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상 1:19~28, 눅 2:41~52, 히 2:9~18
오늘은 성탄 후 첫째주일이면서 2018년도를 감사함으로 보내고 새해를 믿음으로 준비하는 송년주일입니다. 저는 오늘 한해 어떻게 설교를 했는가 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돌아보는 고백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비 오는 늦가을 아침, 이를 데 없이 고요하다.
우산 들고 들녘을 걸으며 예수기도를 드렸다.
올해도 변함없이 욕심 사나운 기도를 맹렬히 드렸음을 부끄러워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한 걸음 한 걸음 예수 기도를 드리며 추수 끝난 들녘을 걸었다.
많이 거두어 기뻐하는 사람도, 적게 거두어 속이 상한 사람도,
값이 올라서 좋아하는 사람도, 소출은 많았으나 값이 떨어져 실망한 사람도,
농기계에 다쳐서 아파하는 사람도, 건강하게 추수를 마친 사람도,
농사는 하늘이 짓는 것이라고. 말을 할 때 몸에 배인 겸손함을 베운다.
낮아졌다고 생각하는 내 어리석은 교만을 깨우치고 질책하며 더욱 낮아지라는 당신의 뜻을 배운다. 올해도 당신의 긍휼히 여김으로 여기까지 온 것임을....
우리는 성숙 없는 성장 때문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목격하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성장이 멈추었다 다같이 춤을 추자”
저는 어디선가 이 문장을 읽고 박수를 쳤습니다. 한국교회는 성장이 멈춘 정도가 아니라 감소한다고 큰 위기가 왔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교회뿐이겠습니까? 사회 각 분야들도 지표를 들먹이면서 성장이 멈추거나 감소했다고 비판의 날을 세우느라 소란합니다.
그런 소리들 속에 “성장이 멈추었다 춤을 추자!”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말입니까?
우리 다같이 멈추어 서서,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성숙해지자!!
그래서 저는 오늘 세 본문의 말씀에서 “성숙이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되돌아보면서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새해에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희망을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첫째,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사는 한나를 통해 배우는 성숙(삼상 1:19-28)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삼상1:19하)
성경에는 한나외에도 아들을 낳지 못하여 하나님께 간구한 여인들이 있습니다. 이삭을 낳기까지의 사라(창15:1-21:7). 요셉과 베냐민을 낳기까지의 라헬(창 30:1-24), 삼손을 낳기까지의 마노아의 아내(삿13:2-25), 그리고 세례 요한을 낳기까지의 엘리사벳(눅1:5-58)이 있습니다. 기다림과 기도가운데 아이를 얻은 그들의 기쁨은 무척이나 컸습니다. 그만큼 신앙의 성숙함도 있었습니다. 출생한 아이들이 하나님의 선물이었다는 믿음의 고백과 후일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기도와 기다림은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귀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생각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카르'는 '표시하다','기억하다'란 뜻으로서, 항상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다(창 8:1, 느 5:19, 시 25:7)는 뜻입니다. 가난하고 슬픈 마음을 가진 사람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그 간절함을 돌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고통과 눈물의 근원이 되었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했던 일들에 대해 소홀함이 없이 신실하게 이행을 해나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이의 이름에 담습니다.
'사무엘'이란 이름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란 뜻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의 출생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아시고 호소를 들으셨다는 믿음을 그 이름에 새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젖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삼상1:22하)는 결심에 부끄럽지 않게 아이를 양육하는데 사랑과 정성을 다합니다. 엘리 제사장에게 사무엘을 데리고 가서 맡길 때에도 하나님 앞에 모든 절차와 의식을 다 정성껏 최선을 다해서 행합니다.
오랜 기간 동안 무자(無子)로 인해 당한 온갖 고통과 수모를 생각하면, 어렵게 얻은 자식을 여호와의 전에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나는 사무엘의 출생이 전적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임을 믿었습니다. 그 아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서원을 변치 않고 그 아들을 여호와께 바쳤습니다. 이러한 한나의 신앙을 귀하게 보신 하나님께서 한나의 정성과 신앙을 기억하시고, 그녀에게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해 주셨습니다(2:21).
한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한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신실함에 성숙해가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예수님을 통해 배우는 성숙(눅 2:41~52)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는 것”(엡4:13하)입니다. 누가복음 2:41-52은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성장과 자기 인식에 대해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이 자라는 것 뿐 아니라 그의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과 인격의 성숙까지 보여 줍니다. 먼저 우리는 누가복음 2:52절에서 인간의 건강한 성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절)
우리도 그러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목표를 생각해볼 수 있는 말씀이 아닐까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몸이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고, 우리 자녀들이 그렇게 성장하도록 기도하고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그 보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자기 인식의 성숙입니다. 12살 되던 해에 성전에서 일어난 일속에서 예수님은 자기 인식을 분명히 깨닫고 선언을 합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찾던 마리아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네 아버지와 내가”근심하여 너를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소년 예수는 “내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답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예수님이 있어야 할 곳과 관심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그의 아버지의 집에”(49절) 있어야 한다는 것은 참된 의미의 아버지의 집으로의 개혁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누가는 예수가 성전으로 돌아와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하고 아버지의 집을 아버지의 집으로 바로 세웁니다(19:46). 예수님의 아버지의 집은 예수님의 집이기도 하고, 그의 관심이 머무는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성전과 지도자들은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집을 권력과 금력의 온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버리고 떠나시기보다 진정한 아버지의 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을 한가족으로 초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되돌아봅니다.
우리의 교회가 건강한 아버지의 집인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가족으로 우리는 모이는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 충실하고 있는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숙해지고, 아버지의 집으로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성숙한 교회를 세워가는 데 새해에는 더욱 힘을 모읍시다.
세상가운데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자(히 2:9~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브리서 2:18)
히브리서 2:9-18은 예수님이 우리와 완전히 인성이 같으셨다는 사실을 증거해줍니다(14절). 주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고”(9절), 마귀의 권세를 멸하시며(14절),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셨습니다”(15절). 예수님은 범사에 우리처럼 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기”(17절)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겪으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돕고 격려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되는 때에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도우시는 자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타인의 고통과 외로움에 공감하므로 도우라고 하십니다.
타인의 외로움과 고통에 공감하므로 위로하는 일에 우리가 더욱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2018년도를 보내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사찬송을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성찰하여 새해에는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 됩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교회와 세상의 희망입니다. 바로 당신이 그 희망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