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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3-1) - " 주님은 나의 희망 " / 김은승 목사 >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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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대림절(3-1) - " 주님은 나의 희망 " / 김은승 목사

관리자 2018-12-12 (수) 09:14 5년전 2321  

본문) 예레미야 애가 3:19-33, 히브리서 6:9-20, 누가복음 1:68-79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옛날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들이 우리 사회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출산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결혼하면 아기를 가지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계획에 따라 조절을 하려고 합니다. 당장 자신들이 살아가는 문제가 버거워서 엄두를 못 내기도 합니다. 모든 조건이 되어도 폭발적인 인류의 증가 문제를 고민하면서 일부러 입양을 선택한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생명의 탄생이 가지는 신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어린 생명이 전해주는 무한한 생명 에너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기를 안아 본 사람은 이 기운을 잘 압니다.


생일 축하 노래에 왜 태어났니라는 가사를 붙여 장난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 왜 태어났니,’ ‘이 험한 세상에 왜 태어났니?’ 하면서 낄낄댑니다. 아직 세상을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에 부정적 시각이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패배의식과 피해의식 속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이들의 노래입니다. 현실 세계의 혹독함이 원망스러울지라도 우리는 이런 노래를 불러서는 안됩니다. 탄생이라는 기적 자체가 우리에게는 살아갈  이유입니다. 탄생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대림절 기간이 의미 있는 것은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 안에서도 생명의 기운이 배태되는 시간이기 때문에 더욱 소중합니다. 자기 몸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상징입니다. 희망이고 구원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시는 것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생명을 채워주시려 하늘에서부터 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주님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꺼지지 않을 생명의 기운은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계절에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랑의 뜨거운 열기로 여러분 심령의 모든 차가운 것들이 물러가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운명은 참 기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예언자이면서도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거짓예언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뺨을 맞기도 했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바벨론을 얕잡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와 연합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시드기야 왕 십일 년에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시드기야 임금의 아들이 목전에서 죽임을 당했고, 시드기야 왕은 눈이 뽑혀서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간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예언했었습니다. 비록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지만 그곳에 가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예언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 피신했던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남아있던 예레미야를 붙잡아서는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바벨론이 또 쳐들어 올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실은 남은 사람들이 피신처로 생각했던 이집트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집트마저 베벨론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레미야가 기뻐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온 민족이 포로가 되고 이리저리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된 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황폐해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슬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애가에서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한다하고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형편이 마치 쑥과 담즙을 먹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지독하게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이니 달리 원망할 도리도 없습니다. 지난 날의 평화가 그리울 뿐 참으로 눈물이 마를 새 없는 참담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 때 예레미야가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그 동안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언하셨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했습니다. 왜 기꺼이 바벨론으로 가라 하셨고, 또 거기서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하셨을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음성을 거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뜻은 어디에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다.’


예레미야는 고통스러운 현실 가운데에서 오히려 희망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쑥과 쓸개즙 같은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예레미야는 아침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새롭다(렘애 3:23)고 했습니다. 끝내 구원하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경에 빠져 있는 부분이 개역성경에는 있습니다. 22절을 다시 읽어드리면,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직 살아있다고 하는 것, 그래서 아침에 눈을 떠 태양을 마주할 수 있다고 하는 것에서 예레미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자비로우심을 생각했습니다. 견딜 힘을 주시는 하나님, 그래서 마침내 구원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한 없는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다가 불현듯 소리를 칩니다. ‘주님의 나의 희망! 주님께서는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하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이와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시 촉구했습니다. ‘지나온 길을 돌이켜 살펴보고, 우리 모두 주님께로 돌아가자(40).’ 회개하고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에서 다른 도피의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살 길이라는 것을 예레미야는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에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고,’ ‘때리려는 사람에게 빰을 대주고, 욕을 하거든 기꺼이 들어주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나 버려 두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50여년이 지나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재건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과 희망은 다시 한 번 말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끝까지 희망을 붙잡게 한 예레미야의 고백이 오늘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헤롯 임금 시대에 제사장들 가운데 사가랴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이도 많은데,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가 성전에서 직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사가랴가 믿지 못했습니다. 사가랴는 그만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믿음이 없다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 중에 사는 것입니다.


사가랴가 살던 시대도 무척 힘든 시기였습니다. 헤롯대왕은 난폭했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았습니다.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였고, 세금을 내기는 버거웠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아침을 열어주시듯,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이 아기는 주님 오시기를 예비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누가복음 1:17절 말씀에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의인의 지혜의 길로 돌아서게할 것이라 했습니다. 아침이 되어도 여전히 절망하던 백성들, 또 미래의 희망이 없기에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기뻐하지도 않던 백성들을 돌아서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곧 오실 그리스도 주님을 백성들이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아기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요한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기의 탄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려 하셨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자 사가랴는 감동해서 노래했습니다.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 될 것이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예레미야가 곰곰이 생각하고는 아직 살아있음에 희망 있음을 노래했다 한다면, 사가랴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그 모습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았습니다. 구원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끝이 없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도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메시야이신데, 무언가 강력하고 거창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생명입니다. 스스로를 방어할 힘도 없는 존재로서 그저 생명 그 자체로 존재가치를 주장하는 여린 숨소리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인쳐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충만하게 내재되어 있습니다. 내가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해 줍니다. 한없이 이어질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희망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갈 힘을 줍니다.


히브리서의 기자가 오늘 말씀의 결론을 내려줍니다.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6:19).” 수 많은 가치들 속에서 방향을 잃은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생명력이 충전될 사이도 없이 자기 생명력을 소진하며 삽니다. 사랑을 상실한 사회이고 참으로 피로한 사회입니다. 다시 해가 떠오르는 것은 고난의 시작이요,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저주합니다. 그런 영혼은 마치 닻이 끊어져 한 없이 떠도는 배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한이 없어서 마침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사람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전한 항구에 닻을 내리고, 소망 가운데 내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아침이 새롭고, 날마다 생명력 충일한 인생이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소망을 인하여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휘장은 성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함께 거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서, 그렇게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게 됩니다. 아기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알게 하시는 대림절 이 생명 충만한 계절에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한 번 더 힘을 내고, 한 번 더 하나님을 붙잡는 소망의 계절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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