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막 3:20~35, 암 9:7~15, 롬 8:12~17
오늘은 주현절 다섯째주일입니다. 그리고 총회가 정한 해외선교주일로 지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세 본문 말씀은, 자칫 자기 중심적으로 치우치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신앙까지를 돌아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우리의 삶에서 되뇌이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신앙이 보다 깊고 넓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교회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세상에 보여주는 공동체라는 것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을 봅시다.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제자들과 함께,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치유하는 일을 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안타까워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치유하시고 회복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을 만큼 이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을 비롯해서 유대교 지도자였던 니고데모, 그리고 사마리마 여인을 포함한 백부장의 요청까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장소 불문하고 누구든, 어디든 찾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상반되는 그룹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입니다. 즉, 유대교 서기관의 전체 의견을 대변하는 중앙에서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예의주시하던 그들의 결론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병자 치유와 축사는 귀신 들려서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왜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요?
잠시 유대교의 역사를 바탕으로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유대교의 정통 신앙은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이후에 바벨론 포로생활과 귀환, 그리고 이어지는 페르시아, 헬라(그리스), 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 매우 절망적인 상황을 거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알렉산더의 헬라화 정책의 위기를 맞아 안식일법과 정결례법, 할례등의 교리들이 정통 신앙으로 굳어졌습니다.
물론 이러한 교리들은 만들어질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지탱해주는 위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안타까운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교리들의 장점들은 점점 화석화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을 죽이는 법이 되었습니다.
화석화된 교리의 형식을 걷어내고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급기야 자신들의 기대와 바람과는 다르다고 판단하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라고 서기관들이 공식적인 결론을 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을 살릴 것이라고 믿고 굳게 지켜 온 정통주의 신앙이, 어느새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눈가리개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자신이 머물던 우물이 너무 크다고 믿고 생각한 결과, 더 큰 강과 바다가 있다는 주장을 거짓으로, 더 나아가서는 미친 것으로 치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에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향해서 성령 모독죄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씌어서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께 귀신들렸다고 생각했는지는 이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통주의 때문입니다.
정통 신앙은 문제될 것이 없지만 정통 신앙을 문자 그대로 고수하려는 정통주의는 신앙의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정통주의에 빠지면 그것만이 옳고 다른 것은 전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그런 신앙을 가졌기에, 예수님께서 아무리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러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옳고 선한 일을 하셔도 그들의 눈에는 전부 이단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제 성령을 모독한 죄가 무엇인지 명확해집니다.
사람들을 정통주의자로 만들어 놓는 오류, 이것이 곧 성령 모독죄가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천국 문을 가로막고 저도 못 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한다며 저주를 퍼부으시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이어지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정통주의 신앙으로 죄인을 만들어 내는 서기관들의 입장과 정면으로 대조되는 예수님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에 씌였고 미쳤다는 소문은 예수님의 친족들의 귀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유대인들의 이런 악소문은 예수님의 가족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도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강제로 데려가려고 찾아왔습니다.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가까이 접근할 수 없어 예수님께 연락을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예수님의 가족들을 포함한, 그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한 이들, 그리고 이 말씀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5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모든 것의 우선순위요, 최고의 가치라는 말씀입니다.
인종, 계급, 신분, 빈부, 남녀, 이념, 지역, 나라 등에 상관없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며, 하나님의 뜻을 믿고, 배우고, 행하는 일에 함께하는 모든 자들이야말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을 뒤집어보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대하든 예수님의 형제요, 예수님의 자매요, 예수님의 어머니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이듯이, 우리의 이웃도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이는 겨자씨만큰 작은 시작이지만 큰 결실을 맺는 생각과 행동과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너와 나, 누구 하나 특별한 것 없이, 우리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의 소중한 형제요, 자매이며, 부모라는 믿음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구약의 말씀도 같은 흐름입니다.
북이스라엘을 향한 아모스 선지자의 선포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스라엘에게는 특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에티오피아 사람들과 똑같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셨듯이, 블레셋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혹시나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범죄를 행하더라도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죄인들이 있다면, 모두가 예외 없이 칼에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특별한 의식, 우월 의식, 열외 의식을 가진 이스라엘의 현주소를 직시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날이 되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고,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계절마다 풍년이 들어서 농부는 추수를 하기가 바쁘게 다른 곡식을 파종할 만큼 풍성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그들의 땅에 심어서 다시는 뽑혀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앞에서는 특권의식이 없는 이스라엘을 말씀하시고, 뒤에서는 그 날이 되면 마치 이스라엘에게 회복의 특권을 주신다는 내용이 어떻게 이어질까요?
누구나 골고루 행복하게 하나님 나라 이루며 살아갈 율법을 시내산에서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민족 내에서부터 만들어진 특권의식, 우월의식, 열외의식등부터 없애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특별의식으로 나라가 멸망할테니, 나라가 회복하는 길은 마땅히 이런 특권의식부터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웃의 민족들에게까지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가 되는 문화를 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하나하나를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은, 모두가 일반의식, 보편의식을 갖는 것이라는 새역사를 써 내려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서신서를 봅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고 합니다.
서신서 말씀 전체적인 맥락에서 육신대로 사는 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반대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분의 자녀이며, 상속자로 살아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로 보입니다.
육신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나만 특별한 존재가 아닌, 나만 우월한 존재가 아닌, 나만 열외되는 대상이 아닌, 모든 창조물들을 향한 하나님의 아버지의 동일한 사랑의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 아닐까요?
바울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통해서 믿고, 배우고, 행하게 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을 로마에, 그리고 이 땅에 세워지는 교회 공동체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포함한 이 땅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고,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 되기를 바라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임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책무가 있다면, 모든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것을 알려주는 삶을 몸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들로써 사랑의 폭을 넓히기는, 쉽고 만만하거나 저절로 되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이 또한 능력이요, 쌓아가는 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국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행동하고, 믿는 능력이요, 훈련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이기에,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짊어진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믿는 능력이요, 반드시 행해야 할 훈련입니다.
모두가 동일하다는 일반의식과 보편의식을 갖는 훈련으로, 골짜기를 메우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을 낮추며, 굽은 것을 곧게 하고, 험한 길을 평탄하게 만드는 일에 함께하는 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