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막 3:7~19, 출 18:13~27, 고전 12:1~11
지난 설 명절을 잘(?)마쳤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과 기쁨을 나누는 시간도 잠시 이제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하기 바라며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서로를 위해 축복하고 보듬어주고 위로해주는 시간은 참 짧습니다. 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는 것을 보면 기회가 있을 때 그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번 한 주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면 아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과 함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관련된 이야기들일 것입니다. 새해 인사말을 나눌 때는 행복했는데 “코로나바이러스”이야기를 들으면 근심과 걱정이 앞서는 것은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혹시 나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지는 않을까 근심하며 걱정하는 사이 그저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세상에는 나쁜 바이러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기 바이러스는 약해진 면역체계를 통해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드시 감기에는 치료약이 없습니다. 충분히 쉬고 잘 먹는 것입니다. 바로 몸을 너무 혹사 시키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기 걸렸을 때 약먹고 더 열심히 일하지 마시고 쉼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많은 언론에서 신종바이러스의 위험을 경고하며 개인위생에 철저히 할 것과 예방수칙/행동요령을 안내하고 있으니 잘 기억해두고 더욱 건강한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서신서의 말씀을 통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는 사건을 나누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나아가 간수와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고 구원 받는 내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를 전하는 사명자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기로 결단하고 사명을 감당할 때 황무지에 장미꽃이 피는 것처럼 분명히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났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해외선교주일로 지킵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선교사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함께 중보하고 기도하며 협력하는 일에 동참해야겠습니다. 또한 오늘 말씀을 통해 처음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첫사랑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복음서의 말씀을 봅니다.(막 3:7~19)
본문의 내용에서 예수님께 많은 무리가 나오는 것과 열두 제자를 세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1.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병든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고통과 억압 가운데 있는 자들을 행방시켜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소문이 온 유대와 갈릴리에 퍼져 나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작은 배를 준비할 정도였습니다.
1-2. 갈릴리와 유대와 온 동네 그리고 두로와 시돈 근처의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음을 듣고 자신의 질병도 치료받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육체의 질병과 악한 영의 역사로 인해 고통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1-3.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예수님의 교훈을 배우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과 권능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저 만나기 위해 모인 무리보다 더 많은 시간을 주님과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삶의 목표와 우선순위를 바꿨으며, 그분을 따르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1-4.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명목상의 제자가 있는가 하면, 삶과 인격이 예수님을 닮은 참된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열두제자 중에 가룟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함께하며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지켜보았음에도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버립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2.구약의 말씀을 봅니다. (출 18:13~27)
본문은 지혜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지도자 모세를 봅니다.
2-1.모세와 이드로의 만남 이후 하루가 지났습니다. 모세는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아가 여러 바쁜 업무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드로는 모세가 하는 일들을 하루 종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모세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주로 백성들을 재판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드로가 보기에 그가 하는 일들이 너무도 벅차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건 아니다 싶어서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네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찌 됨이냐. 어찌하여 네가 홀로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곁에 서 있느냐?” 그러자 모세가 말합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쪽을 재판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아마도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유일한 중재자로 여기고 모든 것을 그에게 의존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드로는 걱정스런 마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17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네가 하는 일이 옳지 못하도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느니라.”
2-2.우리는 모세를 향한 이드로의 충고 가운데 “네가 혼자 할 수 없느니라.”는 이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입니까? 모세가 애굽에 있는 백성들을 이끌어 출애굽을 하고 또한 광야에서 백성들을 이끌 때는 당연히 강력한 리더쉽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힘든 일이 닥치면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런 연약한 백성들을 이끌고 나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그들의 연약함을 품어가면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섬기고 또 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를 향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모세를 찾아와서 해결을 구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을 자신이 하는 게 마땅하다하고 여겼습니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백성을 더 잘 섬기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드로가 보기에는 불합리한 일이었습니다.
2-3.따라서 이드로는 그에게 크게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준수해야 할 규칙을 미리 알려주고 삶의 방식과 방향을 가르쳐 주면 재판할 상항이 대폭 줄어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함께 이 일을 위해 사역할 동역자를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2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2-4.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재판권은 그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기득권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드로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순종합니다. 이점은 모세의 리더쉽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유산이 될 것입니다. 그의 리더쉽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무릎을 꿇는 리더쉽이었습니다. 여기에다 이제 그는 “배움의 리더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전날까지만 해도 이방인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애굽땅에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과정에 함께 한 사람도 아니었고 모세가 어려움을 당하고 여러 힘든 일을 해 나갈 때에도 함께 했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모세가 전날에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함을 통해서 이제 갓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드로는 모세의 장인이라는 점 외에는 모세가 지도자로서 행하는 일에 강력한 반대를 하는 일이 좀 우스울 수도 있고, 경우에 맞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드로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기득권이나 어떤 권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잘 섬기는 데 이드로의 충고가 옳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드로의 말을 적극적으로 경청하고 이를 수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서신서의 말씀을 봅니다. (고전 12:1~11)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회가 성령으로 하나되기 원하는 바울의 편지를 담고 있습니다.
3-1.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로 인해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교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자들이 꽤 많이 있었던 것을 다음 바울의 말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2:1) 매우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그 뜻은 아주 분명합니다.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3-2.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들이 그 어떤 교회보다 풍성하게 나타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이 풍성한 은사들을 자랑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풍성한 은사들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헛된 명성과 지위 따위를 얻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서로 반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서로 다투고 싸웠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 심한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습니다.
3-3.그렇다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왜 그렇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까? 여러 가지로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잘못 생각한 것이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의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상하게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여러 자기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그렇습니다!
3-4.예나 지금이나 서로 다른 것, 즉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받은 바 은사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합니다. 맡은 바 직분이나 사역도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3-5.이 땅 위에 교회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충만하게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와 성령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성령의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무슨 말입니까?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예수를 저주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견디기 어려운 심한 핍박 때문이었겠지만... 또한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3-6.그런데 그 옛날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과 참 많이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한국 교회는 아직도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 부지런히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교회, 열심히 전도하는 교회가 한국 교회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놀랍게 부흥한 교회가 바로 한국 교회가 아닙니까?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부끄러운 문제들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 부끄러운 문제들을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하루 빨리 해결하지 못할 것 같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절망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교회가 그 어떤 희망도 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교회는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성령의 역사 가운데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에 많은 상처를 입혔지만 그래도 교회만이 이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본래의 모습을 다시금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분의 말씀을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해야 하며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2)우리가 또한 더욱 힘써야 할 일은 이 땅 위의 모든 성도들이 각기 다른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 협력하는 일입니다. 이일은 우리의 힘이나 지혜가 아닌 복음의 능력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것을 바라보며 거룩한 길을 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 도움으로 서로 부족한 것을 채우고 가진 것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고난과 기쁨도 함께 나눔으로써 특히 이 땅 위의 약자들을 위한 교회로 새롭게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순종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항상 넘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