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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주현절(3-3) - "길 위에서 영광을 나타내시는 주님" / 이태영목사

관리자 2018-01-19 (금) 10:29 6년전 2704  

길 위에서 영광을 나타내시는 주님

(요한복음 2:1-11, 열왕기하 4:1~7, 시편 27:1, 4-9)


이태영 목사 (군산 수산교회)


오늘은 한국 장로교회들이 지키는 81회 여신도회 주일입니다. 여성들은 구약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역사적 전환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곤 했습니다. 여신도들은 초대교회 이후에도 믿음의 딸로, 기도의 어머니로 교회를 섬기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이름에 여성은 없지만, 예수님 옆에는 항상 여성들이 함께 하며 제자의 역할을 묵묵히 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여성들이 예수님의 옆을 지켰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알고 증언한 이도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은 가나혼인잔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의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주님에 대한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여신도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더욱더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사흘째 되던 날’(1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 요한복음서의 말씀, 2장 1절에서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표현은 1장에서 세 번 반복되는 ‘다음날’(1:29, 35, 43)이라는 표현과 비교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튿날’이라고 해서 ‘2’라는 수 개념이 들어있는 것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에는 그저 ‘다음날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2장 1절의 ‘사흘째 되던 날’은 셋이라는 수의 개념이 분명하게 들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서가 ‘다음날’(1:29), ‘다음날’(1:35), ‘다음날’(1:43)을 세 번 반복한 다음에 ‘사흘째 되던 날’(2:1)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흘’이라는 말 그 자체가 갖는 특별한 의미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1장에 ‘다음날’이 세 번 반복되었고 2장에서 ‘사흘째 되는 날’이 나왔기 때문에 그 배경에 대해서도 유심히 살펴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최소한 첫 번째의 ‘다음날’이 나오는 1장 29절부터 혼인잔치의 이야기가 끝나는 2장 11절까지를 하나로 묶어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넓게 보면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오는 1장 19절에서 제자들과 가버나움에 가졌던 말씀을 전하는 2장 12절까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장절의 구분으로 보면 1장과 2장은 서로 나누어집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서는 세 번 반복되는 ‘다음날’과 ‘사흘째 되던 날’을 통해서 혼인잔치의 이야기가 세례 요한의 증언과 연결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연결 고리는 날짜입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고 그의 제자 둘이 예수님을 따라 옵니다(1:36, 40). 그 중의 한 사람은 안드레입니다(1:40). 이들이 시몬 베드로를 데리고 옵니다(1:41~42).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가 사는 한 동네 사람입니다(1:44). 요한복음서는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 제자들이 함께 초청을 받았다고 하며(2:2), 예수님의 첫 이적을 보고 “제자들이 믿었다”(2:11)는 말로 전체 이야기를 마무리 짓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앞뒤 이야기를 단단하게 묶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가나 혼인잔치의 이적이 제자들을 부르심,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 물이 포도주로 변한 때는 언제인가


가나 혼인잔치 이적의 핵심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할 수 있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때는 언제인가?’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견해가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인들이 물을 항아리 위까지 채웠을 때, 그때 변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항아리 속에서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생각도 가능합니다. 항아리에 있을 때는 물이었는데, 하인들이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는 동안에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가능성은 두 가지이지만 우리는 성경 속에서 곧바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장 9절을 보면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인들이 뜬 것은 물이라는 것입니다. 포도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인들은 분명히 물을 떴는데, 연회장이 맛을 볼 때에는 이미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항아리의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는 짧은 시간내에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요한복음서의 증언입니다.


 3. 네 개의 명령 중에서 마지막 명령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제 말씀을 향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갑니다. 요한복음 2장 1절에서 11절까지 명령어는 모두 네 개가 나옵니다. 첫 번째 명령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입니다. 두 번째 명령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7절)입니다. 세 번째 명령은 “물을 떠라”(8절)입니다. 개역개정성경에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명령이 한 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떠라, 그리고 갖다주라. 연회장에게”입니다. 명령이 두 개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 명령은 “떠라”가 되고, 네 번째 명령은 “갖다주라”가 됩니다. 첫 번째 명령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한 것이고, 두 번째 명령부터 네 번째 명령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네 개의 명령을 증언하면서 특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행하라,” “채우라,” “떠라” 등 첫 번째부터 세 번째 명령까지는 모두 같은 형식의 명령입니다. 큰 틀에서 확고하게 지시하는 명령의 형태입니다. 반면에 네 번째 명령은 형식이 다릅니다. “갖다주라”는 명령은 아주 세밀한 관점에서 반복적, 또는 지속적으로 하는 명령의 형태를 갖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세 번째 명령까지는 조금 멀리서 마리아와 예수님, 그리고 하인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마치 광각렌즈로 찍은 사진처럼 보입니다. 그러다가 “갖다주라”는 네 번째의 명령에서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이 망원렌즈로 보는 것 같이 클로즈업이 되면서 동영상의 모습이 됩니다. 예수님의 눈빛, 입술, 음성, 손가락과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전달되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연히 강조점이 네 번째의 명령에 주어집니다. 이 네 번째의 명령에 와서 이야기의 긴장감이 가장 팽팽해집니다. 가나 혼인잔치 이야기를 판소리로 한다면, 이 네 번째 명령이 가장 절정으로 올라가는 대목이요, 관객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대목이요, 모두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대목이 됩니다. 요한복음서는 이처럼 네 번째의 명령을 특별하게 표현합니다.

이제 하인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뜬 물을 가져갑니다. 그런데 놀랍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가져가는 하인들의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합니다.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연회장에게 포도주를 갖다주는 하인들의 얼굴이 기쁨과 환희에 가득찹니다. 요한복음은 이 모든 과정을 다음의 표현으로 분명하게 정리합니다.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9절) 

 

4. 제자들을 부르심과 가나혼인잔치 이적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가나혼인잔치의 이적을 통해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봐야할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다”(요 2:11)는 증언입니다. 육신이 되신 로고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은 요한복음서 증언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적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이 부분에 깊은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이제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표현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한복음서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증언(1:29~51)을 가나혼인잔치의 이적 증언(2:1~11)을 하나로 묶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와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야기는 어떠한 연관이 있을까요? 요한복음서는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물이 평범한 삶을 말하는 것이고, 포도주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라면, 제자들의 믿음도 포도주처럼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당연하고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여기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갑니다. 변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변화된 시점에 깊은 관심을 둡니다. 요한복음서가 물이 포도주로 변화한 시점에 대해 특별한 증언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거룩한 변화는 언제 일어나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제자들의 변화는 사명을 받아 가는 길에서 일어난다


주님께로부터 부름을 받는 일과 보냄을 받는 일은 제자들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측면입니다.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아리에 물이 담겨질 때가 부르심을 받을 때라면, 물이 떠져서 연회장에게 향하는 때는 보내심을 받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르심도 은혜요, 보내심도 은혜입니다. 

물론 보내심 못지않게 부르심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인들이 물을 채울 때, 위까지 가득 채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개역개정역에 ‘아귀’(요 2:7)라고 번역된 말 ‘아노’는 ‘위’라는 뜻도 있지만 ‘하늘’이라는 뜻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귀까지’ 채웠다는 말은 신앙적으로 보면 ‘하늘을 향해’ 채웠다는 말이 됩니다. 하인들의 믿음을 잘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부르심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보내심을 받고 보내어지는 그 길에서 거룩한 변화가 일어남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입니다. 아직은 밋밋한 물입니다. 밋밋하지만 부르심을 받은 물이요, 항아리에 채워진 물입니다. 이제 이들은 보내심을 받을 것입니다. 하인들의 손에 담겨 물이 연회장에게 갖다주어진 것처럼, 제자들은 성령의 손에 이끌리어 세상에 보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기쁨을 가져오는 참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물에 불과합니다. 아직은 포도주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내심에 순종한 물은, 성령의 손에 이끌린 물은 보냄을 받는 길 위에서 맛있는 포도주로 변화될 것입니다. 포도주이기 때문에 보내심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밋밋한 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내심을 받는 것입니다. 물은 보내심을 받으면서 성령의 역사를 기다립니다. “저는 밋밋한 물이오니 성령이시여, 이제 저를 마음껏 사용하셔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포도주를 원하는 연회장에게 물이 보내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물로 볼 때 죽음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연회장은 자신이 받은 것이 포도주가 아니고 물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땅에 쏟아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물은 하인들의 손에 들려 보내집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맛난 포도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내심을 받는 길도 죽음의 길입니다. 사방이 박해자들로 가득합니다. 온통 가시밭길이고,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순종과 믿음으로 그 십자가의 길을 갈 때, 그 길에서 성령에 의해 거룩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6. 순종하라. 그리고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라


항아리의 물은 보내심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한 여인에게 일어난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가 죽은 제자의 아내에게 명령한 내용도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순종을 강조합니다. 

엘리사는 그릇을 많이 빌린 후에 두 아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라고 합니다. ‘닫는다’는 말의 원뜻에는 ‘잠근다, 폐쇄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을 닫으라고 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향한 문을 닫되,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하늘의 문을 활짝 열라고 한 것입니다. 

여인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두 아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습니다. 두 아들은 어머니에게 그릇을 열심히 가져가고 어머니는 부었습니다. ‘붓다’는 말로 번역된 성경 원문에는 ‘쏟다, 쏟아붓다’는 뜻도 있습니다. 한 그릇 밖에 없던 기름이었지만 여인과 두 아들에게 쏟아지는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열왕기서는 기적 이야기를 전하면서 특별히 두 아들이 그릇들을 어머니에게 가까이 가져가는 모습과 여인이 기름을 그릇에 쏟아붓는 모습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들의 분위기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날랐던 하인들과도 비슷합니다. 자신들에게 내려진 명령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설레임과 기쁨으로 준비하는 믿음을 보여 줍니다.


7. 믿음과 순종의 결과는 기쁨과 찬양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됨으로 가나 혼인잔치는 더욱 기쁨으로 채워졌습니다. 엘리사의 말에 순종한 여인의 집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시편 27편 1절의 말씀처럼 이전의 두려움과 무서움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 모든 일이 순종과 믿음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순종의 길을 갈 때, 때로는 막다른 곳에 처하기도 합니다. 순종하며 가는 길이지만, 우리의 능력과 믿음이 부족하므로 두려울 때가 있고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보시고 우리의 믿음을 변화시키십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이, 빈 그릇에 기름이 차듯이 우리의 믿음이 성령이 도우심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변화의 마지막 모습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27편 6절은 그 기쁨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8. 초대교회 사도들에게도 이러한 변화의 과정이 있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보내심을 받는 길은 고난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맹물과 같은 인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틈나는 대로 자리다툼까지 했던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는 도망을 갔고,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에도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승천을 앞둔 예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이후였습니다. 이들은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다락방에 함께 모여 기도하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온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스테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죽기도 하고(행 7:54~60), 요한의 형제 야고보처럼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행 12:2).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창에 찔려 죽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다가 결국은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처음에는 모두 밋밋한 물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고, 이후에 보내심을 받아 전도자의 길을 가면서 모두 천국 잔치를 위한 귀한 포도주로 변화되었습니다. 


9. 보내심에 순종하며 천국잔치의 포도주가 되기를 기도하자


세월이 흘러서 오늘날 수많은 선교사님들도 포도주로 변화 받는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선교사로 결단하기 전에는 물과 같이 평범한 믿음이었으나 파송예배를 드리고 선교지로 가면서 더욱 맛있는 포도주 믿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 길을 간다고 해도 때로는 두려움과 무서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치안이 불안정한 곳이나 기독교를 박해하는 나라로 파송될 때에는 이러저러한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성령께 맡기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하는 가운데 거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천국잔치를 위한 맛난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신도회 주일입니다. 여신도들을 비롯해서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입니다. 감사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으니 사명을 주시고 보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맹물이지만, 맹물처럼 약한 믿음을 가졌지만, 주님께서는 이처럼 맹물같은 우리를 세상으로, 사명지로 보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갈 때, 그 길에서 우리를 맛있는 포도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보내심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보내어지는 과정에서, 쓰임을 받는 과정에서 거룩한 변화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길 위에서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보내심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성령의 도움을 기다립시다. 밋밋한 물과 같은 우리의 믿음을 천국잔치를 위한 포도주 믿음으로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내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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