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상 1:19~28, 눅 2:41~52, 히 2:9~18,
어릴적부터 교회를 다닌 분들이 주일학교 시절에 불러 보았을 만한 어린이 성탄 찬송이 있습니다. <반짝반짝 별 비치는 그 어느 적막한 날 밤에, 귀여이 귀여이 들리는 저 어린 아기 울음소리, 이 세상의 모든 죄짐을 그 등에 다 홀로 지실, 오 만민의 메시야이시니 그 아기 이름 예수시라>
도시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사라지기 시작한 ‘새벽송’의 기억과, 이제는 거리두기와 비대면이 일상화되어 ‘성탄 전야의 밤’도 중단되어서인지 가만히 읖조려보는 가물가물한 찬송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짐을 그 등에 다 홀로 지실” 우리들 어머니의 기도가 그러했고, 중고등부 시절 여름 수련회의 밤이 그러했듯, 간절하고도 뜨겁게 매달리던 애절한 고백은 저마다의 결단을 낳았습니다.
오늘 송년 주일의 세 본문은, 날이면 날마다 시도 때도 없이 교회로 모이던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교통하던 날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1. 성전, 목놓아 울 수 있는 곳 (삼상 1:19~28)
때때로 우리가 겪는 ‘결핍’은 자신을 되돌아 보게도 하며, 내가 처한 현실을 직관하게도 하며, 소망을 키우게 하는 ‘인생 백신’의 작용을 합니다. 예방주사는 면역이 생기도록 약한 병균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겪고 있는 힘든 일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실패나 좌절도 일종의 예방주사입니다. 앞으로 더 힘든 일이 닥칠 때 이겨내기 위해서 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은혜 입기를 간절히 원했을 때(19절) 들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아들의 이름을 ‘셰무엘’(아마도 ‘하나님에 대하여 들음’을 의미)로 지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그녀의 태도가 조금도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와 다른 면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절박한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하면 다른 얼굴을 취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앙입니다.
그녀의 아들 곧 이스라엘의 첫 사사, 사무엘은 젓을 막 뗀 직후부터 성전에 맡겨졌습니다(24절). 어머니 한나의 제사(25절)와 경배(28절)에서 나타나듯 그녀는 한 순간도 과거의 자신의 처지와 그날의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26절).
가난한 우리들의 어머니에게 교회만큼 울 만한 곳은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하소연하고 넋두리하고 마음을 다 쏟아놓는 교회는 어머니의 울음 터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심리학이 점령해 버렸고 목회는 경역학으로 대체됐습니다. 아테네의 아고라와 같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광장이 돼버렸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고 엎드려 우는 곳이 아니라 값싼 감동과 자랑이 흥청이는 광장이 돼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서 엎드리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2. 성전에 나타난 어린 예수 (눅 2:41~52)
복음서 본문은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일행 속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린 가족 이야기라기보다는, 그토록 바라고 기다린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처음으로 성전에 나타난 사건을 다룬다고 하겠습니다. 어린 예수의 성전 등장은 그 가족에게는 아이를 잃은 놀라운 사건이었으나 성전의 랍비들에게는 그 지혜와 대답에 놀라는 사태였습니다(47절). 이제 갓 10살을 넘겨 처음 예루살렘을 순례한 아이가, 선생들에 둘러 싸여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모습은 그분의 메시아되심을 증거합니다.
또한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는’(49절) 이들은, 비단 본문 속의 가족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그 부모가 이해하지 못했고, 우리도 이해하지 못한 ‘아버지 집에 거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현존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된 우리에게 누가는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50절)고 단정합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결속의 부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이 있어야 할 곳,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는 곳, 곧 우리의 실존이 현존하시는 하나님과의 교통함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는 곳은 어디입니까?
3. 죽어야 사는 (히 2:9~18)
성도는 죽어야 삽니다(9절). 일그러지고 분열된 세상이 계속되기를 거부하고,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눈앞의 결과에 조급하여 불안과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으며, 일궈 낸 희망의 불빛을 간직하는 성도는 죽어야 삽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핍박 받으심과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그저 연약함의 한계를 지닌 존재로 인식한 이유, 어디에 있을까요?
죄의 종노릇에서 변화되고 행동하는, 거룩하게 되는 것(11절)은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승리자, 성공하는 자, 능력 있는 자를 꿈꾸며 바라고 소원합니다. 종교인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 받는 이야기, 매사에 형통하여 잘 되는 이야기, 그래서 힘이 나는 이야기, 그래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즐겨 들으며 그렇게 되기를 염원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어떠한 위기도 유발하지 않는 교회,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복음, 누구도 성내지 않게 하는 말씀, 사회의 실제하는 죄악을 건드리지 않고 선포되는 설교, 매우 점잖고, 누구도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경건한 배려, 바로 이것이 많은 이들이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종교인들은 이 시대와 이 사회에 전혀 ‘위협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잘됨과 좋은 것을 말하지만, 믿는 자의 심장과 용기는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종노릇하는 이들과 시험 받은 자들을 능히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18절). 잘되면 복이고, 잘살면 은혜라는 공식이 선포의 말씀을 대신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울음 터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키고, 다른 이의 분노를 이해하고, 연대하게 하는 거룩한 힘이요, 은총인줄로 믿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변합니다. 어떤이는 예쁘게 변하고 어떤이는 추하게 변하고. 또 어떤이는 더럽게 변하곤 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2121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나는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확인하시고, 새해에도 그와 같은 복음의 일꾼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