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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주현절(4-3) - " 여호와의 사랑을 확실히 받을 자들 "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24-01-27 (토) 17:53 10개월전 541  

본문)  마 11:2~15, 사 44:1-8, 행 5:27-42


오늘 세 본문 말씀의 핵심 주제는 <여호와로부터 사랑을 확실히 받게 될 자>이다. 이 주제로 세 본문을 보게 되니, 복음서는 우리 교회와 목회가 어디에다 마음을 두고 지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사야서는 남북한의 긴장 속에서 어떻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지를 찾아보게 한다. 서신서는 권력을 가진 거짓 세력과 맞설 교회의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제시된 내용을 쫓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

 

1) 복음서에서는 자기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여 거기에다 자신의 의지와 삶을 맞추고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임을 밝혀준다. 


사실 요한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행위들을 접하면서, 은근히 예수께 의혹과 갈등을 품게 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솔직하게 질문하였다(2-3절). 


그러면 왜 갈등하였는가? 맡았던 역할의 차이 때문이었다. 요한이 바라던 메시아는 세상의 죄악과 거짓과 불의를 책망하고 심판하는 유형(類型)의 메시아였다. 그러기에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자형(牧者型)보다는 책망하는 선지자형(先知者型)에 집중해 왔다. 그가 외친 하나님의 말씀도 항상 날카롭고 예리하면서 불의와 죄악에는 단호했다. 그 대상이 왕(王)일지라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 당시의 왕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자기 부인으로 삼은 불의를 행하자, 요한은 여지없이 그를 ‘옳지 않다’고 책망했다(마14:3-4참조). 


그런데 예수께서 보여 주신 메시아의 모습은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자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하여지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모습이었다(5절). 한없이 곤고한 인생들에게 고통의 눈물을 씻겨주시고, 망가진 삶은 회복되는 환희(歡喜)를 안겨주는 놀라운 일들을 계속하셨다. 


2) 예수님과 요한은 이토록 큰 차이가 났다. 요한의 메시아는 악인에게 야단치고 혼내고 심판하며, 세상을 선악으로 구별 짓는 메시아이어야 했는데, 정작 메시아 예수는 무너진 삶을 살고 있던 모든 이들이 먼저 고침 받고 회복되어, 새로운 기쁨과 감사의 삶을 누리며 살게 하는 일이 우선할 일이었다. 힘겹게 사는 자들을 죄와 저주의 결과라고 몰아치는 일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게 보셨다. 그런 인간답게 살아볼 기회마저 없이 살던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못 살았냐‘고 죄를 묻는 일 자체도 불합리하다고 보셨다. 최종 심판은 그런 회복을 해 본 후에, 내려도 된다고 보신 것이다. 이 일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慈悲)가, 심판과 형벌보다 우선하는 순간이 열렸음을 확인해 준 일이다. 예수로 복음의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한다. 


3) 이때 주님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이는 세례 요한도 이제는 그동안 수행해 온 선지자와 율법적 사역을 마감하고, 예수에게서 새롭게 시작된 복음과 사랑의 물결을 수용해야 할 것임을 분명히 일깨워 주신 것이다(6절). 요한의 예언과 율법 사역이 예수의 복음 운동의 시작과 함께 일단락되었음을 밝혀준 말씀이다. 


4) 대신 예수님은 요한의 사신(使臣)이 떠나간 직후, 그에 대한 평가를 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使者)로서, 당신이 오실 길을 준비하던 사자였다(10절). 실제로 그는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옛 선지자인 엘리야와 같은 큰 존재였다(14절, 말3:1 참조). 그러면서 예수님은 요한이란 존재의 무게에 대한 평가도 이렇게 하셨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11절). 이는 실로 대단한 평가이다. 하나님은 그가 보내신 종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셨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평가이다.


5) 아울러 주님은 그의 활동을 통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지평(地平)도 크게 열렸음도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이 그것을 차지한다‘(-표준새번역.12절). 이는 무슨 말씀인가? 본래 요한의 선포의 주제는 ’회개와 임박한 천국‘이었다(마3:3참조). 그 바람에 그의 회개를 통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전국에 파장을 일으켰고,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물세례 받으면서 새 삶을 시작했으며, 그로 인하여 열리기 시작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의 제자도 많아졌다(2절, 요1:35 참조). 제자 중의 하나인 안드레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도 했다(1:40참조). 이런 일은 그 뒤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천국의 실제를 보여 주시며 사역하기에 매우 큰 도움이 됐다. 


2. 구약 / 사 44:1-8 / “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 내가 택한 여수론아 두려워하지 말라. --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


1)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는 음성 자체가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완전히 새롭다.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신 까닭이다. 그것도 그들을 하나 된 소중한 이름인 ’여수론‘으로도 부르셨다(1-2절, 신32:15, 33:5 참조).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자인 여호와‘이심을 밝히시면서, 아직도 위축되어 사는 그들에게 마치 오랜 세월 잃어버렸던 자식을 되찾은 어버이의 음성으로, 그들을 격려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이 예전과는 다르게, 부드럽게 부르시며 애정을 쏟아부어 주시는 이들은 과연 누군가? 솔로몬 왕 이후에 수백 년만이 뜻밖의 기적적인 선물로 맞이하는, 드디어 하나의 동족(同族)이 되어서, 새롭게 출발하게 될 유대 백성이다! 그들이 바로 ’여수론‘이었다! 


그들은 솔로몬 왕 이후에 12지파가 남북으로 갈라져서, 무려 수백 년간 서로 다른 왕조를 이루고, 성격도 다른 종교와 우상들을 섬기며, 정치적으로는 주변의 강대국들인 애굽, 앗수르, 시리아, 바벨론 등과의 군사협정을 맺으면서, 자기 동족과는 대립하고 싸우며 지내왔던 슬픈 백성들이었다. 이는 지금 분단으로 인해 탄식하는 우리 남북한의 처지와도 너무도 흡사하다. 서로에게는 으르릉대고, 남한은 이웃 강대국들인 미국과 일본에 매달리며,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에 매달리면서, 힘을 과시하려 하고 서로 싸우려고 하는 행태와도 너무 흡사하다. 


문제는 이런 못난이들의 행태를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 것이냐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여호와는 자기 동족이요 혈족과의 전쟁이나 다툼은 아주 엄격히 금하신 분이시다(신2:4-9, 19절 참조).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특명하신 내용이 바로 동족과의 싸움 금지였다. 세일에 거주하는 동족 에서의 자손과, 암몬 땅에 거주하는 롯 자손과는 결코 싸우면 안 된다는 엄명이었다. 아울러 주변의 강대국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명령도 주셨다. 


초기의 모세는 이 명령을 준수하여, 약속의 가나안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기의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결국 두 왕국 모두가 그 강대국들에게 망하고 그들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그 포로기의 시련과 슬픔의 시기도 무려 70여 년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런 못난 그들을 끝내 포기하지 아니한 이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조상들과의 오랜 약속을 기억하신 여호와는 후손에게 기회를 주시고자 하셨다. 게다가 오랜 좌절과 절망의 시기를 통하여, 자신들의 조상들의 죄악과 자신들의 부족함을 성찰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은혜를 갈망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면서, 여호와는 그들에게 새 사람, 새 역사의 회복의 기회를 열어주고자 결심하신 것이다. 그 회복의 모습은 예전의 둘(남과 북/야곱과 이스라엘)이 아니라, 12가 1로 된 통합된 민족 이스라엘이었다. 그런 기회는 바벨론이 무너지고, 고레스가 창건한 페르시아 제국의 출범과 함께 부여하고자 하셨다. 그러기에 그들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귀환하게 될 때의 모습은, 이미 하나로 통합된 유대 민족이었다. 갈라진 체가 아니었다. 그게 주께서 사랑스럽게 부르신 이름인 ’여수룬‘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잠시 생각해 본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과연 누굴 사랑하실까? 어떻게 하든 우리나라가 동족이 하나 되도록 힘쓰고 애쓰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미국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러시아든-, 강대국의 옷자락에 매달려 ’도와달라 살려달라‘며 매달리는 사람들일까? ’동족이 싸우면 안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교류를 통하여 한 민족과 한 나라를 이루려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이념과 힘 자랑을 내세워 서로 미워하고 상대를 제압하려고 하는 자들일까? 생각하자. 하나님 은혜 없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을까?


지금 세계는 한반도 전쟁 발발에 대하여 크게 우려한다. 상황으로 보아서는 언제 전쟁이 터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우리 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마6:33)는 말씀이 지금처럼, 절박하게 요구되는 때는 없다. 정말 이 땅의 평화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이다. 김정은의 핵전쟁 놀이만 막아달라고 기도하면 부족하다. 전쟁을 부추기는 우리 대통령과 군부 세력들의 무책임한 망언(妄言)들도 막아달라고 함께 기도해야 한다. 


3. 서신서 / 행 5:27-42 / “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


본문은 앞에서 소개된 세례 요한이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시를 받아서 일하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을 얼마나 받으면서 복음을 위해 일하였는지를 상세하게 소개한 내용이다(29-32절 참조). 


1) 이들은 지금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다가 체포되어, 공회 앞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는 중이다. 그들의 죄명은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가르치지 말라’는 유대교 당국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온 예루살렘에 퍼지게 한 일 때문이었다. 그러면 유대교 당국자들은 왜 예수 이름이 퍼지는 것을 그토록 저지하려고 했는가? 그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그들이, 최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급증하고 있는 예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피의 보복을 당하지나 않을까를 크게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27-28절). 


2) 사실 당시의 예루살렘은 성령의 강한 역사와 베드로의 강력한 설교로 제2의 회개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자기의 구주(救主)로 고백하며 돌아온 이들이 3,000명이나 되고, 그들 중심의 에클레시아(교회) 운동까지 폭풍처럼 일어나고 있었다(행2장). 게다가 얼마 전엔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서 앉은뱅이였던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는 일까지 발생하면서, 예수란 이름의 물결이 온 성을 뒤흔들게 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3장). 그 바람에 사도들의 말씀을 듣는 남자들만 5,000명이나 되었다(4:4). 


3) 그 바람에 초긴장 상태의 위기를 느낀 자들이 생겼는데, 그게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유대교 지도자들인 제사장들, 사두게인들, 관리들, 장로들이었다(4장). 그런 상황이 형성되자, 자연히 기존의 세력인 유대교와 신진 세력인 예수 무리 사이에서 강한 충돌이 발생하였다. 먼저는 관권을 가진 그들이 사도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4;18). 하지만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는 물러나지 않았다 -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4:19-20)라며 응수했다. 그들은 이미 악령과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요즈음의 용산의 행악자들과 싸우는 최재영 목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4) 그리고 자신들의 증언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저항하였다. 무슨 정당성이었나? 자기들이 지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까닭은, 조상의 하나님께서 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사죄를 견인하고자, 그를 세상 만민의 임금과 구주(救主)로 삼으셨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이를 확인하였고, 주의 성령까지도 그 일에 증인이 되어 확증해 주셨기 때문이었다(29-32절). 


5) 그러기에 그들의 시선(視線)은 이미 다시 살아나신 예수와 그가 열어주신 새로운 구원의 세상을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서, 그들도 예수의 백성이 되고 예수가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게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온통 집중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를 죽였던 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이번 기회에 그들을 보복하려던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죽임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로서, 보복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그럴 시간도 없었다. 


6) 그럼에도 가해자인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와 그 제자들의 증언과 행위들이 활발할수록 극심한 두려움에 빠졌다. 만일 그들의 증언이 계속 퍼지도록 방임한다면, 자기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지금까지의 행위들로 어쩔 수 없이 심판대에 오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위협을 느낀 것이다. 따라서 그들 유대교의 전 지도자들은 긴급히 공회로 모여 공론한 후(행4:5-6참조) 사도들을 체포하고 채찍질하기까지 한 모습은, 그들이 그때의 상황을 얼마나 비상시국(非常時局)으로 보았는지를 충분히 엿보게 한다. 결국 사도들도 죽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모아진 시점이었다. 


3) 그런데 이때의 긴박한 상황을 은혜와 축복의 상황으로 전화위복(轉禍爲福)되게 한 이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 유력한 율법 교사요 모든 백성에게까지도 존경받고 있던 바리새인 가말리엘을 앞세워서, ‘자신들의 이런 거친 대응이 혹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항하는 일인지 성찰해야 한다’라는 매우 지혜로운 대처를 주문함으로써, 그들의 흥분을 잠재우게 되고, 더는 그들의 일을 상관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되게 하였기 때문이다(33-39절 참조). 


4) 이 일의 결과는 컸다. 위기 극복한 일만이 아니다. 석방된 이들이 자신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게 됨을 기뻐하면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힘을 내어 성전에서든 집에서든,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에 매진하면서, 초대교회를 더욱 견고히 올려세우는 놀라운 은혜까지도 누리게 했기 때문이다(41-42절). 


o 우리의 믿음에는 신실성과 진정성과 투쟁성이 있어야 한다. 형식이나 관습적인 겉치레의 신앙은 안 된다. 하나님을 향한 내 지식이나 이해가 미흡한 것은 괜찮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의 공경과 사랑은 분명해야 한다. 내 믿음의 행보에 실수나 착오도 괜찮다. 수준이 낮아도 괜찮다. 그분의 은혜로 더욱 성숙해지고 더욱 온전해지길 간절히 바라는 갈망은 있어야 한다. 내가 여호와의 확실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고픈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그게 간절하면 할수록 주님은 결코 나를 외면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니 믿음의 힘을 키우고 수준도 높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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