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주현절(3-1) - " 진정한 기적 / 서재경 목사 > 주현절

본문 바로가기

주현절 HOME > 설교올리기 > 주현절

[첫째해] 주현절(3-1) - " 진정한 기적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1-01-22 (금) 12:21 3년전 1257  

본문) 요2장 1-11절, 왕하 4장 1-7절, 요일 5장 1-12절

 

작년 초에 시작된 코로나 상황이 해를 넘겨 계속 이어집니다. 끝 모를 터널 속에 갇힌 듯 모두 고통스러워하고 너무 답답해합니다. 한계에 내몰린 사람들이 더는 견딜 수 없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이럴 때 예수님께서 악한 귀신을 축출하신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를 말끔히 몰아내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탄식하듯 토로했습니다. 코로나가 꾸짖어서 내쫓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말 하루빨리 코로나를 몰아내고, 이 혼돈을 이겨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을 긍휼히 여겨 주셔서, 우리에게 그런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유대 사람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찾는다’(고전 1:22)고 말했지요. 여기서 기적이라고 번역한 ‘σημειον’이라는 그리스말은 ‘표징’이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이루시는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엄청난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깜짝 놀랄 만한 일이지요. 유대 사람들은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폭력 아래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에,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이었기에, 다만 ‘기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신음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표징’을 갈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대에, 진정한 기적을, ‘표징’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구약성서 열왕기 하의 말씀은 예언자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엘리사는 예언자의 代父라고 불리는 엘리야의 제자입니다. 엘리야가 열왕기 상을 이끄는 예언자라면, 엘리사는 열왕기 하를 이끄는 예언자라 할 수 있지요. 엘리야와 엘리사는 예언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언자의 ‘전형’ ‘모범’이 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예언자이며, 그들 자신이 ‘표징’이 된 사람입니다.

 

특히 엘리사는 ‘기적의 예언자’라 할 만큼 정말 많은 기적을 일으켰지요. 오늘 본문은 엘리사가 일으켰던 한 기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느 예언자 수련생(말 그대로는 ‘아들’)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의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곤경에 처했습니다. 졸지에 청상과부가 된 것도 서러운데, 빚 때문에 두 아들이 노예로 넘어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참담합니까. 그래서 그 과부는 엘리사에게 부르짖으며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엘리사는 집에 남아 있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식까지 빼앗길 형편인데 남은 게 뭐 있겠습니까? 기름 한 병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지요. 엘리사는 그녀에게 이웃집에서 빈 그릇을 있는 대로 빌려오라고 합니다. 그것도 되도록 많이, 할 수 있는 대로 모두 가져오라고 했지요. 뭘 하려는 걸까요? 그 빈 병이라도 모아서 고물상에 넘기라는 걸까요? 빈 병에 묻은 찌꺼기라도 짜내려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녀의 남은 기름 한 병을 그 빈 그릇들에 부으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두 아들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서 빈 그릇마다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참으로 놀랍게도 그 모든 빈 그릇들을 다 채우도록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빈 그릇들을 다 채우자 기름이 그쳤지요. 엘리사는 그것을 팔아 빚을 갚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쓰라고 했습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이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이 기적이 그저 기름 한 병이 백 병이 되는, 백배 천배의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신통방통한 능력을 보여주는 걸까요? 아니면 빈 그릇을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는, 기적은 준비한 만큼 이루어진다는 훈계일까요? 아니지요. 이 이야기가 그저 놀랍고 신통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의 ‘표징’이라면, 우리는 이 ‘표징’이 보여주는 그 ‘의미’를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먼저 살펴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는 그의 스승 ‘엘리야의 기적 이야기’와 데자뷔처럼 겹쳐 보인다는 것입니다. 열왕기 상에서 엘리야도 사르밧 과부의 기름병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왕상 17장) 공교롭게 둘 다 과부이고, 두 과부의 딱한 사정도 비슷하지요. 기름병이 채워지는 것도 같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표징이 일어났고, 예언자 수련생 과부의 빈 그릇마다 기름이 가득 채워지는 기적/표징이 일어났지요.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마지막 빵을 구워 먹고 죽으려던 사르밧 과부의 문제도 해결되었고, 자식을 잃을 뻔했던 생과부도 곤경에서 벗어났습니다. 기적으로 모든 문제가, 만사가 형통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가 말하려는 것이 그것뿐일까요? 아니지요. 사실 성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예언자가 일으키는 ‘기적’만이 아니라, 기적/표징을 일으키는 ‘예언자’ 자신입니다. 열왕기서는 우리에게 ‘예언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예언자의 전형’이지요. 우리는 예언자가 일으키는 ‘기적’만 주목할 게 아니라, 먼저 그 ‘예언자 자신’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는 어떤 예언자일까요? 엘리사는 이스라엘이 쇠락해가는 때의 예언자입니다. 모압과의 전쟁, 뒤이어 시리아와의 전쟁으로 고통스럽고 혼란한 때지요. 이스라엘은 결국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침공으로 패망하게 됩니다. 시리아 전쟁 시의 참상을 보면, 두 여인(이들도 과부일 것입니다)이 살기 위해 서로 자식을 삶아 먹는 끔찍한 얘기가 나옵니다.(왕하 6장) 참으로 암담하고 깜깜한 고통의 때지요. 이렇게 참담한 시기에 예언자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엘리사는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아들마저 노예로 팔려가게 된, 마지막 기름 한 병밖에 아무것도 없는 과부의 집으로 갔습니다. 예언자는 그렇게 기적이 가장 절실한, 고통당하는 장소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갔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이, 특히 사이비 종교일수록, 엘리사가 일으킨 기적을 주목하고 그 기적을 마치 자신의 능력인 양 침 튀기며 선전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얼마나 큰 능력과 기적을 보여주었습니까?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의 엄청난 선물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엘리사는 또 얼마나 멋집니까? 그러나 엘리사는 자기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기적을 선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기적은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고난의 때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로 가서, 고단한 빵을 먹고 고단한 잠을 잤습니다. 무엇보다 예언자가 일으킨 기적은, 하늘로부터 산해진미가 내려오게 하는 신기루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것을 함께 나누고, 빈 그릇을 함께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언자의 기적은 인간의 탐욕을 대박 성취하는 게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요한복음은 ‘기적’(δυναμιs)이라는 말보다는 ‘표징’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가나 혼인 잔치의 ‘표징’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첫 번째 표징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표징이라는 것은 표징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표징의 전형/모범이라는 뜻이지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맨 먼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 가십니다. 그런데 그만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고 말았지요. 혼인 잔치는 일생에 가장 중요하고 큰 잔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왜 포도주가 떨어졌을까요? 어리석은 질문이지요. 포도주를 적게 준비했으니까 떨어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포도주를 모자라게 준비한 것일까요? 저처럼 준비성이 철저하지 못해서일까요? 확인할 길은 없지만, 미루어 짐작해 보면, 가난한 집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쨌거나 예수님이 처음 찾아가신 집은 갈릴리의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이었습니다. 포도주가 24시간 상시 대기 중인 예루살렘의 성전도 아니고, 포도주가 넘쳐흐르는 헤롯의 연회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돌로 만든 물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는 텅 빈 뒤주와 빈 병이 있었고, 예언자 수련생 과부의 집에는 빈 그릇들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정결례에 쓰는 빈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일꾼들은 그 빈 항아리들을 물로 가득 채웠고, 잔치 맡은 사람에게 그 물을 떠다가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물은 맛깔나는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잔치 맡은 이가 신랑에게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구려!’ 하고 말했다지요?

 

무슨 얘기일까요? 예수님이 만든 포도주가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는, 한 병에 수억 한다는 ‘샤토 슈발 블랑 1947’보다 더 맛있다는 얘기일까요? 아니지요. 가나의 혼인 잔칫집 기적은 ‘표징’입니다. 그 사건 자체보다 그 의미가 중요합니다. 이 기적은, 이 표징은, 포도주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예배와 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말하는 것이지요. 물이 아니라 맹물 같은 우리의 삶이 변해야 하고, 맹탕 같은 우리의 신앙과 예배가 바뀌어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런 맛도 향기도 없는 맹물이 맛깔나고 향기로운 포도주가 된 ‘기적’은, 아무런 기쁨도 감사함도 없는 예배와 종교가 다시 기쁨이 넘치고 감사 찬미로 충만한 예배와 종교로 회복되는 ‘표징’입니다. 그저 맹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에 머문다면, 그것은 진정한 기적이 아니라 마술이요 사기술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기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도 ‘진정한 기적’이었지요. 진정한 기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앞에서,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한 말을 실마리로 이야기를 시작했지요.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는다.’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뒤이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지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한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기적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고, 다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기적이요, 우리의 지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무엇입니까? 거기서는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 어떤 꼼수도 보이지 않고, 그 무슨 기적도 보이지 않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기적입니다. 그렇지요. 사실 예수님의 존재 그 자체가 기적이요, 예수님의 삶 그 자체가 바로 기적 아닙니까?

 

오늘 교회력 성서 본문으로 받은 요한일서에서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요일 5:1)고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라는 말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딸이요 아들이라는,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11절)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우리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이루신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답고 놀라운 기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크고 놀라운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보다 더 신비롭고 황홀한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에게 마지막 기름 한 병밖에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빈 그릇을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맹물밖에 없을지라도,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면, 우리는 더없이 맛깔나고 향기로운 포도주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진정한 기적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