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43:18-21; 44:21-23, 행16:25-34, 마 9:9-17
설날
오늘은 설 주일입니다. 어제가 설날이었지요. 새 날에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설날은 무엇보다 ‘서는 날’ ‘세우는 날’이라고도 합니다. 새 날을 맞아 새 뜻을 세우고 새 계획도 세운다는 얘기지요. 새 날이 와도 새 뜻을 세우지 않는다면, 새롭게 살지 않는다면, 나이 한 살 더하는 것밖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새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선조와 부모의 은덕을 기리고, 형제자매 친지들을 만나 정을 나누며, 새 마음 새 뜻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새해에 우리가 세운 뜻과 계획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도해 주시고, 믿음과 성실로써 잘 이루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옛 일을 기억하지 말라
오늘 우리는 이사야의 말씀을 함께 받았습니다. 너희는 지나간 일을, 옛일을 생각하지 말라,(18절) 이제 내가 새 일을 일으킬 것이다(19절)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이루어 가실 것이니, 우리는 옛일을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그 말씀이지요.
우선 먼저 이사야는 지나간 일, 옛일을 기억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과거를 묻지 마세요’ 하는 철 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다 잊어버리라는 말일까요? 저 일본의 아베처럼, 우리는 과거에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강제징용도 위안부도 없는 일이라고 시치미 떼는, 참 뻔뻔한 철면피가 되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옛일을 기억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역사를 망각하거나 왜곡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은 끈임 없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를 뼈아프게 성찰하라고 했습니다. 특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고역을 치르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그 고통을 당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죄악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 역사의 죄과를 깊이 성찰하고 참회하며 회개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다시 그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여기 이사야가 옛일을 기억하지 말라는 것은 역사를 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그 과거로 회귀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총선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출사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여러 가지 사람들이 각양각색으로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요. 그런데 얼마 전 일본 대사관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아베에게 사죄한다고 소리쳤던 이가 있습니다. 참 참담한 일이지요. 세상 엄마 망신 다 시키는 자칭 ‘엄마부대’ 대표라는 자입니다. 그가 이번에 국회의원에 출마하려 한답니다. 그를 비롯하여 아직도 일본이 우리의 은인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자들도 있지요. 그런데 이 자들이 생각하는 옛일이란 무엇일까요? 이들이 그토록 잊지 못하고 뼛속까지 새겨 기억하고 있는 그 역사란 도대체 어떤 역사일까요? 도대체 나라를 팔아먹고 얼마나 엄청난 것을 챙겨 물려주었기에, 그토록 대를 이어 과거를 흠모하고 그리워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옛일을 기억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의 청산하라는 말입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다시는 그런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역사를 성찰하고 그 죄과를 단호히 끊어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이사야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다만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는 저 이집트의 태양신도 아니고, 저 바벨론의 마르둑도 아니고, 저 일본의 천황도 아니고, 저 미국의 트럼프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이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 역사의 주관자시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44:21)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이는 이집트도 바벨론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하나님의 생각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을 버려야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길을 버려야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옛 것을 떠나야 새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예수님께서도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면, 가죽 부대가 터지고 포도주도 쏟아져서, 둘 다 버리게 되지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의 시작, 새 일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그 새 일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세리입니다. 무엇보다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열두 제자를 완성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흩어진 이스라엘을 완전하게 이루는 일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이스라엘을 다시 성결하고 흠 없게 완성하는 열두 제자라면, 어떤 사람들이어야 할까요? 순결한 이스라엘 사람들이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르신 열두 제자는 순결한 이스라엘을 완성하기에는 너무도 흠결이 많습니다.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더구나 예수님은 이런 세리들로도 모자라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드셨습니다. 본문에 앉아서 음식을 드셨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비스듬히 누웠다’는 말인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한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누리는 잔치’(8:11)입니다. 온전한 이스라엘의 잔치입니다. 그런데 이 순결한 이스라엘의 잔치에 세리와 죄인을 부르신 예수님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파 사람들이 먼저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온전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지요. 왜, 어째서 당신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서 음식을 먹는가? 이것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잔치에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의사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 든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지 제물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의 뜻을 배우라고 하셨지요. 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왜 예수님이 이루시는 새 일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그들은 율법의 전문가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율법의 본뜻은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율법의 낡은 문자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것에 매였기 때문에 새 일을 볼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만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왜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을 하는데, 당신들은 먹고 마시는가? 이것이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이었지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것은 헤롯과 예루살렘 사람들의 기름진 식탁을 비판하는 것이지요. 탐욕과 향락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절제와 금식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니, 이건 잘못된 것 아니냐고 항변한 것입니다. 그렇게 질문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슬퍼하지 않지만,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면 슬퍼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지요. 규례는 때와 상황에 맞게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대에 기우면 옷이 찢어지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진다고,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매여 있어서, 예수님이 하시는 새 일을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의에 갇혀서 하나님의 자비를 볼 수 없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규례에 매여서 예수님의 새 일을 알 수 없었습니다. 전통은 중요하지만, 낡은 전통에 매여 있다면 새 일을 볼 수 없습니다. 규례도 중요하지만 낡은 규례에 묶여 버리면 새 일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규례를 고집하면,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새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새 일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가 받은 사도행전 본문에서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것도 옷을 벗기고 심한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직전에 소아시아에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16장)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상당히 성과가 좋았지요. 교회들은 믿음이 튼튼해지고 그 수도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얼마나 보람 있는 일입니까? 내친 김에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 비두니아까지 가려고 했지요. 그런데 성령이, 예수의 영이 그 길을 막았습니다. 그 길로 가면 잘 될 것 같은데,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성령께서. 그래서 바울은 마케도니아로 가게 되었고,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다가, 그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돌아보면, 잘 나가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 길을 막아버렸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는데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옷을 벗기고 매를 때리고 발에 차꼬를 채워 차가운 감옥에 가둔 것이지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얼마나 실망스러웠을까요? 왜 성령께서 이 고통스러운 길로 몰아가시는 것일까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때 바울은 그 차가운 감옥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바울의 찬양은 잘 나갈 때, 편안할 때, 내 뜻대로 풀릴 때 하는 타령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이기에, 비록 고난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졌을지라도, 바울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바울의 찬양은 다만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명하는 노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일까요?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겠지만, 바울은 다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섭리에 순명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본래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교리를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바칠 준비가 된 사람이었지요. 그런 그가 자신의 생각과 교리를 버렸습니다. 그는 옛것을 분토처럼 버렸습니다. 그것들이 바로 ‘낡은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새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의 새 날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새 날을 살아갈 새 마음과 새 뜻을 주십니다. 이제 우리도 지나간 옛것을 버리고, 다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새 일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함께 나누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디서나 다만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기도하고 찬양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모든 날 모든 곳에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한민교회 서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