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43:18-21, 44:21-23 / 행 16:25-34 / 마 9:9-17
주현절 세 번째 주일, 그리고 우리 고유민속인 설주일입니다. 우리는 설이 되면 이웃들에게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복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의 포로에서 자유케 하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기간 동안 그 누구도 행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복”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행할 수 없었던 “놀라운 복”을 이루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복”을 주셨습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하시며 천한 자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고 영광 돌리게 하셨습니다.
신랑과 함께 시작되는 새로운 복(마9:9-17)
복음서 본문 마9:9-17에서 바리새인들이 세리들과 죄인들을 불러 예수님과 함께 잔치를 베푼 세리 마태와 예수를 비난합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마9:9-14) 예수께서 답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15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결혼잔치가 시작되었고 구원의 잔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구원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 나라의 잔치는 시작되고 지금까지 일어나 본 적이 없는 새 일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은 밤에 신랑이 신부 집으로 찾아오면서 시작됩니다. 신랑이 오기 전까지 신부 집에 모인 사람은 불을 밝히고 신랑을 기다립니다. 신부는 평생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단장하고 기다리고, 신부의 친척들, 가까운 친구들이 찾아와 자리를 잡고 신랑을 기다립니다. 잔치 준비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준비해놓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연주할 준비를 하고, 들러리들은 동구 밖에서, 동네 사람들도 함께 신랑이 도착하기를 조용히 기다립니다. 그러나 신랑이 오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식탁에 차려진 산해진미가 의미 없고, 동구 밖에 나간 들러리들이 기다린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헛걸음 한 것이 되고, 무엇보다 신부가 신랑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이 쓸모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도착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준비했던 모든 것에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동구 밖에 나갔던 들러리들은 기뻐 환호하며 “신랑이 왔다!” 소리를 지르고, 모든 사람은 다 일어나서 신랑을 영접하고 연주자들은 이때부터 신나게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하객들은 신랑과 함께 웃고 신랑과 함께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을 즐겁게 먹기 시작합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이 오는 그 순간부터 기쁨과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풍성한 축제가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의 해요 구원의 날이로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그 순간부터 구원이 임하시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 현실이 되고 성취되었습니다. 병든 자들이 치유되고, 죄인들이 자유를 얻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병든 자들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복은 주어가 없습니다. 그냥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럽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어에는 분명한 주어가 있습니다. God bless you!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복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복이고, 주시지 않은 것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남)자는 복이지만 내게 주시지 않은 이성을 취하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줄로 재어 주신 구역, 주신 일, 정해 주신 자리가 나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지 않은 구역, 주시지 않은 땅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시면 높아진 것이 복이고, 낮추시면 낮아진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기뻐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지 않은 것에서 눈을 떼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보며 감사하며, 하나님이 지금 곁에 붙여 주신 사람을 귀히 여기고, 내게 주신 것을 즐거워하며, 내게 주신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가 오셔야 내 인생의 사는 목적이 생기고 돈버는 이유가 생깁니다.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찾아옵니다.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참 복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가 그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가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서 부터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그의 신부가 되며, 새 존재가 됩니다.
회개와 함께 시작되는 놀라운 복(사43:18-21)
우리는 예수를 믿어 그의 신부가 됩니다. 그러나 그의 신부된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있습니다. 지난 과거를 잘라버리고 벗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낡은 옷은 깁는 것이 아니라 벗어야 하며 새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하십니다(마9:16절).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낡은 옷이 튼튼한 생베 조각의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해 찢어져 생베조각도 낡은 옷도 함께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는 유다백성에게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 일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사43:18-19). 지금까지 살아온 죄와 불의, 우상숭배와 불순종을 끊어버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길은 불순종의 옷, 욕심의 더러운 옷을 벗고 새 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기워서 될 일이 아닙니다. 파선직전의 배는 물 퍼낸다고 될 일이 아니라 새 배로 옮겨 타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합니다. 내 힘과 능력과 지혜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새싹처럼 연약한 페르시아를 갑자기 강하게 하셔서 오만한 바벨론을 단숨에 무너뜨리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기적처럼 페르시아를 세계정복자가 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한신대 김이곤 교수님은 28세에 폐병에 걸렸습니다. 한신대 강사를 하다 낙향하여 날마다 시골집 창 너머 우뚝 솟은 산을 보며 기도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시121:1) 날마다 저 청산처럼 능력 있고, 돈 있고, 내게 도움을 줄 큰 손길을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날마다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고함소리가 고막을 찢을 만큼 크게 울렸습니다. “이놈아! 도움은 저 큰 산에서 오는 게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오는 거여!”(시121:2) 아! 나의 도움은 큰 산 같은 힘 있는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그 말씀이 힘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소망하자 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병석에서 일어나 책도 보고 산책도 하며 교회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찬양과 기도로 시작되는 신비한 복(행16:25-32)
오늘 서신서 본문 행16:25-32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체포됩니다. 그들을 체포한 사람들은 옷을 찢고 벗기고 매로 쳤습니다. 그리고 깊은 옥에 가두었습니다. 간수들에게 명하여 옥문을 굳게 지키게 했고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습니다. 삼중 사중으로 사도들을 결박했고 탈출할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바울과 무슨 힘이 있습니까? 어떤 방법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절망적인 감옥 속에서 오직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곧 이 모든 절망적인 상황보다 더 크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였고 오직 전능하신 주님께 기도하며 의지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신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빌립보의 권력자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사자들이 임하였고, 사도들을 가둔 옥과 그 옥문을 지키는 자들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지진으로 임하여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바울과 실라 뿐 아니라 모든 수감자들까지(26절) 결박한 차꼬가 그보다 더 강하신 분의 능력으로 풀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옥문이 자동으로 열렸습니다. 무엇이 신비입니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신비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안에 친히 오셔서 행하시는 일이 신비입니다. 설명이 불가한 일입니다.
더 놀랍고 신비한 일이 있습니다. 차꼬가 풀어지고 감옥 문이 열린 것을 알고도 바울과 실라, 그리고 모든 죄수들은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간수의 생명을 구원합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위기 속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자살을 시도하는 간수의 자결을 막습니다. 그에게 소망을 주고 그를 살립니다. 할렐루야!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살려고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빌립보 옥에서는 옥문이 열려도 간수장의 안위를 염려하여 도망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너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결하려는 간수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다음날 상관들이 찾아와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라는 명령을 하달합니다. 하나님은 간수도 살리고, 바울과 실라도 다 살려내십니다. 신비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새로운 시작의 문, 새 출발의 문이 열립니다. 우리의 옛 삶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놀라운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절망 중에도 기도하면 인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신비한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새 해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절망의 장벽이 열리며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 넘치는 새해가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