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4:16~30, 사 61:1-9, 행 4:5-12
오늘은 설민속 주일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설은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 인사 드리고, 모든 가족이 모여 덕담과 안부를 나누며, 새해를 함께 시작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새해라고 하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가장 친숙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함으로 그 사랑의 힘으로 새로운 시작을 열고, 낯섦을 극복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평소보다 2~3배 걸리는 차량정체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고향을 찾는 것이죠. 물론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실질적으로 모이기는 힘든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설이 갖는 상징성이나 의미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비록 모든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이라도 함께 하며,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며, 이 낯선 코로나의 현실을 극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말씀도 고향을 찾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은 공생애 시작의 첫 활동으로 고향을 찾았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로서 그 사명의 출발을 고향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설날 고향을 찾아 새 힘을 얻고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예수님도 고향을 찾아 새 힘을 얻고 시작하려는 듯 고향을 찾았던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마주한 현실은 우리들의 설 풍경과는 달랐음을 오늘 복음서는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서는 예수께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던 대로 회당을 찾았다 증거합니다. 예수님도 여타의 유대인과 다르지 않게 안식일이면 회당을 찾아 예배하셨던 것이죠. 특별히 오늘 예수님은 회당에서 성경을 낭독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전통적인 유대교 예배는 랍비가 모세 오경 중 한 부분을 읽고 회중의 한 사람이 예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이런 전통에 입각해서 회중의 대표로 예언서 중 한 부분을 낭독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도 ‘드리거늘’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오늘 예수께서 회당에서 낭독한 말씀은 예수께서 특별히 선택한 말씀이 아니라 회당을 섬기는 자가 건넨 성경을 받아 단순 낭독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예수께 주어진 말씀은 이사야 61:1~2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세 본문 중 구약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목할 것은 그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이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70년간 바벨론 포로의 고난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아를 보내사 그를 통해 회복시키고, 역전시키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오늘 예수께서 읽으신 이사야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 읽은 구약의 본문이기도 한 이사야의 예언은 포로로 오랜 세월을 고통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위로와 치유, 회복의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것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종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고 바벨론의 통치를 받아들이라 권면하고, 다른 한편으론 이사야를 통해 다시 회복할 것이라는 약속을 선포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징계와 동시에 메시아를 통한 회복의 약속을 함께 주셨던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은 바로 그 회복의 약속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바벨론 포로의 징계가 그들의 불신앙에 시작된 한시적 징계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녀로 거듭나기만 하면 하나님은 메시아를 통해 그들의 인생을 180도 다른 인생으로 바꿀 것이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점령 당하고 포로가 된 것으로 주변 나라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무시 받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운명은 그렇게 끝나지 않고, 메시아를 통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고, 비웃던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실 것임을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분명히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요한 역사의 주인공이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아다 오늘 성경은 증거합니다.
오늘 안식일을 맞아 회당을 찾은 예수께서 바로 이 구원과 회복의 약속을 낭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곧 이사야가 장차 오실 메시아라고 언급했던 이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점을 드러낸 것이죠. 주목할 것은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첫 반응으로 ‘놀랐다’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해석과 선언에 놀란 것입니다. 이는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이들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다는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이미 몇몇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메시아라 일컫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 고향 회당에 오사 말씀을 낭독했는데, 그 말씀도 메시아에 대한 내용이고, 그 말씀에 대해 ‘그 이가 바로 나다’ 선언하시니 모두가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연이어 또 다른 반응을 전하는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하는 반문이었습니다. 오늘 이 질문에는 의구심이 진하게 담겨 있음을 봅니다. 지금 자신들 앞에서 메시아가 바로 나다 선언한 사람이 자신들의 이웃인, 목수 요셉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평범하다 못해 자신들보다 특별한 것 없고, 아니 자신들보다 못한 가정에서 태어난 예수가 메시아라는 소리에 의구심을 보인 것이죠. 정말 메시아였다면 자신들이 모를리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부터 보아 왔던 자신들의 눈에 예수는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반문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반응을 보신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예로 들어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 선언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그들의 불신앙과 불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지적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약시대 엘리야와 엘리사의 일화를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고향 사람들이 아닌 이방 사람들에게만 나타나고 행해진 이유가 결국 가까운 사람을 무시하는 그들의 불의와 불신앙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오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은혜도 결국은 받아들이는 자들의 믿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능력이 없어 그 동족들에게 능력을 행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신뢰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음으로 인해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곧 오늘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기적이나 이적을 행하지 않는 것도 결국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믿음 없고 불의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고, 계획에 없던 이방인들이 오히려 주인공이 되어 그들이 새로운 언약의 계승자로 설 수 있음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지적에 예수를 죽이려 마음 먹었던 이들조차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손대지 못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가셨다’ 증거합니다. 그들 앞에서 당당히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그들을 부끄럽게 만드신 후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약속의 성취와 은혜도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만 허락된다는 점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서신서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서신서의 말씀은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 치유사건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놀라운 기적 이후 사도들이 선포한 말씀을 빌미로 감옥에 가두었던 이들이 이튿날 불러 재판을 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 자리에 관리들과 장로들, 서기관들, 대제사장과 그 가족들까지 모두 모였음을 증거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이끌어가는 핵심 계층들이 모두 모였던 것입니다. 이는 사도들이 행한 일들과 선포하는 메시지에 대한 반응입니다. 예수만 죽이면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도들이 자신들의 예상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자칫 사도들의 행동을 방치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생각했기에 그들을 옥에 가두고, 재판정에 세웠던 것이죠.
그들은 사도들에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물었습니다. 곧 오늘 사도들을 옥에 가둔 이들의 관심이 병자의 치유나 회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세’, 권력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곧 오늘 사도들의 행동이 자신들에게 지금 위협이 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죠. 더더군다나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를 하고 있었기에 오늘의 질문을 통해 사도들이 자신들이 전하는 예수를 부인하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들였던 것이고, 하루의 시간을 통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든 후 재판을 열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하면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자신들 앞에 굴복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죠. 이는 과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경험했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칼과 창으로 위협할 때 제자들 모두 예수를 버리고 뿔뿔이 떠났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은 과거처럼 사도들을 겁박하면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버리고, 자신들 앞에 굴복할 것이라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위협 앞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오히려 그들이 예수를 죽였지만, 그 예수는 패배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계획 아래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며, 그 하나님의 계획 아래 부활하사 모든 이들을 구원하게 되었음을 증거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을 위협하는 재판정에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며, 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행한 것이라 증언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러자 오늘 우리가 읽은 서신서 바로 뒤이어 나오는 13절은 오히려 심문하던 이들이 놀랐다고 증거합니다. 보잘 것 없는 이들이라 무시했던 이들이 놀라운 능력과 권세로 말씀을 선포하니 놀라고, 거짓이라 여겼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니 놀랐던 것입니다.
가만히 오늘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복음서의 말씀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구약의 예언이 복음서를 통해 성취되고, 서신서를 통해 세계적으로 확장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며, 역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 나라로서, 거룩한 백성으로서 그 사명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맞이한 이스라엘의 현실은 거부요, 핍박이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의 대상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적, 지역적 한계를 넘어 예수를 믿고 주라 고백하는 모든 백성들로 확장하셨습니다. 구원과 회복의 대상이 이스라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모든 민족, 모든 나라로 확장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세 본문의 말씀은 왜 이스라엘이 그 독점적 지위를 놓치게 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우리 선교의 대상이 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이 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해외 선교주일입니다.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의 선교를 돌아보고, 우리들의 마음을 점검하게 만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는 해외선교가 단순히 살만해진 우리들의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세계 모든 민족에게 확장되었음을 전하고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외선교주일로 지키는 우리는 더 열심히 선교에 매진하고, 우리 신앙도 점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이사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은 택함 받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를 부인하고, 핍박하는 불신앙으로 일관하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약속의 백성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선택받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자들이라야 진정한 약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거듭난 제자들도 나라와 민족을 가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증거 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2000년대 큰 반향을 일으켰던 통신사의 광고 카피였습니다. 한 사람만 바라볼 것 같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떠나가며 남긴 말이죠. 마치 오늘 말씀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영원히 이스라엘 민족만 바라보고, 이스라엘 민족만 사랑할 것 같던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랑은 움직이는거야’ 말하고는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백성들로 방향을 바꾼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이단과 사이비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무늬만 교회, 무늬만 성도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백성은 이름뿐인 성도가 아닙니다. 그럴 듯 포장된 교회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며 주신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으로 스스로에게 채찍질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거룩한 약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위대한 구원의 주인공으로 주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오늘 세 본문을 통한 거룩한 경고에 귀 기울여 날마다 그 말씀에 비추어 내 삶을 바로 잡고 진실되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섬기는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