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 6:2-9 계 12:7-12 마 14:1-12
1.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이시여, 꿈과 이상을 보게 하소서!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아닙니다. 그들이 비록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록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술로 시인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범죄한 나라의 죄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지난주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성경을 잘 안다는 서기관들처럼(또한 율법을 잘 지킨다 말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을 미쳤다하여 비방하는 이들도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늘 신앙 공동체를 훼방하며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도 이방인, 곧 교회 다니지 않는 이들이 아니라, 교회를 열심히 사모하고 다니는 이들 가운데 그런 세력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렇게 교회 공동체를 방해하는 세력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현절기에 공생애를 펼치시는 예수님 앞에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죠? 이렇게 훼방하고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렇게 끊임없이 사탄, 마귀들이 공동체를 허물려고 시험하고 유혹하고 방해합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 되기가 참 힘듭니다. 사실, 신구약을 꿰뚫고 흐르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은 ‘하나 됨’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 올해 표어가 총회 주제의 정신을 따라,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이시여, 꿈과 이상을 보게 하소서!(욜 2:28-32)”인데, 이곳 부산 남구 지역에 하나님 나라의 선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또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꿈과 이상을 보기 위해, 먼저 교회 구성원들이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잘 아는 ‘수도승’이라는 말은 모나코스(monachos)라는 단어인데, 그리스어의 어근, 하나(monos)에서 유래합니다. 수도승은 우선 자기 안에서 마음이 갈라지지 않은 하나를 이룬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나 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하나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웃을 만나 깊은 섬김의 차원에서 하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수도승이라고 합니다.
많은 수도승들에게 모범이 된 사막의 은수자(隱修者, hermit, 종교적인 이유로 사회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인 이집트의 안토니우스(Antonius, 251-356)는 ‘부자 청년에 관한 설교 말씀(마 19:16-30)’을 듣고, 모든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이집트의 빈 무덤 동굴에서 15년 동안 엄격한 은수 생활을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자, 순교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끝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슬픈 마음으로 사막으로 돌아가 20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하였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마침내 안토니우스는 ‘하나님의 지혜를 지닌 사람’, ‘은총과 품위를 지닌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철학자가 찾아와 안토니우스에게 물었습니다. “은수자님, 독서의 위로 없이 어떻게 고통과 싸워 이겨 낼 수 있습니까?”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연이 바로 책입니다. 나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글을 읽습니다.” 자연이 바로 하나님께서 쓰신 책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을 바라보며 자연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의 마음이 갈라지지(분열되거나,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하며 두 번째는 자연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웠으며 이씨조선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삼봉 정도전 선생도 『삼봉집(三峰集)』, 「도은문집서(陶隱文集序)」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둔 수도사 성 안토니우스와 삼봉 정도전>
“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무늬이고(日月星辰 天之文也), 산천과 초목은 땅의 무늬이고(山川草木 地之文也), 시서와 예악은 사람의 무늬이다(詩書禮樂 人之文也). 그런데 하늘의 문은 기로써(然, 天以氣), 땅의 문은 형상으로써(地以形) 사람의 문은 도로써 이루어진다(而人則以道). 고로, 문이란 ‘도를 실어 나르는 그릇’이다(故, 曰文者載道之器).”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산천초목(山川草木)에서 하나님의 글을 읽었던 안토니우스를 넘어, 일월성신과 산천초목은 물론, 시서예악(詩書禮樂)에서 까지 ‘도(道, 말씀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만)’를 파악했던 삼봉은 모든 자연 만물과 아름다운 시(詩)와 글(書), 음악(樂)과 사람들 사이의 예절(禮)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계절을 가만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한 겨울의 매서운 바람 속에 봄기운이 깃듭니다. 매화가 제법 패기 있게 겨울의 텃새에 저항합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진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면 새로운 희망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늘 세 본문 말씀은 공동체를 훼방하고 방해하는 세력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리고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을 죽이기까지, 의로운 이를 핍박한 헤롯 왕(과 그의 의붓딸 살로메)을,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하늘 전쟁의 때에 교회를 핍박하는 큰 용(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계 12:9)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와 믿는 이들이 증언하는 생명의 말씀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은혜로운 말씀이 이어집니다.
2.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출 6:2-5)
그 옛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기억하여, 애굽에서 종으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출 6:6-8)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출 6:9).” 불순종이죠? 강팍한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도록 만든 것입니다. 물론 가혹한 노동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육체적 고통은 정신의 위안을 얻을 여지를 남겨 두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넘어, 복음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이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불의의 세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헤롯 왕과 그의 의붓딸 살로메입니다.
3. 옥에서 목 베인 세례 요한
헤롯왕은 자신의 생일 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였기 때문에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헤로디아는 헤롯 왕의 이복형인 헤롯 빌립 1세의 부인입니다. 헤롯은 헤로디아가 형과 이혼하자, 그녀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로디아의 딸 이름이 살로메인데, 헤롯왕의 의붓딸이 됩니다(헤롯 왕의 가계도 참조). 그러나 세례 요한은 말씀에 비추어 이 결혼이 잘못된 것이라고 헤롯 왕을 비난합니다. 이에 헤롯 왕은 요한을 미워하였으나, 민심이 두려워 죽이지는 못하고 감옥에 가두어 둡니다. 그러던 중 헤롯 왕의 생일잔치 날, 사건이 벌어집니다. 살로메가 춤을 추어 헤롯 왕을 기쁘게 하자, 왕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말씀에 잘 나와 있으니, 같이 볼까요?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마 14:6-8)”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 쟁반에 받쳐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고, 헤롯은 근심하기는 했으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마 14:9)”합니다. 그러자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마 14:9-11)”게 됩니다.
베르나르디노 루이니(B. Luini, 1480-1532)의 <헤로디아>(1527-31) 그림을 보세요. 목이 잘렸지만 평온한 세례 요한과 헤로디아의 무표정한 듯 비웃는 야비한 미소가 대조적입니다. 오스카 와일드(O. Wilde, 봉준호 감독이 2020년 4개나 수상한 아카데미상인 오스카상과는 상관없습니다만)의 희곡 『살로메』(1893)를 보면, 이 사건의 주인공을 헤로디아가 아니라,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로 만들어 버립니다. 무슨 말이냐면, 와일드의 작품 속에서는 세례 요한이 죽게 된 것은 헤로디아의 복수가 아니라, 살로메의 세례 요한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베르나르디노 루이니(B. Luini, 1480-1532)의 <헤로디아>(1527-31)
상상력이 가미되었지만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의붓 왕 헤롯의 음흉한 시선을 피해,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에게 마음이 끌린 살로메는 요한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살로메 유혹을 요한은 자신의 사명 때문에 거절합니다. 따라서 살로메는 요한에게 복수를 결심합니다. 살아서는 요한의 키스를 받지 못했지만, 살로메는 요한을 죽인 후 잘려진 요한의 머리에는 키스를 하게 됩니다.
또한 오스카의 예리한 상상력은 의붓아버지 헤롯 왕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아름다운 의붓딸 살로메에 대한 헤롯 왕의 욕망이 살로메의 매혹적임 춤과 겹쳐지면서 이 사건은 사랑과 욕망, 그리고 죽음의 삼중주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성서에는 다만 ‘춤을 추었다(마 14:6)’라고 되어 있을 뿐인 살로메의 춤을, 오스카는 ‘일곱 베일의 춤’으로 구체화했습니다. 일종의 스트립 댄스(선정적인 감정을 일으킬 목적으로 옷을 벗어 가며 추는 춤)라고 볼 수 있는 이 관능적인 춤에 유혹된 의붓아버지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 살로메의 집요한 욕망을 오스카는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프란츠 폰 슈투크(F. von Stuck)의 <살로메>(1906)가 살로메의 이러한 욕망을 잘 보여줍니다.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쟁반 위에 놓여진 요한의 잘려진 머리를 바라보는 모습에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또한 희고 푸르스름한 살로메의 몸은 섬뜩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표지와 프란츠 폰 슈투크의 ‘살로메’(1906)>
아무튼 불의의 세력들은 이렇게 결탁해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고 생명을 죽이는 일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또한 두려움 없이, 부끄러움 없이 행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사역을 시작하셨죠?(막 1:14) 따라서 요한이 죽은 후,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롯은 깜짝 놀랍니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 도다 하더라(마 14:1-2).” 물론 이것은 헤롯이 요한을 죽인 죄책감의 발로입니다. 복음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마 14:3-5)
옳은 일을 하는 이들, 또한 불의를 행하는 이들에게 옳은 소리를 하는 이들은 이렇게 핍박을 당합니다. 아무튼 요한의 제자들은 이 일을 예수님께 알립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마 14:12).” 따라서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의 시작은 요한의 죽음 이후이며, 어쩌면 요한의 길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혹은 교회 공동체의 완성)을 위해 공감하며 연대하며 함께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역은 마지막 하늘 전쟁 때까지 이어집니다.
4. 하늘 전쟁의 때에!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하늘 전쟁’의 때를 보여줍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 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계 12:7-8).” 하늘 전쟁에서 하늘의 천사장인 미가엘이 용과 맞붙어 싸웁니다. 이 용은 사탄입니다. 사람들을 미혹하는 마귀입니다. 이 사탄이 전쟁에서 져서 쫓깁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 12:9).”
<귀도 레니의 하늘 전쟁의 때의 ‘천사장 미가엘’>
이렇게 예수님의 가족을 핍박하는 자, 교회 공동체를 훼방하는 자,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요한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 12:10-11)
여기서 참소(讒訴)하다는 말은, ‘해치려고 거짓으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일러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사탄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결국 ‘어린양의 피’와 ‘형제들의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희생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어린양 예수의 십자가 보혈을 전하는 생명의 말씀으로 이러한 참소하는 자들, 사탄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세요. 마지막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형제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늘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한 우리들은 즐거워 할 것입니다.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계 12:12a).” 그러나 하반절의 말씀을 보세요. 중요한 말씀이 나오죠? 하늘 전쟁에서 패배한 용이 땅으로 내려와 다시 도전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계 12:12b).”
이 도전을 위해 사탄 마귀는 땅의 제국을 활용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땅의 제국인 음녀 바벨론이 바로 로마 제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사상 로마 제국의 후예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하늘 전쟁에서 패배한 용이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깨닫고, 땅으로 내려와 참소하는 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형제를 해치려고 거짓말하는 자들이 바로 사탄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린양의 피와 생명의 말씀으로 이 사탄, 마귀 세력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서두에 일월성신과 산천초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던 안토니우스를 말씀드렸죠? 또한 일월성신과 산천초목은 물론, 시서예악(詩書禮樂)에서까지 말씀, 곧 ‘도(道)’를 파악했던 삼봉을 이야기 했습니다. 한 겨울의 매서운 바람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의 위협 속에서도 봄기운이 깃들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시 연대와 고통 분담의 사랑이 깃듭니다(물론 이기적인 사탄의 자녀들은 변하지 않죠?).
매화와 동백꽃도 이제 기지개를 킵니다. 우리 앞에 닥친 이러한 시련은,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비록 불의한 제국이라는 큰 용이, 또한 선한 사람들의 선한 영향력을 이간질로 무력화시키려는 용의 자녀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어린양의 피와 생명의 말씀으로 이미 이긴 싸움을 싸워나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한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최후 승리의 꿈과 이상을 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주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