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하 24:18-25, 행 4:32-5:11, 눅 14:25-35
1) 봄맞이
3월 첫 주일 주현절 여덟째 주일로 금년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이 성회수요일이고, 다음 주일이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이제 새봄을 맞아 우리 모두 겨우내 움츠렸던 것을 떨치고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2월 3일에 뜬금없이 선포된 비상계엄 사태로 아직도 혼란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만 며칠 내로 모든 것이 정리되어 새로운 내일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정의를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좌우로 양분된 우리 사회를 하루속히 통합하여 안정된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2025년 봄, 역사의 한 변곡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더욱 나라를 위해서 힘써 기도하는 계절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값없이는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구약 본문 사무엘하 24장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인구조사를 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고 이를 속죄하기 위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사서 번제를 드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군사력 강화와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자신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던 부하들까지도 당혹스럽게 한 일이었습니다. 군사령관 요압이 나서서 만류했음에도 다윗은 이를 강행했습니다. 이번 윤석열 12. 3 내란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무려 9개월에 걸쳐 인구조사를 마쳤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칼을 들고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자가 남북 도합 130만 명이었습니다.(삼하 24:9) 다윗은 인구조사를 마치고 그제서야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 왕국이 튼튼해졌는데 다윗은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생각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갓 선지자를 통해서 7년 기근이나, 석 달 동안 원수들에게 추격당하는 일이나, 3일 동안의 전염병 중 이 세 가지 벌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빠른 시간에 받을 벌인 3일 간의 전염병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윗의 선택으로 전염병에 감염돼 죽은 사람이 7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실수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다윗은 그 실수는 자신의 범죄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잘못이 없는 백성들에게는 벌을 주지 말고 자기와 자기 집안에만 벌을 내려달라고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갓 선지자가 다윗에게 여부스족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올라가 그곳을 사서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그 말 대로 번제를 드리기 위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곧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멀리서 다윗왕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아라우나가 달려와 땅에 엎드리며 다윗의 이야기를 듣고 타작마당을 거저 드리고, 번제물로 소와 땔 나무까지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호의(好意)를 사양하며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겠다.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하고 은 50 세겔을 지불하여 타작마당과 소를 사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우리 옛말에 “남의 떡으로 제사드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희생이 없이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희생 제사를 드리며 자기는 아라우나의 것으로 제사하지 않고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한 희생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드려서 예배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재앙을 멈추게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다윗이 희생번제를 드린 그곳이 훗날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는 곳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3) 바나바와 아나니아
서신서 말씀은 예루살렘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 충만하여 아름다운 나눔의 공동체를 이룬 사실을 보여주는 가운데 일어난 한 일탈(逸脫) 사례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성령충만함을 받고 변화된 여러 가지 중의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들의 소유물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어, 자기들의 재산을 팔아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성령충만하게 되니까 자기 소유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모두들 자기 소유에 집착하고 살아가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소유욕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기들에게 맡겨주신 것들을 활용하여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중에 구브로 출생인 바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드려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어 그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자기 재산을 팔아 다른 사람들처럼 하려고 했는데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중 일부를 떼어놓고 일부를 사도들 앞에 내어놓으며 땅을 판 값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를 알고 아나니아에게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한 사실을 책망했는데 이를 듣고 아니니아가 실신해서 죽고, 곧 이어 이를 알지 못하고 들어와 그 남편과 똑같이 거짓말을 한 그 아내 삽비라까지 함께 죽어 초대교회에 큰 경종을 울려주었습니다.
이 사례는 모두 자기희생을 하는 교회공동체를 근본적으로 흐려놓은 일탈 사례로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흉내만 내는 잘못된 신앙 행태의 결말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는 단순한 헌금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근본자세 문제입니다. 먼저 나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신앙을 깨닫고 우리도 그 뒤를 따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4) 제자의 길
복음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참된 ‘제자도(Dicipleship)’를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과 능력을 보고 혹(惑)하여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고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어설프게 주님을 따른다고 해놓고 후에 뒤돌아설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시며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 자기희생이 따르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철저하게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예수님을 따를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은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심으로 철저한 자기희생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만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이 말씀 그대로 자신을 온전히 십자가에 던져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힘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희생을 요청하시고 자신은 편안한 삶을 누리신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그 말씀을 실행하셔서 그 말씀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문제는 자기희생(self-sacrifice)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자기희생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그를 믿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자기희생이 없이 흉내만 내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이를 모르고 예수 믿으면 부자되고, 출세한다는 얄팍한 신앙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에서 나치에 대항하여 자신의 목숨을 던진 순교자 본회퍼 목사님은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로 구분했습니다. 댓가를 치르지 않은 신앙 곧 자기희생이 없는 신앙을 ‘값싼 은혜’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몸을 던져 헌신하는 신앙을 ‘값비싼 은혜’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롬 12:1) 몸을 드리라는 말씀은 우리 삶 전부를 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적당히 믿는 흉내만 내는 아나니와 삽비라 같은 정도로는 우리가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몸을 던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5) 맺음
한국 기독교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 부끄럽습니다. 적당히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여 흉내만 내고 있는 자신이 많이 부끄럽습니다. 십자가를 모르고 부귀영화를 추구하면서도 예수 믿는다고 말하고 다니는 제가 많이 부끄럽습니다. 십자가를 교회당 꼭대기 첨탑(尖塔)에는 세워놓았지만 정작 우리 가슴 속에서는 외면하고 몸을 사리고 누군가가 몸을 던지기를 바라며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누구를 탓할 것 없이 바로 내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온갖 조롱을 당하며 ‘엘리엘리 사박다니’를 외치고 계십니다.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인 이 교회를 위해 누가 몸을 던지겠습니까?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 “나를 따라 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