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상 1:19-28; 히 2:9-18; 눅 2:41-52 )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며칠 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또 축하하는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2024년 마지막 주일, 송년주일입니다.
1. 예수의 어린 시절
복음서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나사렛 예수의 생애에 대한 내용은 탄생에 관한 이야기와 ‘공생애’라고 불리우는 십자가 수난까지의 3년 동안이 대부분입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복음서에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 ‘예수는 인도, 티벳, 앗시리아, 페르샤, 그리스, 이집트, 영국에 갔었다’는 전설들도 생겨났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Unknown_years_of_Jesus.
심지어 예수는 21세의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처음 일본에 와서 신학을 공부했고 모로코를 거쳐 유대로 돌아갔으며, 나중에 십자가에 달릴 때 바꿔치기하고 살아서 4년 걸려 ‘일본에 갔었다’는 주장까지 있었습니다만 다들 분명한 근거가 없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https://www.smithsonianmag.com/history/the-little-known-legend-of-jesus-in-japan-165354242/.
복음서 본문에는 그 시기에 관한 예외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서 2:40에는 “아기는 자라며 튼튼해지고, 지혜로 가득 차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이 성탄절이었는데, 오늘은 12세 소년 예수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2.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율법서에 따르면 모든 남자는 한 해에 세 번, 무교절(유월절)과 칠칠절(오순절)과 초막절(장막절)에 예물을 가지고 성전에 나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신 16:16-17) 예수의 부모도 해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세 절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눅 2:41-42)
그런데 절기를 마치고 일행이 돌아와서 보니 12세 소년 예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두 차례 아이를 잃어버려 본 기억이 있는데, 부모가 얼마나 애를 태우며 아이를 찾고 있을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정보통신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쉽게 찾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보면, 예수의 부모는 다시 하루를 걸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사흘간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그 소년을 찾아냈습니다. 그동안 성전에 있었던 소년 예수는 랍비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질문을 하기도 했으며, 사람들이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눅 2:43-47)
어머니 마리아가 소년 예수에게 말합니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눅 2:48) 그런데 이 말에 대한 소년 예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49)
3. 하나님의 아이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비단 그 소년 예수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소유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들은 ‘내 아이들’이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부모들은 건전한 믿음으로 그 아이들을 양육하는 책임을 맡은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아이들을 마구 대하거나, 자신들의 요구를 대신 충족시켜 주는 존재인 것처럼 취급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심지어 무책임의 극단이라 할 ‘동반자살’이라는 사건들을 접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을 자기 소유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입양했거나 또는 직접 낳았거나 상관없이, 아이들은 결코 부모나 어른들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이들입니다.
4. 유엔 아동권리협약
1989년 국제연합은 아동권리협약(UN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을 채택합니다. http://www.korea1391.go.kr/new/page/agreement.php.
이를 통해 만 18세 미만의 모든 사람들이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고유의 존엄성 및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권리는 생존권, 보호권, 발달권, 참여권 등 크게 네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로, 생존권은 기본적인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권리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살 권리 등을 포함합니다. 둘째로, 보호권은 아동에게 유해한 것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로, 차별이나 학대, 폭력, 노동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입니다. 셋째로, 발달권은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데 필요한 권리이며, 교육받을 권리,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 등이 포함됩니다. 넷째로, 참여권은 나라와 지역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권리로, 단체에 가입하거나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정부 등의 공공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등이 들어갈 것입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54999&cid=58584&categoryId=58683.
더불어 이런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해 가족과 사회, 또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책무들이 그 내용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당사국은 이 협약의 원칙과 규정을 적절하고 적극적인 수단을 통하여 성인과 아동 모두에게 널리 알릴 의무를 진다”(제42조)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아동들이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사회 교과과정에서 배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아동권리협약과 함께, 우리나라에는 아동 관련 법률로 아봉복지법, 아동의 빈곤예방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 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실종아동등의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아동수당법,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장애아동 복지지원법, 헤이그 국제아동탈취협약 이행에 관한 법률 등도 있습니다.
5. 하나님께 바침
사무엘서는 사무엘의 출생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삼상 1장에는 그의 부모 엘가나와 한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브닌나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아들을 포함하여 아들 딸이 있었지만, 첫 아내인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어서 그의 ‘적수;였던 브닌나로부터 괴롭힘과 업신여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삼상 1:2-6) 마음에 괴로움이 가득한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 것도 먹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그랬던 한나가 서원기도를 드리고 응답을 받아 아기를 낳았습니다. 주님께 구하여 얻은 아들이어서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는데,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귀하게 얻은 아이지만 한나는 이 사무엘을 결코 자기 소유물처럼 취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서원했던대로 하나님께 바쳤던 것입니다.(삼상 1:20-28)
6. 예수의 형제자매
오늘 사도서간문인 히브리서 2장을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데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께 속”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시고, 몸소 고난을 당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 인류 모두가 한 형제자매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신 이 지구상의 모든 아이들이 바로 예수께서 형제자매로 부르시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성서 말씀은 인권선언이요, 또 아동권리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서는 모든 아이들이 하나님의 아이들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부모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잘 양육받고, 보호받고, 발달하며, 존중받으며 자라도록 함께 힘쓸 책임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예수께서 형제자매로 부르신 아동들의 권리에 대해 잘 인식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7. 그리스도인의 책임
나아가 아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12월 3일, 군경을 동원하여 귀중한 인명을 살상하면서라도 자신의 권좌를 유지 강화하고자 내란을 획책하고 불법 계엄을 선포했던 일은 우리 역사 속에서 아니 세계사 속에서 영원토록 치욕으로 기록될 일입니다.
그런 악한 기운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며 사회대개혁을 이룩하는 일에 우리의 기도를 모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무고한 생명을 살상하는 일들을 규탄하며 조속히 평화를 되찾도록 함께 손모아 주님께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