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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6-2) - " 나는 주다 " / 허재규 목사 > 주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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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주현절(6-2) - " 나는 주다 " / 허재규 목사

관리자 2023-02-10 (금) 16:28 1년전 671  

분문) 마14:1-12, 출 6:2-9, 계 12:7-12 



나는 세상의 주인이다. 여기서 “나” 도 하나님이고 “주” 하나님이다. 주라는 말은 주인이다. 우두머리이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이것이 결론이다. 이게 결론인데, 세상에는 주인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에서 주는 영어로 Lord이고, 세상의 주는 lord로 표시한다. 헬라어로는 퀴리오스! 이 말은 고대 그리스 말이다. 보통 영어로는 “lord” 또는 “master”로 번역된다. 70인역 히브리 성경에서 약 700번 사용되었는데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 YHWH를 번역하는 말이다. 그리고 Koine Greek New Testment에 약 740 번 나오는데, 보통 예수를 언급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지는 답이다. 주는 곧 하나님이요 예수 그리스도다.


 


세상에는 kyrios, lord들이 많다. 그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전쟁을 일으킨다. 나폴레옹이 그랬고, 히틀러가 그랬고, 제국주의자들이 그랬고, 지금은 러시아 푸틴이 그러고 있다. 전쟁이다. 무력으로 주도권을 잡겠다는 것이고, 주인이 되겠다는 것이다. 전쟁은 비참함 그 자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은 주인이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하다. 어떤 이유를 들이댄다 해도 아니다. 분명하다. 심지어 마을에도, 교회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2022년 12월 12일 연합뉴스 기사다 “4년 전 이장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악감정을 품다가 결국엔 지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50대가 중형에 처했다.” 춘천지법 강릉지원 형사 2부는 기소된 모모 씨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하나님은, “나는 주다.” 라고 한다. YHWH Kyrios Lord는 누구인가? 전능하신 분이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Jesus looked at them and said, “With man this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마19:26) 그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여호와 곧 주로 알리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좀 위태위태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인정했다. 저 놈이 나를 저렇게 믿으니 나도 저 놈 참 믿을 만하고만, 신뢰할만 하고만! 그렇게 인정한 것이다. 저 삼 대는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으로, 여호와㈜로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을 믿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분으로, 주로 다 알려주었다. 저 삼대가 받지 않은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 저 삼대가 받지 않은 축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주로 고백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분으로 고백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로 고백한다.


 


하나님은, “나는 주다.” 라고 한다. YHWH Kyrios Lord는 무엇을 하는 분인가? 사람이 사람을 강제로 부리지 못하게 하신다. 강제는 억압이다. 부리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다. 하다 못해 볼펜이라도 쥔 사람이다. 간단히 말해서 있는 사람이다. 부림을 받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고, 권력이 없는 사람이다. 하다 못해 볼펜도 없는 사람이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이다. 쥔 게 없는 사람이다.


 


용은 리워야단 같은 상상의 동물이다. 용은 누구인가? 흔히들 사탄이라고 한다. 용은 뭔가 쥐어 보려고 힘을 좀 썼다. “그 때 하늘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을 마지막 전쟁,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용은 자기 부하들과 함께 하늘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미가엘과 미가엘의 천사들은 용과 그 부하들에게 맞서 싸웠다. 용과 그 부하들은 패하고 발 붙일 자리가 없어서 땅으로 쫓겨났다. 뭔가 쥐어 볼라 했지만 다 잃었다. 쫓겨났다. 뭔가 쥐어 볼라고 다툼이 일어나는 곳, 바로 그곳이 아마겟돈 전쟁이다. 그 전쟁을 다가올 미래로 규정하고, 지금은 괜찮아! 아직까지는 괜찮지 뭐! 그러지 말자. 러시아 푸틴이 일으킨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이다.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이게 다 아마겟돈 전쟁이다. 강릉 마을 이장 사건도 아마겟돈 전쟁이다.


 


헐뜯는 자와 함께 사는 거기, 어린 양이 피 흘려야 하는 거기! 거기가 다 아마겟돈이다. 그 큰 용이 피 흘리게 하고, 사망에 이르게 한다. 큰 용을 사탄이라고 한다. 세계를 미혹하던 자라고 한다. 피 흘리게 하는 사람이 용이다.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사람이 용이다. (농사면 농사, 변호사면 변호사, 검사면 검사 곧, 내가 종사하고 있는 그 곳) 그 세계를 미혹하는 자가 용이다. 용이 사탄이다! 뭐야 이거! 하지 말고,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 죽이는 사람인지, 피 흘리게 하는 사람인지, 다른 사람의 눈에서 피 눈물 흘리게 하는 사람인지. 이런 “땅과 바다는 화가 있다.”


 


 

요한의 목에서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다. 분봉왕이라 한다. 권력을 쥔 (도지사) 헤롯이 요한의 목을 베었다. 권력을 쥐고 있다. 권력을 더 쥐기 위해서 그랬을까? 길게 쓰자면 너무 길어지니까 헤롯이 자기 동생 빌립 아내와 어떻게 결혼했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대는 다 알고 있는 사실 일 수 있다. 율법적인 측면에서 동생의 아내에게 들어가 대를 잇게 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요한은 “그 여자를 차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했다. 그는 감옥에 갇혔다. 사문화된 법이라 반대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헤롯이 하겠다고 하는데 반대할 명분은 없다. 그런데 결혼이라 하지 않고 “차지 하는 것”이라 했다. 동물의 왕국 나레이션에, “사자 다른 수컷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암컷을 차지 했습니다.” 이런 수준이다. 뭔가 이슈가 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옳지 않다고 한 사람이 없다. 보아스는 룻과 혼인할 수 있는 우선권자를 다 찾아 보았다(룻3:12-13). 요한이 옳지 않다고 한 근거는 바로 이것이다. 흔히 헤롯왕이라고 부르는 헤롯은 헤롯1세다. 여기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안디바로 헤롯의 둘째 아들이다. 안디바오 동생으로 아켈라오도 있다. 빌립이 자연사 했다면 그의 형이 1순위다. 그런데 헤롯이 헤로디아와 결혼했다면 요한 말대로 옳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는 빌립이 자연사가 아니라면 더 큰 문제다. 결국 헤롯이 자기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가진 권력을, 힘을 불법적으로 사용하거나, 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자가 바로 “용”이다. 예수님은 그를 ‘여우’라 불렀다. “여우”가 있는 땅과 바다는 화가 있다. 믿는 사람에게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화가 닥친다.


승천하지 못할 용이다. 그가 땅에 떨어졌다. 이무기다. 옛 뱀이다(창3:1). 영어 성경은 serpent 라고 한다. 우리 성경은 그냥 뱀으로 번역한다. 이 자가 아담과 하와의 세계를 미혹했다. 망쳐놨다.지금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괜찮아! 하나님 말씀 안들어도 되내! 아담과 하와가 죽었나? 아니잖아! 쫓겨났잖아! 쫓겨나거든 교회에 가서 회개하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괜찮아! 그렇게 꼬드겨 댄다. “우리의 동료들은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말씀을 힘입어서 그 악마를 이겨냈다.”(계12:11)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이김은 화가 닥칠 수 없는 축복이다. 은혜다. 구원이다.


 


주는 구원하는 분이다. 구원은 그저 그냥 쉽게 거저 얻거나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요한도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주님은 피 흘려서, 몸 바쳐서 종살이에서 구원했다. 팔을 펴서 구원하였다. 강제노동에서 구원하였다. 이집트 왕, 용, 헤롯은 주가 아니다. 그들은 구원하는 자가 아니다. 죽이는 자요, 망치는 자다. 구원하시는 분이 주다. 요한을 장사 지낸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 가서 알려드렸다. 그들은 왜 예수를 찾아갔는가? 그들은 왜 알려드렸는가? 내가 찾아낸 말은 구원이다. “이런 세상이니 구원하여 주십시오.” 예수는 이 세상을 구원하셨다. 예수는 주가 되셨다. 그래서 주님이 진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다. 사형 틀이 아니다.


 


 

십자가는 떼어 놓기도 하고 붙여 놓기도 한다.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에게서 떼어놓기도 하고 붙여 놓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과 붙여 놓는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공동 상속자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 십자가는 주님과 떼어 놓는다. 십자가는 어디에나 있다. 출애굽 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십자가의 보혈로, 어린 양의 피로 악마를 이겨낼 때, 십자가는 “나”를 주님과 붙여 놓고 악마와 떼어 놓는다. 내가 악마의 자리에 있으면 십자가는 “나”를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강제노동을 떼어 놓고, 악마를 홍해에 수장시키면서 하나님과 붙여 놓는 십자가를 타고 홍해를 건넜다, 구원이다. 은혜다.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가?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으면 구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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