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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6-2) - " 당부하는 말 " / 김주한 목사 > 주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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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주현절(6-2) - " 당부하는 말 " / 김주한 목사

관리자 2019-02-08 (금) 16:16 5년전 3542  

본문) 신명기 4,32-40, 고린도전서 3,18-23, 마가복음 10,13-16

    

오늘 우리는 신명기서에 나와 있는 말씀 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모세의 영도 아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여 년의 기나긴 광야생활을 마감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앞에 보이는 저 요단 강만 건너면 그렇게도 기대하였던 젖과 꿀이 흐르는 팔레스티나,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서 본문의 배경입니다. 신명기서는 모세의 고별설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행한 마지막 당부요 교훈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신앙의 원동력이요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신앙의 좌표를 일깨워주는 신앙생활의 지침서라고 할까요,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또 하나의 본문, 고린도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철학이나 지식보다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역설합니다. 바울은 당시 고린도교회의 분파주의를 책망하며 신앙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근본이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을 자랑할지언정 사람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이 말씀은 깊이 새겨 볼 대목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지도자나 사역자들이 더 높이 추앙을 받고 성도들이 맹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이 높아지고 추종 세력이 생겨나면 고린도교회처럼 파당과 분열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또다른 본문,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비유하여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0:15)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여 살아갑니다. 어린 아이들의 순수성, 천진한 마음을 가진 자라면 결코 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위의 세 본문 말씀의 핵심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말씀 잘 지켜 준행하라입니다. 당연하고 평범한 교훈 같지만 이 짧은 말씀 속에는 인생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왕이 다음 차기 왕이 될 사람에게 당부하는 말과 복을 빌어주는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이삭이 야곱에게, 야곱이 요셉에게,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다윗이 솔로몬, 바울이 디모데에게 등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장면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한 교훈으로 바로 신명기서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0, “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 주는 주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잘 살게 되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영원히 주시는 땅에서 길이 살 것입니다.” 신명기서 1장에서부터 34장 마지막 장까지 이와 같은 말씀이 수없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잘 지켜라. 그러면 복을 받을 것이다.’ 신명기서의 핵심이요 아니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키워드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도 바울 사도도 오늘 선택된 본문에서 선포한 말씀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신명기 본문에서 모세가 말한 주님의 규례와 명령, 이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장 떠오르는 생각이 예수님께서 바리새파를 공격하시고 율법학자들을 비판하셨고, 바울 사도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는데 율법은 이제 필요 없는 것 아닌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여전히 그리스도인들도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 율법은 구약시대, 유대인들에게나 해당한 것이고, 신약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만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율법과 복음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게 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해 큰 오해가 생깁니다.

우선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율법과 복음은 하나님 말씀의 두 가지 형식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실 때 율법이라는 형식과 복음이라는 형식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을 문자로 기록해 놓은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과 복음 둘 다 모두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율법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여기에 대해 개신교회의 초석을 놓았던 종교개혁자들이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특히 개혁교회, 장로교회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존 칼빈은 율법의 기능들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또 율법은 죄를 억제해 주는 기능이 있다.’ 율법이 없다면 뭐가 죄고 죄가 아닌지 분별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도둑질이다. 도둑질에 대한 형벌은 이러저러하다.’ 이렇게 법으로 규정해 놓으니까 도둑질은 죄이고 죄를 범하면 그에 따른 형벌을 받게 됩니다.

금번 설 명절날 이동 차량 숫자가 작년보다 조금 늘어 570만 대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귀경길에 교통 정체가 어느 해보다도 극심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교통 체증이 극심하여 짜증날 때 파란 선 일차 선 안으로 달리고 싶은 생각 없었습니까? 그런데 그 선으로 달릴 수 없는 차량이라면 우리는 스스로 억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규정을 위반하면 범칙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스스로 억제합니다. 율법이 바로 이처럼 스스로 억제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실 때, 지킬 수 있는 것을 명령하시는 게 아니라, 지켜야 하는 것을 명령하신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과연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우리의 능력을 테스트 해보기 위한 시금석으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계명을 주신다는 말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능력으로, 내 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처럼 교만하고 오만한 태도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율법의 조문들을 다 지켜 행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3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율법을 지켜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버림받고 나가 죽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율법은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연약하여 날마다 실족하고 넘어지고 또한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죄를 숱하게 범하기 때문에 우리가 나아갈 곳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붙들고 회개하고 돌이켜 주님과 함께 복음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칼빈은 그래서 율법은 결국 그리스도의 피난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아느냐....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요 마침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율법의 행위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영생 소망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계명 잘 준수하라고 명령한 말씀이나 사도 바울이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 붙들고 살라는 말씀이나 또 어린 아이가 부모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신뢰하며 살아가듯이 오늘 성경 말씀들은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붙들고 살아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 붙들고 살아라!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라. 그 안에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다 들어있다.’ 이런 말씀입니다.

또 한 가지 오늘 본문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견대내온 지난 40여 년의 광야생활은 참으로 열악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습니다. 주거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식량과 물이 부족하여 생존 자체가 불가능 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하며 저항하기도 했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렇게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지 약속만을 굳게 믿고 달려왔습니다.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땅 가나안에서 편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요단강 동편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어떻게 하면 저 땅을 효율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작전회의를 해야 할 타이밍 아니겠습니까?

이 급한 상황에서,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40여 년 기대하고 소망하며 견뎌왔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이 상황에서 모세가 백성들을 모아 놓고 고작 해 준 말이 하나님 잘 믿어라. 계명 잘 지켜라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관심 있게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결코 무혈입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곳 원주민들과 치열하게 전쟁을 하며 치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당연히 병법을 가르쳐주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군대를 어떻게 조직하고 작전을 어떻게 잘 짜서 어떤 경로로 치고 들어가야 하는지 전략과 전술을 가르쳐 주는 게 필요한 교육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의 선포를 들어보십시오. ‘너희들 반드시 이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밀고 들어가라.’ 그렇게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저 오직 한 가지 하나님 잘 섬겨야 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따를 수 있는지그걸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 그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가는지 그 모델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원대한 섭리와 역사 가운데 하나의 샘플로 선택받은 민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선택받은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인 사랑이요 역사입니다. 우리 집안의 신앙의 연조가 깊어서, 또 우리의 조건이나 업적이나 공로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자녀 삼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자녀 삼으셔서 의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의인이 들어와서 성인이 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들어와서 의롭게 되는 곳입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을 잊지 말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는 길에 늘 동행하시고 어떠한 환란이나 시련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충만하게 주실 것입니다. 올 한 해도 하나님 말씀 붙잡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복된 하루 하루 일상이 되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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