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43:18-21, 44:21-23 마9:9-17 행16:25-34
설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계묘년 새해를 맞이하여 교우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옆 사람과도 함께 인사를 나눕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계묘는 검은 토끼를 가리키는데 계는 검은색을 말하고 묘는 토끼를 말합니다. 토끼는 온순하고 친근하고 영리한 동물입니다. 그리고 한 번에 많은 새끼를 낳으므로 풍요와 번영을 뜻하기도 합니다. 설날에 덕담을 나누는 우리의 풍습에 따라, 올 한해에는 토끼처럼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가 되며 열매가 충만한 풍요로운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의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가장 귀한 열매인 포도로 새 포도주를 만들어서 그것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인데,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주를 보관할 때 양이나 염소의 가죽 부대에서 담아서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 두면, 포도주가 발효하여 낡은 가죽부대는 터져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애써 담은 새 포도주도 버리게 되고 가죽부대도 버리게 되니,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 비유를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은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세리였던 마태는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마태는 음식을 대접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어 또 한 무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 직접 항의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는데,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하면서 마태가 초청한 식사 자리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들이 죄인이라 일컫는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금식에 관해서는 지금은 혼인 잔치에 초청받은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하고 있기에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에는 금식을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이시오, 신랑을 빼앗길 그날은 십자가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힌 다음에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새 포도주 비유를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인 세례 요한으로부터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지만, 정작 복음의 시대를 열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의 전통에 따라 정해진 날에 금식을 해야 한다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위선적인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겉 사람은 경건으로 위장하고 속사람은 탐욕을 쫓는 자들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을 넘어선 복음의 시대가 왔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복음의 시대란, 죄와 허물을 지적하고 정죄하였던 율법의 한계를 넘어서서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품는 세상을 말합니다.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세상을 열기 위해서 신랑 되신 예수님이 오셨으니 죄인들과 함께 식사할 수 있으며, 금식을 잠시 뒤고 하고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애찬을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신랑 되신 주님이 오셨다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새 포도주는 복음을 말하고 새 가죽 부대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말함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매인 자들은 낡은 가죽 부대여서 그들은 새 포도주인 복음을 수용할 수 없으니 낡은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에 복음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는 복음을 담아내는 새 부대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더욱이 만 3년이나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의 바이러스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부대를 마련해야 합니다. 코로나19의 펜데믹을 종식하고 새 부대에 복음을 담기 위한 삶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옛날 일을 버리는 것입니다. 새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허물 많은 옛사람을 버리고 새롭게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지만, 뼈아픈 이전 일은 기억하지 말고 옛날 일은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18-20)
하나님은 이전 일, 옛날 일은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여 나타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을 강을 낼 것이며 그리고 물 없는 광야와 사막을 지날 때에 물을 마시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전 일과 옛날 일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나타내실 새 일을 행하라는 말씀을 새 포도주 비유에 적용해 봅시다. 이는 곧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담는 것은 낡은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과거를 버리고 과거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전 일을 기억하지 않고 옛날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두운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단하고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거칠고 험한 광야에 길을 내시고 메마른 사막에 강물을 흐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단하고 목마른 여정에 생명의 물을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에 매인 자는 과거의 허물을 들추는 자이기에 죄인과 함께 음식을 나눌 수 없습니다. 잔치 자리에 초청을 받아도 기쁨을 나누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새해라는 시간의 기회가 주어져도 지난 일에 매여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희망찬 미래를 풍요롭게 설계하지 못하고 여전히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본문인 사도행전은 율법으로는 살릴 수 없는 영혼을 복음으로 살려내는 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됩니다. 귀신 들린 여종이 점을 치고 있었는데, 그 여종을 붙잡고 있던 귀신을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낸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여종이 점을 치면서 받은 복채를 주인들이 빼앗아 갔는데 이제 맑은 정신으로 점을 칠 수 없으니 수입이 끊어진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로마의 관리들에게 넘겼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빌립보에서 로마 사람이 수용할 수 없는 풍속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바울과 실라는 모진 매를 맞고 발에는 차꼬가 차인 채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날 밤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하니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잠을 깬 간수는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생각하여 칼을 꺼내어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본 바울이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간수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온 바울과 실라가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옥에 가둔 관원을 염려하였으니 말입니다. 간수가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니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간수는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고 바울과 실라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구원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율법으로는 간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들을 핍박하고 옥에 가두었으니 정죄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달랐습니다. 나를 때리고 핍박하고 가둔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 범한 자도 구원받을 소중한 영혼인 것입니다.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생명의 길을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며 물 없는 광야와 사막에서 물을 마시게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길과 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걷고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2023년 계묘년 새해를 맞았지만 어려움은 지속될 것입니다. 코로나19가 아직 종식되지 않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으로 경제는 불안하고, 기후 위기는 더욱더 심화될 것입니다. 여전히 광야와 사막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 고난의 시대에 우리는 복음을 새 부대에 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복음의 말씀이 죽음을 앞둔 간수에게 생명의 길이 되고 생수가 되었듯이, 복음의 말씀으로 새롭게 주어진 한해를 능력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