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3:16-21; 미 5:2-5; 요일 4:7-12
선물
성탄절입니다. 성탄의 은총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지요. 우리는 이 말씀을 오늘 성탄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려고 합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온 누리에, 우리에게 아주 귀한 선물을 주신 날입니다. 사람들은 선물을 좋아하지요. 그런데 무엇보다 그 선물을 누구에게 받았는지가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사람에게 선물을 받았다고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받은 선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선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선물을 주셨습니까? 아들입니다. 그것도 외아들, 독생자입니다. 하나님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자신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전부를 주셨습니다.
독생자
그런데 ‘외아들’이란 무엇일까요? ‘독생자’란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는 자손이 귀해서 아들 하나밖에 두지 못했다는 말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여기 ‘독생자’라는 말, 그리스 말로 ‘모노게네스’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말입니다. 이 ‘독생자’라는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요한복음을 기록하던 시대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의 시대는 이른바 그리스-로마 시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리스-로마 시대는 수많은 신들의 시대입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허다한 신들이 나오지요. 남자 신들과 여자 신들이 하늘에서 삽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남녀 신들은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기도 하고, 바람을 피우기도 하지요. 심지어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남자 신들이 세상의 미녀들과 만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신들의 아들들과 신의 딸들이 태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고, 또 수많은 신의 아들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신의 아들’이란 신화 바깥의 세상에서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통치자, 왕입니다. 신화시대의 지배자들은 자신의 권력의 기반을 하늘에 두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땅 위에 사는 어느 누구도 그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왕이 되는 것은 곧 신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 신화화되었지요.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 로마의 통치자는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누가복음) 그런데 이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은 그의 본래 이름이 아닙니다. 그의 인간적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였지요. 자신의 최대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물리치고 제국의 유일한 지배자가 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우구스투스’라고 바꾸었습니다. 그는 존귀한 자, 세상의 주인(주님, 큐리오스), 신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수많은 지배자들이 황제가 되어, 신의 아들이 되어, 절대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세상 곳곳에 그 신의 아들을 위한 ‘제전’이 세워지고, 황제는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의 아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살아 있는데, 예수님이 ‘독생자’라는 말은 무슨 말이 되겠습니까?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니라는 말 아닙니까? 예수만이 참 신의 아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라는 말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이 신앙은 ‘황제숭배’를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성탄의 말씀은, 무엇보다 모든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폭력과 전쟁으로 군림하는 모든 제국의 지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탐욕과 돈을 숭상하는 모든 맘몬 숭배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거짓 신들의 허위를 폭로하고, 유일한 아들,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와 함께 모든 폭력과 차별을 거부하고, 맘몬의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다만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런데 하나님은 왜 독생자를 주셨을까요?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세상에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왜 선물을 줄까요? 뭔가 더 큰 것을 얻으려고 줄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라고 하지요. 선물은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줍니다. 요한복음도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까닭은 바로 ‘사랑’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사랑하셨습니까? ‘세상’입니다. 세상, 코스모스입니다.
요한복음은 특히 ‘세상’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잘 쓰지 않고 마태복음이 9번 정도 쓰는데, 요한복음은 무려 79번이나 사용합니다. 압도적이지요. 요한복음이 ‘세상’이라는 말에 익숙하고, 또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은 요한에게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시대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때 사람들에게 ‘세상’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종교적으로 ‘세상’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당시의 영지주의 사고에 따르면, ‘세상’은 의미 없고 무가치한 것이었습니다. 진짜는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것은 하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영원하지만 땅은 가변적이고 유한한 것이다, 그러니 땅에, 세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세상은 인간에게도 사랑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한 생각은 종교적으로도 뒷받침되고 강화되었습니다. 우선 세상은 최고신의 작품이 아닙니다. 이토록 불합리하고, 이토록 불완전하고, 이토록 허무한 세상은, 도무지, 도저히, 완벽한 신이 만든 것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그 처음부터 불완전하고 모자라는 신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태생적으로, 숙명적으로 세상은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란 세상이라는 감옥을 부수고 하늘로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부정하고 미워하고 버려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생각은 나라를 잃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지 못해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깊은 공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세상이란 차라리 잊어버려야 속 편할 것이 되었고, 돌아보지 말아야 할 소돔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헛되고 괴로운 희망을 품기보다는 차라리 미워해야 할 곳이 되었습니다. 자폐와 체념이 자학과 혐오가 숙명처럼 생명을 파먹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마저 세상을 포기하셨다는 완벽한 패배주의가 미세먼지처럼 폐부에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처럼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버리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이토록 사랑하신다고,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고, 요한은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포기하고 버리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생자를, 자기 전부를 버리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성탄의 크고 놀라운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누가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을 누가 포기한다는 말입니까?
베들레헴
그런데 이토록 크고 놀라운 성탄의 선물은 어디로 가야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디로 가야 독생자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이니까, 당연히 성전으로 가야 할까요?
일찍이 예언자 미가는 지극히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희망의 장소로, 메시아의 장소로 지목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어떤 땅입니까? 베들레헴은 무엇보다 다윗의 고향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는 메시아는 다윗의 고향에 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다윗의 고향에 다윗의 후손 메시아가 온다, 뭐 수긍이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의 고향에 메시아가 온다는 이것은 그저 또 하나의 지역주의를 말하는 것일까요?
미가는 베들레헴을 유다의 여러 족속 중에 작은 족속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족속’입니다. 작은 땅, 보잘것없는 장소입니다. 사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10킬로미터에 있는 작은 고을입니다. 지금은 팔레스틴에 속한 지역이지요. 역사적으로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계속 수많은 침탈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높은 지역에 있는 성채 도시이므로, 예루살렘을 쳐들어온 제국의 군대는 성을 둘러싸고 주변에 주둔했습니다. 그때마다 베들레헴은 침략군의 온갖 폭력과 침탈에 시달려야 했지요. 다윗 때에도 블레셋이 성채를 포위하고 베들레헴에 주둔했던 적이 있습니다. 성채에 물이 떨어졌을 때에 다윗의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에 가서 물을 길어오지요. 계속되는 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의 침탈 때에도 예루살렘 주변 마을들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에 그 머물 곳이 없어서 ‘구유’에 뉘였네요. ‘구유’는 또 무엇일까요? 가축의 먹이를 주는 죽통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주로 양을 길렀습니다. 양은 집이 아니라 바깥 들판에서 길렀으니까, 구유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기를 뉘일 정도면 좀 큰 구유일 것입니다. 그 정도라면, 말구유일 텐데, 웬 말일까요? 어쩌면 예수님이 누우셨던 구유는 저 제국의 기마대가 주둔할 때에 썼던 것이 아닐까요? 가장 깊고 오랜 역사의 고통이 있는 곳, 가장 절망이 깊이 배인 장소, 그곳이 성탄의 자리가 아닐까요? 베들레헴 말구유, 하나님의 선물이, 그 크고 놀라운 은총이 내린 장소입니다. 저 그리스 로마의 장엄한 신전, 저 예루살렘의 웅장한 성전이 아닙니다. 가장 속된 곳, 구유는, 성탄으로 인해 가장 거룩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을,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을,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사랑의 선물입니다. 믿음의 선물입니다. 희망의 선물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성탄의 은총이 온 누리에, 우리 모두에게,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