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4:12~25, 행 4:1~4, 13~21, 겔 3:16~21
주중에 겨울비가 꽤 많이 내렸다. 비가 내려서 행동거지에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마치 지난 2019년의 묵은 때를 씻는 비요, 2020년을 새롭게 출발하게 하는 공동 세례식의 거룩한 물 같았다.
지난 주일에 성자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 하나님이 비둘기 같이 내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확인했다.
밝아 온 2020년, 묵은 때가 씻겨지고, 새로워질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현절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그 첫째주일이다.
주현절기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펼치셨던 시기다. 핵심 사역은 가르치고, 선포하고, 치유하시는 일이다. 잃어버린 인간성, 인간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늘 권세 버리시고 친히 인간이 되어 오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구원 행위요, 인간을 하나님께 맞추려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맞추시려는 하나님의 공감하심이다.
우리의 모든 여건과 처지와 상황을 아시고 공감하시는 하나님께서 위로와 새 힘을 더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주현절 첫째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오늘 세 본문 말씀에서,
세상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구세주 사역을 시작하신다. 그 중심 사역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시는 일이다(마 4:23).
복음서에서는, 이 일을 위해서 예수는 제자를 택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합력하시듯이, 예수도 제자들을 택하셔서 그리스도의 사명을 함께 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고 집중하셨다. 왜 그랬을까? 제자들은 예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어찌 사느냐에 따라서 스승이신 예수가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행하신 구원의 사역인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일을 제자들이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애정을 갖고 끝까지 제자훈련을 시키셨다. 기억하는가? 예수께서 모든 사명을 마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까지도 제자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가르치셨다(눅 24:45).
서신서와 구약에서는 각각 예수님의 사명을 받은 제자들, 그리스도인들이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지속해야 하는 마땅한 이유를 말씀하신다.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직접적인 말씀이다.
먼저 복음서를 보자.
조연의 역할을 다한 요한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주인공인 예수가 등장하신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바통 터치다. 이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세례 요한이 외쳤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드디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어디에서 등장하시는가?
1. 요한이 헤롯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고대로 등장하신다.
14절, 15절, 16절 읽자.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예수가 등장하고 활동한 무대는 스불론, 납달리지역, 그리고 가버나움 등이다. 이 지역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방이라 했고, 흑암에 앉은 백성이라고 했고, 사망의 땅, 그늘에 앉은 자들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납달리나 스불론은 모두 야곱의 아들들 이름이다. 그들은 가나안 땅 북쪽과 서쪽 해변 쪽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요단 저편 땅에는 갓 지파, 르우벤지파, 므낫세 반지파가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다른 나라들의 침략 루트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적들은 북쪽에서 또는 동쪽에서 쳐들어 왔다. 그러니까 납달리, 스불론, 요단 저편의 사람들은 항상 전투를 하며 살아야했고, 패배하면 다른 지파 백성들보다 일찍 포로로 잡혀가야 했었다. 나라의 노른자위요, 정치와 권세와 종교와 경제가 있는 유대와 예루살렘과는 전혀 달랐다.
역사적으로 보면 앗수르가 침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갈 때 납달리 지역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잡혀갔다. 그러니 그들을 가리켜 흑암에 앉은 백성이라고 부른 것, 사망의 땅에 앉아 있었다는 표현, 그늘에 앉아 있었다는 구절 등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2. 바로 그런 지정학적인 영향으로 빼앗긴 아픈 역사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 제자들을 부르신다. 지역의 특성상 어두움과 두려움과 안타까움과 슬픔과 아픔과 절망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들을 부르신다.
회개함으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를 소망했으며, 새하늘 새땅인 천국을 갈급해하던 사람들 중에서 제자들을 부르신다. 진정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었기에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마 5:3).
그렇게 가난한 심령을 찾으시고 부르신다.
18절이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준비된 제자로 맨 처음 베드로와 안드레가 택함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야고보와 요한도 택함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곧 그물을 버렸고(20절),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렸다(22). 죄사함의 갈급함과 구원의 사모함이 충분히 그들의 삶에 베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예수의 제자됨의 요건을 굳이 찾는다면, 회개와 천국의 갈급함과 사모함이다. 집안, 출신, 학벌, 신분, 명예, 재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과 유대가 아닌 변방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서 제자를 부르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주현절 첫째주일 아침에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어떤 자들을 제자로 택하셔서, 그 사명을 출발하시는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재확인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떠한 갈급함과 사모함으로 가지고 살아가는지 우리의 모습을 새롭게 다짐해야 한다.
3.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한 제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사역을 하신다. 23절이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따라하자. “가르치셨다. 전파하셨다. 고치셨다.”
회당마다 다니시면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이 땅 뿐만이 아닌, 하늘의 영원한 세계까지 이어지는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도 배제되고, 병에 걸렸다고 죄인 취급받고, 장애가 있다고 차별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람 대접하며, 인격을 존중하며, 예수의 신비로운 손길로 고치시고 회복시키셨다.
망가진 영과 육과 혼까지 통전적으로 건강하게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시는 성자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에게 보여주셨다.
이제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 우리도 구약의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택함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에스겔 3장 17절을 읽자.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놀라운 기록이다. 하나님께 부르심과 택함을 받은 자를 향해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을 무한 신뢰하는 말씀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이어갈 제자들을 한없이 아끼시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우리는 이런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니, 어찌해야 하겠느나? 사명 따라 가르치고 전해야 한다.
따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 모두 택함 받은 자의 몫이다.
구체적으로 네 가지 사례를 말한다.
1. 어떤 악인이 있는데, 그가 죄악 중에 죽었다. 만일 그에게 악한 길을 떠나 구원에 이르는 길을 말하지 않았다면, 그 피 값은 말하지 않은 사람의 책임이다.
2. 어떤 악인이 있는데, 그가 죄악 중에 죽었다. 만일 그에게 악한 길을 떠나 구원에 이르는 길을 말했다면, 그 피 값의 책임은 없고, 생명이 보존된다.
3. 어떤 의인이 죄를 지었는데, 악을 행하면 그 의는 모두 사라진다. 그러면 죄악 중에 죽을텐데, 그를 범죄하지 않도록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죽으면, 그 피 값은 말하지 않은 사람의 책임이다.
4. 어떤 의인이 악을 행할 때, 범죄하지 않도록 깨우쳐주면, 그 사람도 살고, 너도 산다.
바른 길로 안내하느냐? 바른 길을 알면서도 모른체 하느냐?하는 것이 상대방의 생명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매우 엄중한 말씀이다.
서신서에서는 어떠한가?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이요, 백성들을 가르치기로 명망이 높았던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이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을 싫어했다. 제자들을 잡아 가뒀다.
하지만 제자 몇 명을 가둔다고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멈추지 않는다. 제자들이 가르치고 전파하는 말씀을 듣고 믿은 자의 수가 남자만 5천이었다.
비록 학문이 없고 출신 지역도 비루했지만,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깨우쳐야 할 사명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두려움과 주저함 없이 가르치고 전하고 치유했다.
급기야 예수의 “예”자도 듣기 싫었던 종교지도자들은 더 이상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히 회자될 유명한 말을 한다.
19절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피조물에게 공감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를 구원자로 보내셨다. 그리고 간절히 거듭나기를 소망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제자들과 함께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전념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흐름에 우리 교회가 있다. 그리고 우리 신앙 공동체가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사명 따라 가르치고, 전파하고, 사랑으로 치유하는 일에 전념하자. 그래서 죄인도 살려내고, 나의 영혼도 보존하는 상급도 기대하자. 무엇보다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