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44:1-8/ 행5:29-42/ 마11:2-15
초등학교에 다닐 때 유난히 교회를 비난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런데 순간 머리에 비상한 답이 떠올랐습니다. “처녀라고 왜 아이를 못나냐! 우리 동네 누나는 결혼도 안했는데 애 낳았잖아?” 그 아이는 한동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제 자신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교회에서 늘 듣는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과학적, 합리적으로 구원하시지 않고 기적으로 상식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구원하실까? 이 의구심은 오랫동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신학교 다니던 시절, 제게 다가온 일생일대의 큰 위기 앞에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면 이 절망의 자리에서 구원해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제 평생 처음으로 상식을 초월한 놀라운 방법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도와달라고 두 손 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날, 하나님은 상식을 뛰어넘어 찾아오셔서 고통과 절망에 매었던 마음의 사슬을 단번에 끊어주시고 하늘의 평안으로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시는 구원(사44:1-8)
구약본문 사44:1-8에는 인간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어서 하나님이 친히 그의 손으로 그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어도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직접 그 창조의 손으로 다시 살려내시는 방법 외에는 죽은 사람 살려낼 방법은 없습니다.(사44:3-4)
“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애굽 왕 바로의 권세아래 포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백성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바로를 다스리시고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친히 그의 피조세계 가운데 강림하셔서 상식을 뛰어넘는 큰 능력을 행하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성경은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아닌 매우 특별하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의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시고 그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또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구원하시며 마침내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심으로 최종적인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다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늘이 땅이 되고 영원이 시간이 되며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는 방법 외에는 이 피조세계 안에서는 그 누구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놀랍고 신비합니다.
심판에서 은혜로!(마11:2-4/ 사44:3-4)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이 불가능한 인간을 구원하십니까?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의가 아닌 “전혀 새로운 의”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은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마11:2-4을 보면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이 죄인을 심판하시기보다는 심판받아야 할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셨다는 말을 듣고 제자를 보내 묻습니다(마12:2-3).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메시야가 모든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심판 주’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자비를 베푸십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요한이 사람을 예수께 보내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마11:2) 예수님은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지금 예수님을 통해 목전에서 모든 병든 자들이 치유되고 고통으로부터 해방 받는 모습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오늘 사44:3-4에서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곧 지금은 마지막 심판 앞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은총의 때이며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사 목마른 자에게 물을, 성령을 자손들에게,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주시는 분임을 선포했습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름 땅에서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내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
심판이 당연합니다. 죄 지은 자는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바르게 되고 죄악과 불의의 세상이 정화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마지막 심판을 하시기 전에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마지막 은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은혜의 해, 희년의 회복을 주신 것입니다. 심판만으로는 이미 죄의 포로 된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율법을 행할 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율법의 의로서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엡2:1)이 어떻게 일어나 걸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먼저 살려내야 하지요. 그래야 똑바로 걷지 않겠습니까? 병든 사람은 먼저 치료해야지요. 그래야 건강하게, 바르게 온전하게 살지 않겠습니까?
이재철 목사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홍성사’를 설립해서 질 좋은 양서와 기독교서적을 출판하는 성공한 비즈니스맨이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출판사운영을 아내에게 맡기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술을 좋아해서 매일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취하면 성악을 전공한 아내를 불러내 노래를 시켰습니다. 아내는 싫은 내색 없이 노래를 불러줍니다. 술 마시고 집에 와 한 밤이건 새벽이건 꼭 초인종을 눌러 아내가 문열어주어야 들어갔고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서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내는 천성이 좋아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어느 날, 밤늦게 술에 취해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려다 마침 주머니 속에 열쇠가 손에 잡혔고 한 번 그 냥 들어가 보았습니다. 안방에서 아내가 노트에 글을 쓰다 잠이 들었는데 어깨너머 눈물에 젖어있는 아내의 글을 훔쳐보았습니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수유리 너머로 갔다. 하염없이 시골길을 걸으며 어김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약 먹고 죽을까, 손목을 그어 죽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취할 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아왔다.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께서 내게 주신 남편임으로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이 주신 사명임으로 사랑해야만 한다. 내 약함을 아시는 주님 도와주세요.”
이 목사님이 그 글을 읽는데 순간 그의 귀와 마음에 큰 북소리가 쿵쿵 울려왔습니다. 지축을 흔드는 거대한 북소리였습니다. 교회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지금까지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주님 때문에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내는 천성이 좋은 천사가 아니라 죽을 만큼 괴로워도 날 위해 죽으신 주님이 날마다 아내를 붙들어주셔서 그 힘으로 남편을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의 삶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은 천하에 못된 자신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아내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 자기포기의 회개와 온전한 믿음으로!(행5:29-42)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자기를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하십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 행5:30-31를 보면 사도들이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가 나옵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사도들이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서 죽인 예수를 우리의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행5:30절)”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죽였던 그 예수의 이름으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걷고(행3장)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것을 목전에서 보고 있었습니다(행5: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과 표적이 나타난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지금 부활하셨다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아닙니까? 자,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그 분이 지금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당황한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 말라’고 입을 막았으나 사도들은 계속해서 부활의 주님을 증언했습니다. 왜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과 “하늘로 오르심”을 그들에게 증언합니까? 예수를 죽인 그들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행5:30-31).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神)은 배요”(빌3:19)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힘의 한계, 완전한 절망에 이르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손들지 않습니다. 머리 숙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일을 애써 외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으십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능력으로 그들이 죄인으로 정죄하고 죽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보여주심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절망적인 죄인의 괴수인지를 드러내시고, 다른 한 편으로는 지금도 예수의 이름으로 소망 없는 사람들이 살아나고 치유되며 새 삶으로 새 출발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오직 주 예수를 붙들고 살아가도록! 더 이상 살아계신 하나님을 피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난 자들의 구원은 망가진 파선 직전의 배를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의지하고 살았던 그 배, 내 고집, 내 아집이라는 배를 포기하고 그 파도 위를 걸어오시는 분, 죽음의 파도를 정복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의 손을 잡고 그 분과 함께 파도 위를 걷는 모험을 시작하는 것입니다(마14:22-33)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배우거나 깨달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기중심적 행동과 시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고 예수께서 내 안에 살게 하시는 것,(갈2:20) 예수님을 우리 삶의 처음과 나중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사44:6) 그래서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유일하신 구주로 받아들이고(행5:31) 그의 통치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그분 자신이 길(the way)이 되십니다.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그 분 자신이 진리(the truth)이십니다. 어떻게 해야 생명을 얻는지를 알려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분 자신이 생명(the life)이십니다.(요14:6) 그 분이 가시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 분을 만나는 사람은 죄에서 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3. 침노하여 빼앗는가, 은혜로 얻는가?(마11:2-15)
마지막으로 마11:2-15에서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하십니다(11절). 그는 구약의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선지자(말3:1)요 장차오실 그리스도를 친히 보며 증언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지자도 앞선 선지자들로부터 장차 이런 예언자가 올 것이라고 예고된 선지자는 없었고 어떤 선지자도 목전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면서 예언한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큰 자입니다.(마11:11) 그는 오신 그분, 예수님이 은혜의 해(눅4:18-19)를 전파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지식보다 큰 지식이 없습니다. 주 예수의 피로 씻음 받은 죄인보다 더 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강한 자도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는 큰 자입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말씀하신 바가 매우 난해합니다(마11: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나라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가 아니라 매우 적극적으로 두드리고 취하는 자의 것이라고 이해되어져 왔고 혹은 하나님의 나라가 값을 지불하거나 대가를 치루지 않고 강도가 강탈하고 적군의 성을 공격하여 빼앗듯이 공로 없이 값없이 은혜로 취하는 나라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개역개정 이외의 다양한 번역본들은 그 의미가 보다 선명하고 일관되게 번역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NIV) “세례 요한의 날로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으로 점령해 왔고, 힘 있는 자들이 그것을 붙들고 차지하려 했다”
(현대어성경) “세례 요한이 설교하고 세례를 주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공격받아 왔고 공격하는 자들이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였다.”
(JKB)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는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NASB) "세례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폭력에 시달리니 난폭한 자들이 힘으로 천국을 장악함이라"
즉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힘센 자들(자신에게 율법을 지킬만한 능력이나 힘이 있다고 믿는 자들)은 마치 천국을 힘 즉 자신의 공로로 뺏어서 차지하는 곳인 것처럼 해왔다는 것입니다. 폭력배나 군대처럼 힘으로 한 대상이나 지역을 정복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의 공로와 능력과 선행과 인간의 의로 정복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의와 공로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거듭남, 믿음)로 그가 주시는 놀라운 능력을 힘입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놀랍고 놀랍습니다. 크고 크십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결코 닿을 수 없는 끝없는 신비의 심연이요 제한된 인간의 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절대 절망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제게 놀라우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