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슥 14:5-11, 고전 12:12-31, 요 17:20-26
오늘은 주현절 둘째 주일이며 여신도회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우리의 민속명절인 “설주일”이기도 합니다. 여신도주일 생각을 하다 우리나라 민속놀이 중에서 여성들만이 할 수 있는 놀이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강강술래”입니다.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대보름 밤이면 여성들이 고운 한복을 입고 손에 손을 잡고 목청 좋은 한 사람이 맨 앞에 서서 “메기는 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강강술래”로 받는 소리를 하며 춤을 추며 빙빙 돕니다. 처음에는 진양조의 느린 가락으로 부르다가 점점 중모리, 중중모리로 빨라지다 마지막에는 자진모리로 매우 빠르게 부르게 되고 이에 맞춰 춤도 빠르게 추면서 그 흥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강강술래는 ‘윤무(輪舞, a circle dance)’입니다. 앞서는 자도 뒤서는 자도 없고, 높은 자도 없고 낮은 자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군무(群舞)’입니다. 온 마을 여인들이 모두가 손을 잡고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은 ‘한 분’(하나 임/ Einheit)이 아니라 세분 하나님이 ‘하나가 되시는 분’(하나 됨/ Einigkeit)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동체적(God′s society)으로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 창조 되었다는 것은 곧 ‘공동체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어떻게 완전한 하나를 이루어가십니까? 몰트만은 “삼위하나님은 삼위간의 사랑의 통교(通交/ the perichoresis of love)”를 통해 하나를 이루어 가신다고 말했습니다. 본래 헬라어 περιχώρησις(페리코레시스)는 ‘윤무(輪舞, a circle dance)’를 뜻하는 말인데 그리스 교부들은 이 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과 삼위하나님의 인격적 연합을 설명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마치 대보름날 여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 춤을 추면서 하나가 되듯이 세분 하나님이 먼저도 나중도 없이, 높음도 낮음도 없이,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섬기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조를 맞추시며, 한 순간도 정체됨 없이 함께 기쁨으로 춤추며 창조와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상호 내주하시는 하나님(the mutual indwelling/ 요17:20-26)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라고 알려진 복음서 본문 요17:20-26은 특별히 제자들과 함께 장차 제자들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사람들까지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20-21절)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은 참된 하나 됨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갈등과 대립과 분쟁과 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 러시아간의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이 자칫 3차 대전의 시작이 될지 모른다고 염려하기도 합니다. 휴전상태인 남북 간에도 최근 들어 소통과 대화보다는 점점 불신과 긴장의 벽이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무엇을 해도 이 땅의 분쟁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고민입니다. 이제 우리가 깊이 관심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 됨입니다. 어떻게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과 하나가 되셨습니까? 영이신 하나님과 몸을 입으신 예수께서 어떻게 일체를 이루신 것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안에, 예수가 아버지 안에 항상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요17:20-23)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계셨습니다. 마리아에게 잉태하실 때, 세례 받으실 때, 그의 공생애 사역가운데 항상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요? 예수님은 그 어느 때에도 하나님 없이 자의적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행하시지 않았고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면 임의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따라 행하십니다. 언제나 아버지가 정하시고 명하시고 말씀하신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성취하는 삶이었습니다. 아버지하나님을 떠난 삶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하나 됨은 삼위하나님께 있습니다.(21절) 세 분 하나님은 각각 다른 분이시지만 하나 됨으로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들과 함께 계시고 모든 것을 그에게 위임하십니다.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본 적이 없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만을 드러내고 나타내십니다. 세 분 하나님이 나눌 수 없는 한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창조사역, 구원의 사역,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삼위 하나님이 함께 이루시고 성취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우며 영광스러운 하나 됨의 모습입니까?
사랑과 섬김으로 하나 되시는 삼위하나님(슥14:5-11)
삼위 하나님은 서로 내주하셔서 하나 되실 뿐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를 섬김으로 하나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시며, 성자는 성부와 성령을 섬기며 영화롭게 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섬기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누시는 사랑으로 충만한 코이노니아(koinonia)는 서로를 섬기고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섬김의 디아코니아(diakonia)로 완성됩니다.
구약본문 슥14:5-11은 하나님이 장차 이루시려고 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으로 하나’가 되는 나라임을 보여주십니다. 남, 북 왕국이 하나가 되고 유대인과 이방이 하나가 되며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이 하나가 되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지리적, 정치적 복귀가 아니라 과거의 이스라엘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슥14:5-8)
“5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6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7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그 나라는 장벽을 열어 새 길을 만들어 주시는 나라입니다.(5절) 포로시대 이전, 남 왕국 웃시야 왕 통치시절에 유다에서 일어난 지진(암1:1)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큰 사건인데 지진당시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지진을 피해 탈출하다 감람산이 막혀 떼죽음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지켜주고 방어해 주던 감람산이 오히려 지진을 피해 탈출하는 백성들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새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을 가로막았던 홍해가 새 길이 되는 나라, 지진을 만난 백성들의 도피를 막았던 감람산이 오히려 피난길이 되어주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 되지 못하면 서로에게 장벽이 되어 상처와 아픔을 주지만 하나가 되면 서로에게 길이 되어주고 문이 되어주고 피할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 나라는 항상 빛나는 하나님의 광명의 빛으로 충만한 나라입니다.(6-7절) 지금은 빛과 어둠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한 쪽에 빛이 비치며 다른 한 쪽은 어둠입니다. 한 편이 광명이면 한 쪽은 그늘이 집니다. 한 편이 승리하면 다른 한 편은 패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면 누구나 구원 얻습니다.(요3:16)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광명은 그림자가 없는 광명이요 그늘이 없는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르는 나라이며 여름에도 겨울에도 변함없이 흐르는 나라입니다.(8절) 물은 낮은 쪽으로만 흘러 많은 곳은 넘치고 없는 곳은 메마릅니다. 한 편은 홍수로 죽고 한 편은 가물어 죽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오시면 생수가 어디든지, 누구에게든지, 여름이든 겨울이든 언제든지 흐를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교회가 이방교회를 복음으로 살렸습니다. 그러나 다음에는 이방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예루살렘교회를 연보로 돕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것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갈수록 서로 가난해지고 비천해지며 약해집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루시는 그 나라는 힘 있는 자, 권세 있는 자가 아니라 오직 공평과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만이 천하의 왕이 되시는 나라입니다.(9-11절) 힘 있는 자만, 돈 있는 자만, 권세 있는 자만 잘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통치하시는 나라가 될 때 비로소 이 땅에는 참 평화의 나라, 하나가 되는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지체를 존중하고 예찬하는 교회(고전12:12-31)
삼위 하나님은 상호 내주하시고 서로를 섬기실 뿐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시고 예찬하시는 분이십니다. 서신서 본문 고전12:12-31은 교회는 많은 지체를 가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몸에 있는 지체들은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를 존중하고 예찬하며 감싸고 사랑으로 공존해야 합니다.(20-25)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다양성이란 서로 다른 혹은 구별된 존재들이 함께 공존한다는 말입니다. 다양성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지요.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다른 구별된 위격(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서로 구별되는 존재들이 지닌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존하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다양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다양하게, 서로 다르게, 서로 구별되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창1:11-12, 21, 25) 그러므로 우리는 나와 다른 존재와 사람, 다양한 입장들과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한 존중과 예찬의 삶, 수용하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우리와 다른 타자(他者)를 주신 것은 재앙이 아니라 예찬해야 할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 프랑스 유대인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타자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인간이 타자를 자신과 동질화 내지 획일화하려고 할 때 모든 비극은 시작이 된다 … 인간이 참된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정체성을 확립하려면 타자와 자신을 구별되는 절대적 존재로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상 일어났던 대부분의 문제들, 인종, 계급, 성차별, 종교 갈등, 생태계 위기 등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인해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다양성을 존중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본받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어우러져 공존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부단히 노력해야만 합니다.
‘강강술래’는 세계에서 그와 같은 놀이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민속놀이’입니다. 여신도주일 특송 시간에 우리교단 온 여신도들이 앞장서서 ‘강강술래’ 춤을 추어보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한 사람이 먼저 맨 앞에 서서 ‘시편 1편을 메기는 노래’로 시작하고 그 뒤를 이어 한 사람씩 손을 잡고 ‘아멘 할렐루야! 강강술래’ 화답하며 이젠 모두가 원을 그리며 한 덩어리가 되어, 높은 자도 낮은 자도, 앞선 자도, 뒤선 자도 없이, 모두가 손을 맞잡은 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노래를 부르며 기쁨의 춤을 추어보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