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2:1-3, 롬 14:1-12, 막 2:23-3:6
1) 설, 신학교육주일, 코로나 사태에서 드러난 교회의 한계
모두들 설을 잘 쇠셨지요? 다시 한 번 새해인사 드립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님들과 가족들이 주 안에서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축원합니다. 이번 설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온 가족이 모두 함께 모이지 못하고 분산해서 모일 수밖에 없는 아쉬운 명절이 되었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지만 다시는 이런 명절이 오지 않기 위해 우리가 지혜롭게 절제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 총회가 정한 신학교육주일입니다.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신학교가 한신대학입니다. 우리 교단 신학교가 건강한 신학을 가르쳐 우리 한국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갈 좋은 인재들을 잘 키워갈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 치명타를 맞은 교회의 상처가 큽니다. 연일 교회의 부주의에서 발생한 코로나 확진자들이 발생함으로 교회가 ‘동네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현실을 보며 참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모두가 삼가 조심해서 행동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는 거룩한 교회를 이루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세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2)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
마가복음 본문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 사이에 있었던 안식일 논쟁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시장했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안식일에 곡식을 잘라먹는 것은 안식일 규례에 어긋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성소에 들어가서 진설병 떡을 얻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먹인 것을 예로 들면서 아주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어서 회당에 들어 가셨는데 거기 한쪽 손이 오그라든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것을 찾기 위해 어떻게 하는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랑곳 하시지 않고 그 장애인을 일으켜 세우시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시고 대답이 없자 노기(怒氣)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며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시면 분명히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고발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아시면서도 안식일 규례를 넘어서 버리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할 사실은 안식일이라는 제도 보다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신 예수님을 바로 보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라는 종교적 틀을 생각하기보다 먼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휴머니스트였습니다. 법보다 사람을 먼저 보신 것입니다.
안식일 제도에 대해 예수님은 그것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합니다.
3) 안식일 -생명의 근원을 찾는 날
창세기 2장의 말씀은 안식일 제도의 근원을 밝혀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시고 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여 구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말씀은 피곤하셔서 쉬셨다는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모든 생명의 창조를 마치시고 창조의 기념일로 그 날을 구별하여 복 주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해 예배하는 날로 만드셨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들에게는 복음(福音)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욕심으로 종들에게 쉬지 않고 계속 일을 시키려고 하는 것에 선을 그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20장 십계명 중 4계명인 안식일 계명에는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0,11)고 아주 명확하게 안식일 제정의 의도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종들도 짐승들도 안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십계명에 근거하여 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4) 연약한 자를 사랑으로 받으라
로마교회는 당시 세계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로마의 다양함만큼이나 다양한 여러 다양한 생각과 생활방식들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따라서 무슨 음식을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 혹은 어떤 날을 특별한 날로 여겨서 그런 날을 특별하게 의미부여를 하여 지킬 것인지 말 것인지 등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사도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어떤 특정한 문화적 전통만을 따르라고 하기보다는 다양함을 서로 사랑으로 용납하고 이해하도록 해서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로마서 14장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어떤 음식을 먹는지 혹은 어떤 날을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하여 그 날을 기리든지 그것을 놓고 서로 비판하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이해하고 용납하라고 하는 권면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서로 갈등하며 비판하지 말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서로 이해하는 폭넓은 마음을 갖고 교회를 평화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종교개혁시대에 있었던 아디아포라(adiaphora) 논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 루터파교회 안에서 과거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던 복식이나 의식에 관한 것을 사용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을 한 일이 있습니다.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아서 이를 “아디아포라” 논쟁이라고 불렀습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것을 두고 거기 매달려 논쟁하고 싸우는 것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의 말씀이 바로 아디아포라 논쟁의 대표적인 예가 되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의 안식일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자칫 놓치기 쉬운 일들이 바로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문제에 집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대면 예배로 드리느냐, 아니면 영상예배로 드리느냐 하는 말씀을 갖고 논쟁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한 것 입니다. 아디아포라 논쟁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본질적인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지 대면예배라는 예배의 형식이 아닙니다.
지금 우 리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하나님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기름진 송아지 제물이나 풍성한 제물을 제단에 드리는 것보다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5) 맺음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예배를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 교회가 소중하게 지켜가야 할 아주 중요한 신앙의 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대면 예배가 다른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의 안전에 위해(危害)가 될 수 있다면 먼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서 우리의 예배를 비대면 예배로 드리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악(善惡)의 문제가 아닌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입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비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생명우선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다시금 우리 교단신학이 강조하는 “정의 평화 생명(JPIC)”의 깃발을 치켜들어야할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