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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주현절(4-3) - " 하늘 역사의 주류가 된 사람들 "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21-01-31 (일) 22:09 3년전 1065  

본문) 마 11:2~15, 사 44:1-8, 행 5:27-42              

 

주현절 넷째 주일입니다. 최근 날씨는 마치 널뛰기하듯 합니다. 봄처럼 따뜻하다가, 한순간 냉랭한 겨울의 야무진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 바람에 대지 속의 생명체들은 시절에 대한 햇 갈림이 클 듯합니다. 밖으로 나가야할지 말지 말입니다. 그러기에 조심할 때입니다. 분별력을 상실하는 순간, 즉시 큰 상해를 입기 때문입니다. 

 

날씨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방콕’하면서 답답하게 짓눌린 느낌을 주체하지 못해, 처신과 행동을 함부로 하는 순간, 소중한 인생이 절단될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야당의 젊은 정치인이 성추행 사건으로 당대표 자리에서 퇴출당하는 일을 보면서, 때도 아닌데 낙엽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본 듯하여 안타까웠습니다. 겨울잠을 자야할 동물들이 잠을 설치고 나와 행세한다면, 어찌될지를 왜 그리 모를까요?

 

최근에 올해 102세를 사신 김형석 교수의 인생담이 국민들 속에 잔잔한 여운들을 줍니다. 그는 인생을 대략 3기로 분류했습니다. 30세까지는 인생의 시작과 준비단계입니다. 삶의 기초와 기반을 닦습니다. 60세까지는 일하고 건축하는 단계입니다. 젊은 시절로서 일하는 때란 말입니다. 그리고 90세까지는 그 동안 기반을 쌓아온 자신의 생의 결실을 거두어 드리는 시절입니다. 그 이후의 삶은 그 열매를 누리고 사는 때라는 것입니다. 공감됩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요즈음 주변에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90대 인생인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인생 백수 시대가 코앞에 온 듯합니다. 하지만 장수가 진정한 복(福)이려면, 나이만 가지고서 말할 수는 없겠지요-. 거기에 삶을 유지케 하는 건강과 재정상의 여유, 그리고 그가 살아 있을 이유와 필요성이 함께 갖추어 있을 때가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유대인은 특별히 인생의 창의성(創意性)을 추구하며 산 민족입니다. 그 바람에 그들은 수천 년 간을 지내면서, 인류사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그들은 삶의 창의성의원천으로 ‘티쿤 올람’(Tikkun Olam)을 말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네가 세상에 옴으로 인하여, 세상이 더 나은 곳으로 바뀌었느냐‘를 묻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우리 노래와는 달리, 나의 주체적 삶의 여부를 묻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의 현장은 인생을 주체적 삶을 사는 이들과 끌려다니며 사는 이들이 버무려진 곳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 둘의 차이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 둘의 힘의 역학에 의하여 좌지우지 해왔습니다. 그 차이와 갈림길은 숫자나 규모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흔드는 철학과 문화, 그리고 종교와 그 윤리(倫理)로 좌우되었습니다. 특히 그 영역의 핵심 인물이 누구냐가 가장 결정적(決定的)이었습니다.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신 까닭도 분명합니다. 그를 앞세워, 그 동안의 거짓된 주류 세력으로 행세해 온 어둠과 불의와 죽임의 세력을 추방하고, 그를 따르는 의와 사랑과 빛과 생명의 세력들을 역사의진정한 주류세력으로 교체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것도 시간과 공간을 넘고, 국경과 종족을 넘어서, 온 세계 누구나 어디에도 적용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를 확인할 말씀을, 우리는 이미 지난 주일에, 요일5:12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生命)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 바람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에게는 그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운명이 되셨습니다. 그를 떠난 우리란 존재는 이제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와 그의 말씀과 그의 성령의 역사하심이 이미 내 삶과 내안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의 낮은 수준에서, 하늘에 속한 시민권을 보유한 영원하고 신령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와 그의 놀라운 영향력에 힘입어, 세상에서 전혀 힘도 없던 우리가 지금은 제법 선한 영향력을 주변에 행사하는, 역사의 새로운 주류 세력이 되어 살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고, 우리를 부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세상 지식과 정보의 축적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일은 그 못지않게 앞서가야 합니다. 공식(公式)은 아니지만, 1:2정도비율을 유지하면 좋겠습니다. 명심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복이 되는 분입니다. 그의 크고 놀라운 세계를 맛보고 또 누리게 되면, 그만큼 우리 인간은 커지게 됩니다.

 

최근 교회에 관련한 가슴 아픈 일들이 계속되고 있어 유감입니다. 지난 주 만해도 대전의비인가 국제학교인 IM에서 127명의 확진자가 쏟아져 나온 이래,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까지 크게 확산하고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선교의 다양한 노력은 비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웃과 세상의 생명을 해치면서까지 대면을 강행하며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하려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이익중심 집단이지, 모두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는 예수 중심의 단체가 아닙니다. ‘더불어 살 줄 아는 인간’(Homo Symbious)들이 돼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코 역사의 주류세력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들은 우리가 역사와 세상의 진정한 주역으로 사느냐 못 사느냐의 갈림길이 예수와 그의 세계를 어떻게 수용하느냐 여부로 결정됨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세례요한의 한계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 차원을 수용해야 함을 말합니다. 예언서도 이스라엘의 왕이요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참된 지식과 믿음이 진정한 복과 은혜가 됨을 말합니다. 서신서는 예수로 실족한 백성이 아닌 예수로 충만하여 역사의 주류로 진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합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잘 가슴에 새겨서, 축복된 길로 나아갑시다.

 

복음서 / 세례 요한을 넘어 나사렛 예수에게로

헤롯의 잘못된 행위를 책망하다가 투옥당한 요한이, 뜻밖에도 예수께 자기 제자들을 보냅니다. 예수의 정체가 정말 궁금해서였습니다. 자기는 분명 나사렛 예수가 ‘오실 이’라고 판단했었는데, 그가 세상에서 행한 일들을 들으면, 왠지 다시 재(再)확인할 부분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기대했던 메시아는 단호한 심판자였는데(3:7-12), 나사렛 예수 그는 심판 대신에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질문도,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였습니다(2절).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메시아 사역이 펼쳐지는 모습을 알리는 것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고 요한에게 알려라’(4-5절). 

 

1) 그러면서, 이런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失足)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절).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맞추러 오신 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이들이 예수에게 맞추어야할 이로서 오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 맞서려는 자는 당연히 예수로 실족하게 됩니다. 요한이 바라던 심판은 바로 예수와 맞서려는 자에게나 주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를 영접하고 그의 말씀에 복종하면(예수에게 자기를 맞추어 살려는 사람은 누구나), 그는 용서와 구원을 받아 새 차원의 인생(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2) 무엇보다도 세례 요한은 ‘선(先)자비, 후(後)심판’이란 예수의 입장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세상이 메시아의 진정한 사랑과 돌봄을 먼저 맛보지도 못한 체, ‘죄인이다’는 이유로 무서운 정죄와 심판부터 가하는 것은, 사랑이신 메시야의 입장에는 어긋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이 지금 진정 고대(苦待)하는 메시아는, 죄인들을 향한 정죄와 저주의 주가 아니라 용서와 치유와 사랑의 주이시다는 점을 요한은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3) 그들이 그곳을 떠난 후, 예수님은 요한에 대하여 공개적인 평가를 하셨습니다(7절). 그것은 당신에 대한 의심을 보낸 자를 향한 평가답지 않게, 요한을 극찬(極讚)하셨습니다. 물론 요한의 한계도 명확히 지적하셨지만, 그의 가치와 사역에 대한 충성과 그 사역이 안겨 준 효과가 무엇인지도 일일이 말씀하였습니다(9절 하-14절 참조). 

 

4) 요한 사역의 결정적인 효과는 ‘그 때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주님의 평가 속에 있었습니다(12절). 이 말씀은 눅16:16 내용이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즉 요한의 회개운동 이후 천국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열려 졌고(마3:2), 그중에 이방인-세리-창녀 같은 천국 입국에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죄인들까지도 요한이 전한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들어가게 되었음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 그런 점에서 요한 뒤에 오신 예수님은, 그의 선발대원인 요한이 그토록 외쳤던 천국이 과연 어떤 곳이고 무엇인지를 친히 온 세상에 확인시켜 주셔야 했습니다. 이는 요한의 회개운동(물세례)이 결국 예수의 성령운동(하나님 나라운동)까지 견인(牽引)시켰던 기본 운동이었음을 새삼 확증한 것입니다. 

 

예언서 / 참 이스라엘 – 의혹자가 아닌 증인이어야 

본문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와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이신 당신이, 그들에게 진정 어떤 신(神)인지를 구체적으로 일깨워 전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이 일은 그만큼 당시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참 마음과 어떤 여호와인 지를 전하고 알리면서, 그들을 온전히 세우는 것이 시급하였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오랜 포로생활로 인하여 마치 고아나 버림당한 자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사40:27참조). 매사에 자신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신뢰도 밑바닥이었습니다. 목말랐고 매 마른 땅과 같았으며 잡초만 가득한 가슴이었습니다(3-4절 참조). 그런 모습은 미래에 기대되는 이스라엘을 생각하면,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그들이 어서 회복돼야만 했습니다. 매 마른 사막이 옥토(沃土)가 되는 대혁명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본문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전한 곳입니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친히 만들고 모태(母胎)에서부터 지으신 분으로서, 당연히 이스라엘에 도움이 되실 분이십니다(2절). 빈곤한 삶을 풍요롭게 하시며, 당신의 영(靈)과 복(福)을 그들의 자손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냇가의 버들처럼 이스라엘을 탁월하게하실 것입니다(3-4절). 

 

2)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여호와의 이스라엘 사랑을 보게 된 주변의 열방들과 이방 민족들이, 자기들도 여호와께 속(屬)한 백성이 되고 싶어 하게 된 일입니다. 여호와께서도 그런 자들에게 마음을 여셔서, 온 세상 만민의 주님이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베풀 은혜를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5절).  

 

3) 이스라엘의 왕이요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선포하셨습니다(6절,상)-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내가 영원한 백성(이스라엘)을 세운 이후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알린 자가 누구냐. 따라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너희가 나의 증인(證人)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6-8절 요약). 

 

☞ 하나님의 이 선포는 심약한 이스라엘에게 믿음을 안겨주었고, 그 성취의 때를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그 때가 바로 예수의 오심과 그의 성령의 강림으로 인한 교회 시대를 맞이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바로 교회 공동체가 온 세상의 신주류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서신서 /  예수로 실족한 이들 & 실족하지 아니한 이들

원시 예루살렘교회는 예수에 대한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다수의 무리들과 예수가 이미 자기 생명(生命)이 된 소수의 무리들이 강하게 충돌하는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즉 예수로 실족(失足)한 이들과 예수로 구원받은 이들의 강한 마찰이, 당시의 예루살렘과 원시교회 사이에서 발행한 것입니다. 

 

1) 당시의 공회(公會)는 예수의 이름이 온 예루살렘 도성에 가득해지자 초비상에 걸렸습니다.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라는 뉴스를 믿는 자들이 급증하자, 가해자였던 그들 종교인들은 큰 위기감을 갖게된 것입니다. 그래서 공권력을 동원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체포해 공회 앞에 세웠고, 금지한 예수 이름을 내세워 죽은 예수의 피 값을 자기들에게 돌리려 한다면서, 사도들을 강하게 힐문했습니다(27-28절)

 

2) 사도들은 담대히 맞섰습니다. 자기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죽임당한 예수를 살리시고 그를 높이사 모두의 임금과 구주로 삼으신 까닭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보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 용서를 받게 하시려는 데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29-32절). 사도들은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시려고 하셨으니, 그들도 이제는 저항하려 말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라며 강하게 권고했습니다. 

 

3) 그 곳 분위기가 상상됩니까? 만일 그 때 모두에게 존경받는 율법사인 가말리엘의 지혜로운 중재 역할이 없었더라면, 사도들은 목숨부지(扶持)를 못했을 것입니다(33-39절). 결과는, 사도들이 채찍질을 당하고, 예수 이름 언급을 금하라는 압력을 다시 받은 후에 석방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기뻐했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쉼 없이 전하고 가르쳤습니다(40-42절). 교회를 통한 역사의 새로운 주류 세력이 그렇게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결론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축복 받은 이들입니다. 비록 어떤 종류의 고난과 시련을 당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품격 있게 몸과 마음을 보전하고 유지할 수 있는 영적 지랫대(나침판)를 이미 보유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존재의 중심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과연 당신이 그 분입니까’라고 묻고 싶을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지체치 말고 물으십시오! 하지만 그 분의 응답이 나의 판단과 맞지 않더라도, 주님께 순복함으로 승리하십시오. 그러면 더 큰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결코 예수께 실족하지 말고, 그의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 분이 우리 앞 길, 아니 영원한 영광의 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부디 끝까지 주의 증인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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