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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주현절(4-2) - " 실족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 / 이훈삼 목사

관리자 2021-01-29 (금) 17:11 3년전 1214  

본문) 마 11:2~15, 사 44:1~8, 행 5:27~42


□ 주간 단상

요즘 우리 식구들은 배구 경기를 자주 본다. 겨울철 스포츠로는 농구도 있지만 배구를 더 즐겨보는 이유는 배구의 스파이크가 강렬하고 또 그것을 수비해낼 때 묘기에 가까운 장면도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승부를 판가름하는 시스템 때문이다.

농구나 여러 종목들은 게임 내내 점수가 이어진다. 그래서 경기에 한 순간도 마음 놓을 수 없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아마 진정한 스포츠 정신이고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온전한 자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조는 한번 점수 차이가 크게 벌어지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야구나 축구경기에서 점수 차가 많이 나면 주전을 빼고 후보들을 기용한다. 관중 입장에서는 참 맥 빠지는 현상이지만 구단 입장에서는 이번 경기는 포기하더라도 다음을 위해서 주전을 아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점수가 이어지는 종목은 경기 중간에 다시 시작할 계기가 없다. 우리들 인생이나 역사가 이러면 어쩌지? 한번 실패하거나 한번 넘어지면 다시 만회할 기회가 없다면 참으로 아쉬울 것이다.

반면에 배구는 세트마다 새롭게 시작한다. 1세트에 25:0으로 졌다 해도 2세트 가면 0:0에서 새롭게 출발한다. 과거의 부진을 그대로 묻어두고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매 세트마다 마련되어 있다. 우린 때로 실패할 수 있다. 게으르고 악에 빠져서 곁길로 갈 수도 있다. 과거의 실패가 내 삶에 그대로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닌다면 새로운 삶을 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참회하고 돌아오면 주님은 우리를 온전히 용서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배구가 훨씬 기독교적이다.

오늘 우리교회 어린이부와 청소년들이 한 과정을 마치고 진급한다. 초등학교에서 청소년으로 청소년에서 청년으로 단계가 올라간다. 사실 외적 변화는 별로 없지만 굳이 이렇게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매듭을 짓고 새로 시작하기 위함이다. 이제 1 세트 끝낸 것이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있다. 지금까지 좀 못했다면 새로운 세트가 주어진 것이니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잘 해온 사람은 꾸준하게 마음 다잡고 새 출발하면 된다. 배구에서 세트가 있다는 것이 은총이듯 인생에서 삶의 매듭이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오늘 한 단계씩 올라가는 주민교회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주님의 은혜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린다.

 

1. 걸려 넘어질 뻔한 세례 요한


1) 세례요한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신약의 첫 예언자다.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예비한 인물이요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인정하셨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모두 세례 요한을 신앙의 롤 모델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사실 다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그 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적을 여기에 두고 사는 사람, 존재의 목적을 여기에 두고 살아가는 교회는 그래서 고민이 많다. 메시아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어렵게 메시아를 알았다고 해도 그 길을 예비하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세례 요한도 추상같은 강렬한 이미지와 함께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고뇌하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2) 요한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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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판 후그스트라텐(1627-1678년), 감옥의 세례 요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동 시대를 살았는데 두 분이 활동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이고 요한은 그 선구자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한 것 같지는 않다. 복음서는 예수님 사후 40~60년 정도 지나서야 기록된 것이기에 역사를 뒤돌아보니까 요한은 바로 예수님의 선구자요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까지, 감옥에 갇혀서 이제 곧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까지도 고민이 깊었다. 누가 메시아일까, 예수라는 분이 정말 메시아가 맞을까. 이것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자 요한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에 메시아가 아닌데 그 길을 예비하는 것도 넌센스이고 실제 메시아가 오셨는데 자신이 몰라보고 길을 예비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허망한 일이었다. 그래서 죽음이 다가올수록 요한에게는 누가 메시아인지가 가장 첨예한 과제였다.


대충 그렸는데 할 말은 다하고 있다. 얼핏 봐서는 렘브란트 그림이라고 여길 정도로 비슷하다. 요즘과는 좀 다른 형식의 감옥에 요한이 갇혀 있다. 제자들이 그를 찾아와서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눈다. 헤롯 입장에서 보면 반체제 인사이기에 교도관은 문을 열어놓은 채 고개를 안으로 돌려 집중하면서 이들을 감시하고 있다.


이야기는 제자들이 하고 있다. 스승 요한을 따라 빈한하게 살고 있는 제자 하나는 지팡이를 의지한 채 옆에 서 있고, 한 제자는 눈에 힘을 주어 미간을 찌푸리고 손짓까지 써 가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제자의 보고를 듣는 요한의 표정이 꽤나 심각하다. 단숨에 결정을 내리기가 버거운 일인가 보다. 메시아를 찾는다는 것은 내 목숨을 걸 대상을 결정하는 것이니 그것이 어찌 간단하겠는가. 결국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내서 묻는다 ; 당신이 메시아이냐고! 사실 이 물음이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질문이다. 나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은 누구인가? 이 물음 앞에서는 지식, 재산, 권력 이런 것들은 모두가 하나의 검불에 불과한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인생과 역사란 메시아에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이다.


3) 걸림돌의 내용

그런데 오늘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셨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1:6)


예수님을 만나고 실족하지 않으면 행복하다? 여기서 실족한다는 것은 우리말로는 발을 헛디디다는 뜻이지만 성경 원어인 그리스어로 보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은 예수님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예수님 당시나 마태복음이 기록된 초대교회의 상황에서 예수님 만나고 행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 때문에 인생이 걸려 넘어지는 사람도 있었다는 뜻이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하기를 바라는데 오히려 시련이 찾아와서 어려움을 겪는 신앙인도 많았다는 뜻이다.


2. 고난 속에서 기뻐한 사람들


1) 베드로와 사도들의 고난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만남이 우리에게 황홀한 기쁨을 주지만 주님을 만나고 거룩한 사명을 받아 감당하려 할 때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주님의 길이 근본적으로는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5장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만 남은 상황에서 복음을 증거하던 제자들에게 닥친 고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날마다 열심히 전도하니까 유대교 제사장들이 제자들을 잡아다가 법정에 세우고 신문했다. 목숨이 걸린 살벌한 법정에서 제자들은 불안과 공포의 시간을 경험했다. 그러나 더 이상 전도하지 말라는 협박에 대해 제자들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행 5:29~32)


이에 격분한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죽이려하자 마침 유대교 원로 한 사람이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는 바람에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매 맞는 형벌을 받고 풀려났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얼마나 두렵고 떨리고 무서운 순간이었을까. 초대교회에서 예수 믿고 나타난 현상이 죽을 고비를 만나는 것이었다. 이것이 걸림돌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 말씀이 좋고 인격적 감화를 받아서 믿으려고 하다가도 제자들에게 닥치는 시련을 보고는 포기했겠는가. 이것이 실족하는 것이다. 주님이 바로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주님이 선언하신 것이다.


2) 중요한 것은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채찍을 맞은 제자들의 반응이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 5:40~41)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죽을 뻔 했다. 법정에 서서 죄인 취급을 받았다. 간신히 죽음을 면했지만 대놓고 채찍을 맞았다. 육체적 고통도 컸을 것이고 사회적 체면도 가문의 수치도 극에 달했을 것이다. 채찍을 맞자마자 얼굴 가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예수 이름을 입에 담지 않고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을 것이다. 단지 예수님 때문에 죽을 뻔하고 매 맞았으니 예수님이 이들의 인생에 엄청난 걸림돌이었다. 이런 고난 앞에서 사람은 당연히 걸려 넘어진다. 그러나 오늘 제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이들은 예수님 때문에 세게 걸려 넘어졌는데도 오히려 기뻐했다. 이것이 신앙인과 교회의 본 모습이다.


3. 기독교 신앙은


1) 복음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은 십자가 신앙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빠진 복음은 거짓이다. 십자가는 고통이요 치욕이라서 모두가 회피하려는 것인데 기독교 신앙은 이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구원에 이른다고 고백한다. 이 복음의 본질을 지켜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총으로 구원받은 존재임을 양보할 수는 없다. 이것이 걸림돌이다. 진정 주님의 십자가를 고백하는 신앙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애쓰게 된다. 누가 하라고 강요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 십자가를 지기는커녕, 예수님 때문에 채찍을 맞기는커녕 1주일에 한번 예배드리는 것도 버거워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서 열에 하나만 주님께 드리는 것도 얼마나 힘겨운지, 얼마나 큰 걸림돌인지 모른다. 우리 선배들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정도의 문제가 걸림돌이었는데 지금 우리는 쪼그만 돌멩이에도 걸려 넘어져서 못 일어난다.


2) 오늘 한국교회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교회가 주님의 십자가가 걸림돌이니 가차 없이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영광과 성공만을 지향하는 출세지향의 집단으로 변질되어 타락한 결과를 우리는 지금 똑똑하게 목도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오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우리 다음 세대에게 어떤 기독교를 전승해야 하는가. 이들도 끊임없이 영원한 걸림돌인 십자가를 벗어 내던지고 성공과 금관으로 치장한 신앙의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 때 지금 어른들의 신앙을 기억하면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내 자식과 다음 세대에게 떳떳하고 양심적이고 주님의 십자가에 걸려 넘어져 고난 받으면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정말 중요한 사명이다. 그리고 그 신앙이 진정 행복한 모습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십자가를 달게 지고 꿋꿋하게 걸어가는 길 끝에 영원한 생명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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