다.”(열왕기하 22:14; 역대지하 34:22) 도대체 예루살렘 제2구역이 어떤 곳이기에, 굳이 기록했을까요?

만약에 훌다를 ‘궁중예언자’로 본다면, 그곳은 귀족이나 고급 관료들이 거주하는 특화지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그 행정구역의 명칭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중앙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관리들과 궁중 예언자가 거주하는 지역이라면 ‘예루살렘 제1구역’이라 불려야지, 어째서 ‘제2구역’인가 말입니다. 만약에 훌다를 ‘궁중예언자’로 본다면, 그곳은 귀족이나 고급 관료들이 거주하는 특화지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그 행정구역의 명칭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중앙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관리들과 궁중 예언자가 거주하는 지역이라면 ‘예루살렘 제1구역’이라 불려야지, 어째서 ‘제2구역’인가 말입니다.

다윗 왕이 유다 왕국의 수도를 정할 당시, 예루살렘은 작은 도성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점점 정치적ㆍ종교적 중심지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인구 증가가 불가피했습니다.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은 동쪽과 남쪽 방향에 깊은 기드론 계곡이 놓여 있어서 그 방향으로 확장되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연히 서쪽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지역이 바로 ‘미쉬네’(Mishneh)라 불리는 예루살렘 제2구역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이렇게 새로 확장된 지역에 도대체 ‘누가’ 혹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살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경사도 심하고 면적도 협소한 예루살렘 제1구역에 비해, 새롭게 확장되어 나간 제2구역이 주거환경도 좋고 땅도 넓어서 부유층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전혀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지리적인 확장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행정상의 이분화 작업이 이루어짐에 따라, 제1구역은 ‘윗동네’로 부유층이 살고, 제2구역은 ‘아랫동네’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훌다는 북왕국 예언자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북이스라엘의 모세 전승을 보존하는 데 헌신하던 서기관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 전승의 특징은 신명기 신학으로 압축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벌을 받는다는 신학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유다 왕국의 다윗 전승에 배치됩니다. 다윗 전승은 다윗의 후손에서 영원히 왕위가 나오고, 하나님이 시온에 거주하시므로 유다는 망하지 않으리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훌다의 예언은 예루살렘 성전 수리 중 발견된 신명기 두루마리에 기초한다고 했습니다. 

그 내용인즉, 유다의 멸망은 요시야 통치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지연될지언정 결코 변치않는다는 것, 나라의 멸망으로 땅이 황폐해지고 주민들은 저주를 받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엄중한 메시지를 전해들은 요시야 왕은 다윗 신학을 검토하고 반성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사춘기 시절에 이미 다윗을 흠모하며 롤모델로 삼은 그였기에 훌다의 예언이 불편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훌다의 권위를 백 퍼센트 인정했습니다. 그녀의 예언으로 인해 요시야의 개혁은 엄청난 탄력을 받아 전국 규모의 총체적인 영적 대각성운동으로 번졌습니다. 그러니까 요시야의 개혁은 훌다의 신탁에 따라 이루어진 파트너십의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복음서의 본문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여신도주일을 맞아, 한국교회와 사회가, 그리고 우리들이 바뀌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신학의 전체주제는 변화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요한복음의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매장마다, 사건마다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신약성서에서 ‘여자여’ 이 단어는 9번, 나오는데 그중 6번이 요한복음에 나타납니다. 대부분 예수께서 여성을 부를 때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께서 다른 여자도 아니고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예수께 어머니 마리아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아직 ‘때’가 아니라는 예수의 반발에도 꿋꿋하게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는 어머니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가나 혼인잔치의 이야기가 ‘표징’, 단순한 기적이 아닌 구원자로서 ‘예수를 드러내는 시작’이라는 것을 감안해본다면, 마리아의 부드럽지만 흔들리지 않는 요청이 예수의 태도 변화를 가져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라는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어머니 마리아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느낍니다.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마음... 그 마음으로 우리 여신도회는 세월호 부모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아파하고, 탈북자들이 바로 설수 있도록 협력하고, 그 마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지울 수 없는 아픔에 공감하며, 또 다른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 콩고 내전 성폭력 피해자나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들을 위해 연대의 나비 날개를 펴는 나비 기금 일천만원도 전달하였습니다. 이 일천만원은 천명이 일일이 서명하고 일만원씩 내 주신 귀한 헌금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망가지는 게 안타까워 생명살림의 운동을 쉬지 않고 펼쳐왔습니다.

 

여성들에게 공감, 함께 느끼게 만들어주는 신체 부위 중 하나가 ‘자궁’, 히브리어로 ‘레헴’입니다. 이 자궁의 복수가 ‘라하밈’인데,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라하밈의 떨림으로’ 히브리 노예를 구원하기로 결심하십니다. 지극히 모성적인 하나님의 이 공감, 자비, 연민은 그래서 정의와 맞닿게 됩니다. 부족한 것, 약하고 힘없는 것, 중심부에서 밀려나 경계선 언저리에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이들에게 공감하며 눈을 맞추는 것,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애끓는 열정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공감, 하나님의 연민,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예수께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향해 하나님 나라의 첫 선포를 시작하신다면, 뭐라 말하실까요? 오늘 우리의 삶에서 또 다시,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자 하신다면, 깊게 숙성되어 좋은 포도주가 되길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요청하실까요? 

 

사도 바울은, 일관된 입장으로 자신이 고린도교회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환기시킵니다. 하나님의 증거 또는 신비를 전하는 것이 핵심으로, 그것을 포장하는 능숙한 말이나 세상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앞섰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분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는 결의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어찌 다른 지혜가 없었을까요? 그 모든 지혜보다 우선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실, 그것이 자신의 지혜의 핵심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다른 것은 소용없다는 단호한 태도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로 그것을 설파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그것은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보여주는 증거,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힘에 이끌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며, 잠시 쉬는 중에도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며 삽니다. 진실을 전하고자하는 사람들은 전하고자 하는 진실에 몰입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직접 말을 할 때나 서신을 쓸 때, 바로 그와 같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에 이끌려 자신을 전적으로 개방하는 태도로 임해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설교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될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영성으로, 말씀으로 새로운 교회를 세워가기로 결단합니다. 개혁의 길을 열어준 예언자 훌다와 주님의 사역을 열게한 마리아를 기억합니다.

그들의 자리에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진실한 말과 지도력이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교회관에는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다양한 여성의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루터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들의 다수가 여성이었습니다.

캘빈 역시 시대의 사고를 앞서는 여성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캘빈은 남녀의 차별현상은 역사에서는 차별이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하다고 하면서 성령께서 여성으로 하여금 교회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세우실 것이라 했습니다. 특히 캘빈은 교회를 ‘품에 안아 젖을 먹여 키우는 만남의 관계’로 표현합니다. ‘교회는 어머니의 품이다.’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안아 주시는 품이다.’라고 했습니다. 말년에 이르러 캘빈은 “어머니(교회)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고, 가슴에 안아 젖을 먹여 기르고, 육신을 벗을 때까지 안내해 주듯이 교회가 우리를 품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에 이를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부단히 개혁하고 또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 여성들이 하나님과 주님을 배우고 물고를 터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살아 내는 일, 성령과 함께 하는 내입에서 나오는 진실한 말과 말씀을 해석하는 혜안으로 변화의 물고를 터가는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품어야할 자리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하시는 여신도회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