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2:1-11, 왕하 4:1-7, 요일 5:1-12
창조와 물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이 깊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창 1:2)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3절입니다. 이렇게 보면 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창세기는 물, 직역하면 ‘물의 얼굴’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의 숨이 다니시는 길처럼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을 통해서 창조의 역사를 계속해서 하십니다. 물을 나누어 궁창을 만들기도 하고(창 1:6~7), 물을 한 곳에 모으셔서 뭍이 드러나게 하시고(창 1:9), 물이 모이게 하시고(창 1:10), 물에게 명하셔서 생물이 번성하도록 하셨습니다(창 1:20). 바다의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모든 생명체는 바닷물에서 충만하게 번성하도록 복을 받았습니다(창 1:21-22).
창조 이전부터 있었고, 창조의 과정에서 피조 세계와 생명을 생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물은 이제 창세기 7장에 홍수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온갖 포악함으로 썩어가는 땅(창 6:11)에서 죄를 씻어내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노아의 배 속에 있는 것만 제외하고 땅의 모든 생물들이 죽게 됩니다. 대홍수 사건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물은 죽음으로 가는 심판이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물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와 물
물은 이처럼 양면을 가집니다. 물은 본래 축복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죽음과 새 창조의 뜻도 가집니다. 물의 이러한 의미는 히브리 백성의 역사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강은 본래 축복의 물줄기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네 갈래의 강이 흘러나와 온 땅을 풍요롭게 했습니다(창 2:10). 나일 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풍요로웠던 나일 강은 바로의 폭정과 교만으로 인해 노예들의 부르짖음과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출 3:7). 애굽이 겪은 열 개의 재앙 중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이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이었습니다(출 7:14-25).
히브리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한 후에, 애굽 왕의 폭력을 상징했던 그의 군대는 홍해라는 물에서 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상징하는 물을 가로지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 창조의 발걸음을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이후에도 히브리 백성은 계속해서 물 앞에서 그들의 믿음을 단련 받게 됩니다. 마라의 쓴 물 앞에서(출 15:22-27), 르비딤의 반석 앞에서(출 17:1-7) 시험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일 강을 치던 그 지팡이로 그 반석을 치라”(출 17:5-6)고 말씀하신 것은 물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물, 그리고 피
물은 신약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습니다. 무엇보다 물은 세례를 통해서 백성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물에 들어가면서 이전의 자신은 죽고, 물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물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깊이 인정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보여주신 표적도 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표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그 놀라운 상황의 전개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 26:28, 막 14:24, 22:20)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면서, 그리고 나중에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가 되면서 물이 가진 심판과 새 창조의 의미가 그대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세상의 죄를 심판하는 죽음의 피가 되었고, 동시에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생명의 피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왔다”(요 19:34)는 증언을 통해 이러한 의미를 간결하게 증언합니다. 오늘의 말씀인 요한일서는 물과 피에 대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 5:6 상)
물과 피, 그리고 성령
요한일서는 이제 성령에 대해 증언합니다. 성령은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온 천하를 밝히는 명명백백한 사실이니 진리라는 것입니다.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6 하) 헬라어에서 ‘증인’이라는 말 속에는 ‘순교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증언하되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참된 증언은 그 사실과 하나가 될 때, 그 진리와 하나가 될 때 가능합니다. 참된 증언과 진리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는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 셋은 합하여 하나니라”(요일 5:6-8)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증거하는 것은 예수님께 참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선 인류와 연약한 교회
우리는 온 세상을 향해서 성령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참 생명이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최근 이 세상 이곳저곳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는 지구 종말의 시계는 매년 앞당겨져서 지금은 100초 전이라고 합니다. 1947년, 첫 종말 시계 발표 대파국에 가장 인접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경고입니다. 핵전쟁의 위험과 기후 변화의 위험에 덧붙여서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의 위험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인류의 종말은 이제 시간 문제라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과연 인류는 그동안 멸종한 수많은 생물과 더불어 이 지구 마을에서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한 것일까요?
교회는 멸종을 앞둔 인류의 위기 앞에서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뭇 생명과 더불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에 대해서 물어야 합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뜻 앞에서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 봐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려는 그 섭리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언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믿음도 부족하고, 열정도 부족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거룩한 일을 감당하기에 우리는 한없이 약할 뿐입니다. 세상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권세자들과 기구들의 강력한 힘에 비하면 교회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고, 그들이 보기에도 그럴 것이라”(민 13:33)는 정탐꾼들의 탄식은 꼭 우리를 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확신한다는 점에서 세상 권세자들과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지만, 우리는 성령의 함께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세상 문을 닫고 하늘 문을 열라
엘리사를 따르던 제자 중 한 사람이 부인과 두 아들을 남겨놓고 죽었습니다. 병으로 죽었는지, 강도를 만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부인은 남편의 스승인 엘리사를 찾아가서 호소를 합니다. 자신에게 빚 준 사람이 두 아이를 데려가서 종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은데다가 두 아들마저 빼앗기면 이 부인은 이제 죽은 삶이나 다름없습니다.
엘리사는 처방책을 내놓습니다. “너의 집에 무엇이 있느냐”를 묻습니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해결책을 밖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실 때에도 떡이 없다고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주어라”(마 14:16, 눅 9:13), “너희에게 떡이 얼마나 있느냐”(마 15:34, 막 8:1)고 물으셨습니다.
제자의 부인은 엘리사에게 대답합니다. “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엘리사는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고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빌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두 아들과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름을 차게 부으라고 말합니다. “문을 열고”가 아니라 “문을 닫고”입니다.
이 말씀에서 “닫다”는 말이 매우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갖습니다. “닫다”는 뜻의 히브리어 “사가르”는 ‘폐쇄하다’는 뜻도 있지만 ‘포기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문을 포기한다’고 읽을 때에는 본문의 뜻이 더 깊어집니다. “문을 포기하라.” 이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목숨을 걸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포기한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이 부인에게 “세상 문을 포기하고 하늘 문을 의지하라”고 주문한 것입니다. 부인과 두 아들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인과 두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빈 그릇이 모두 채워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오늘 우리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는데 눈을 밖으로 돌립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 문을 닫지 못하고 하늘 문을 닫을 때가 많습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데,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방법을 택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 문을 닫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리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죽음의 시간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인류와 수많은 생명들은 죽음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위기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세웁니다. 십자가는 합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습니다. 뜨거운 사랑일 뿐입니다.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만이 모든 것을 위험과 위기를 녹여내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또다시 예수님의 피와 물과 성령 앞에 서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에게는 이미 우리와 한 몸이 되신 예수님의 물과 피가 있고, 성령께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우리 앞에 세상을 살려야 할 수많은 빈 그릇들이 놓여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강력히 명합니다. “너희에게 무엇이 있느냐.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되, 목숨을 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