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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주현절(6-2) - "안식일과 함께 새 시대의 도래를! " / 김주한 목사

관리자 2018-02-09 (금) 10:30 6년전 3222  

본문) 막 2:23-3:6, 창 2:1-3, 롬 14:1-12  / 신학교육주일

 

 

오늘도 생명의 복음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이나 분쟁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들이 무참하게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언론에 보도된 것만 봐도 무고한 사람들이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올 겨울 화재 참사로 제천과 밀양, 서울 등지에서 고귀한 생명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참변을 당해도 안타까운 마음은 그 때 뿐 시간이 지나면 금방 망각해 버립니다.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동네에서 사람이 죽으면 동네 전체가 추모 분위기였습니다. 또한 망자에 대한 추억들을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하고 동변상련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대가 변해서인지 몰라도 생명경시 풍조가 너무나 만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은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서 곳곳에서 일관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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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서 말씀은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우선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마가복음 본문은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을 보도합니다. 선택된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데, 하나는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준 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이 모두 공교롭게도 안식일에 일어났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매우 엄격하게 준수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유래는 창조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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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택한 구약성경 본문 창세기 2장 1-3절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 째날 안식하셨다고 보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은 계약법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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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창조이야기와 출애굽기가 전한 안식일과 관련된 규정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입니까? 저는 종종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일하고 나서 쉬는가, 쉬고 나서 일하는가?’ 보통 우리는 열심히 땀 흘리고 노동한 후 휴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창조이야기는 사람을 제일 나중 여섯째 날 창조하시고 난 후 하나님은 안식하셨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창조되고 난 후 맞이한 첫 번째 날은 바로 안식입니다. 사람이 창조되어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안식, 휴식, 쉼입니다. 하나님은 쉼, 안식하심으로써 창조사역을 완성하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여겼다면 첫째 날 창조하시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도와 창조사역의 조력자로 부렸을 수도 있습니다. 창조이야기는 인간과 동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서 ‘쉼과 안식’이 생명의 본질에 속하는 권리라는 점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제 칠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간의 첫날을 안식일, 즉 주일로 정해 지켰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선물로 받은 생명체가 노동한 후 휴식과 함께 한 주간을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쉼, 안식과 함께 한 주간을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이란 여섯 날 동안 노동한 이후 보너스로 주어지는 쉼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제일 먼저 누려야 하는 생명의 권리요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안식일 법 또한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또 하나의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약자나 강자, 동물이나 식물 등 모든 피조물에게 고유하게 부여되어 있는 천상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한 계명입니다. 말하자면 안식일 법은 쉼 없이 노동해야만 하는 약자와 동식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약자 보호법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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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성경의 논법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막 2:27)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정통 유대인들이 내세운 안식일 법은 어떻습니까? 구약성경의 해설서요 당대 유대인들에게 삶의 교본으로 간주되었던 ‘미쉬나’에는 ‘안식일 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제정된 하위 규정들이 물경 600여 개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에는 이천 보 이상 걸어서는 안 된다. 두 글자 이상 쓰거나 글자를 고쳐 쓰기 위해 지워서도 안 된다. 물건을 옮기거나 운반해도 안 된다. 한 컵의 술, 행상용 바구니, 곡물을 옮겨서도 안 된다. 또한 병을 고쳐서도 안 된다는 규정에는 어린아이의 병도 고쳐서도 안 되며, 부러진 팔다리를 펴는 것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이럴 진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으니 정통 유대인들이 격분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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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는가 입니다. 적어도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다음 날 먹을 양식의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직업상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어부나 목동, 소작농들, 병자들, 노예나 하인들이 과연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의 정죄 받았습니다. 안병무 선생은 안식일 규정이 치명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둘로 갈라놓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체제 안의 사람과 체제 밖의 사람, 체제 안의 사람은 율법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 참 이스라엘, 의인으로 인정받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죄인으로 낙인찍혀 체제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이렇게 체제로부터 밀려나 소외된 계층이 ‘암하레츠’ 바로 ‘민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안병무 선생은 오늘 마가복음의 본문을 ‘정통 유대교 율법체제와 충돌’로 해석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이 주인이다’고 선포하심으로써 족쇄와도 같았던 율법주의체제를 파기하고 민중들의 천부적인 권리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법의 근본 가치와 정신이 실종되면 소위 ‘법치주의’만 남게 됩니다. ‘법치주의’하면 ‘양심과 법률에 따라’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현실 사회에서 ‘법치주의’는 ‘법’(法)보다는 ‘치’(治)가 우선하여 법의 이름으로 사람의 인권을 억압하고 생명을 무참하게 짓밟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사회에서 툭하면 좌파, 빨갱이, 종북 등의 용어들이 여전히 만연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악용될 때 얼마나 참혹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는가는 최근에 개봉한 ‘1987’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유난히 법치주의를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실감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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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비난했습니다. 이 본문은 밀 이삭을 잘라 먹을 만큼 배고픈 제자들의 현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 나는 제자들의 굶주린 상황을 예의 주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참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먹어야 산다는’ 생명의 기본권을 우선시하십니다. 법은 지키라고 있습니다. 또 법은 지켜질 때만이 그 가치와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사람 나고 법이 생겼지 그 반대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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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앞세우다보면 교인들끼리 분쟁이 생기기도 합니다. 법이 믿음의 유무, 믿음의 분량을 측정하는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바울의 로마서 본문(14:1-12)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본문은 로마교회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일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로마교회 안에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관습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안식일 법이나 정결법 등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한편으로 이러한 문제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 생활하는 신도들도 있었습니다. 후자의 교인들 중에는 시장에서 유통되던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사서 먹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한 교인들은 그들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러자 자유롭게 신앙 생활하는 교인들은 자신들을 비난한 교인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바울은 서로를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바울은 우리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고 말합니다. 바울은 앞으로 다가올 심판을 생각하며 궁극적으로 현재 지금 이곳에서의 각자 자신의 삶을 성찰할 것을 주문합니다.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덕’(德)보다는 ‘법’(法)이 지배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면 ‘덕스럽게 마무리되었다’는 말보다는 ‘법대로’ 고소 고발했다는 소리가 더 많이 들립니다. 교회법으로 안 되면 사회 법정까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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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가복음 본문의 두 사건에서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란 결코 종교적인 표상이나 정신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현실화되는 나라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임재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매우 정치적인 현실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는 예수님의 선포는 기존의 낡은 세계와 결별하고 새로운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고지’(告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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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선택한 세 본문 모두 어떠한 법도 생명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 생명의 천부적인 권리를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현실은 생명보다 법이 우선시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생명의 존엄성을 일관성 있게 강조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시켜 받아들여야 합니까? 교회, 성경,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우리 안에 고정관념은 없습니까? 어떤 분이 고정관념이란 ‘고장난 생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저는 참 잘 풀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고장난 생각’을 진리처럼 여기며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만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며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틀렸다고 고집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고장난 생각’으로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판단하고 정죄하고 교회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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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문제가 생겨 분란이 일어나는 원인을 보면 모두 ‘고장난 생각’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눈금도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는 엉터리 잣대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판단하며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할 때 그 공동체는 분란과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나의 신앙생활, 생각 속에 나를 옭아매는 그 ‘고장난 생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성찰해 보십시다. 요즘 공감(共感)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와 로마서 서신에서 보여준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의 태도는 모두 ‘공감’의 챔피온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사회지배 체제에서 예수님은 약자와 병자의 생명의 권리를 회복시킴으로써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뒤바꾸십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아니 나와 연관되어 있는 주변의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행여 무의식적으로 행한 말과 행동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믿음을 통해 행복을 누리고 있다면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내 이웃 형제, 자매 모두 나와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안식일 법보다도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귀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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