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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대림절(4-1) - "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들으라 " / 최병학 목사

관리자 2020-12-17 (목) 12:14 4년전 1037  

본문) 사 40:1-11 빌 4:4-7 눅 1:57-66


1. 만남과 화해의 촛불을 밝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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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절 넷째 주, 만남과 화해의 촛불>


대림절 넷째주일입니다. 첫째 주부터 우리는 촛불을 하나씩 켰습니다.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 ‘회개와 평화’의 촛불, 그리고 ‘사랑과 나눔’의 촛불입니다. 오늘 넷째주일은 ‘만남과 화해’의 촛불을 밝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죄 많은 우리 인생들을 만나주셨고, 이 땅에서 사랑을 실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만남과 화해!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노회나 교회, 혹은 정치권과 세상의 기관, 그리고 공동체 가운데 분쟁이 일어나면, 서로 소통하고 만나서 이해하고 화해하는 것보다 서로 편을 만들고 이간질하고, 자기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싸우는 것을 봅니다. 따라서 만남의 진정한 모범은 바로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고, 또 화해의 참된 의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신 그 사랑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지난 2020년 12월 11일 먼 이국 땅 라트비아에서 코로나로 인해 사망한 영화감독이 있습니다. 바로 김기덕 감독입니다. 제가 2002년 처음 영화 관련 책을 출판했습니다. 책 제목을 ‘영상시대의 종교와 윤리’로, 부제를 ‘타락을 통한 구원받기’로 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영화의 세계로 본격적으로 인도한 작품이 바로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2000)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념으로 책의 표지를 허락받아 <나쁜남자>의 한 장면으로 만들었습니다.


<나쁜남자>(2002)가 첫 개봉되었을 때, 첫 날 극장에서 보았습니다.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영상 이미지들의 충격이 생생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그로테스크한 영상 이미지와 여성 착취적인 스토리에, 어떻게 이렇게 숭고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담아낼 수 있다니! <사마리아>(2004) 역시 끊임없이 자신의 종교적인 주제를 변주하고 새로운 형식을 창조합니다. 이후에 <피에타>(2012)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문학과 영상』이라는 영화학회 논문집에 「김기덕 영화의 폭력의 미학, 밟혀서 밝혀주다: 영화 <나쁜남자>와 <사마리아>」를 통해 김기덕 영화에 나타난 본질적인 주제들인 종교성, 곧 “영원한 여성이 우리 인간을 구원한다.”라는 괴테의 『파우스트』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구원의 의미를 알리기도 했지만, 한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영화인들은 그 가치를 알아보았습니다. 김기덕 감독은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에서 본상을 수상한 유일한 한국인 영화감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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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여성’이 우리 인간을 구원한다


사실 김기덕 감독은 영화계에서 엘리트의 전철을 밟아온 이창동, 홍상수, 봉준호, 박찬욱 감독과는 다른 고졸 출신으로 영화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은 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인정받지 못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사회의 그러한 편견과 선입견을 깨뜨리고 철저히 자신만의 예술 혼을 담아내고 일가를 이룬 감독이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 신앙을 <십계>나 <벤허>류가 아니라, 매우 기괴하고 창조적인 역설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신의 ‘영화의 본질(여성성을 통한 구원)’이 아닌, ‘형식(여성 성폭력)’으로 신뢰를 잃었지만, 그의 작품들만으로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 라트비아에서 더 이상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없었던 것일까요? 코로나가 그 한계에서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도 해봅니다. 저는 김기덕 감독 추모의 글에서 이렇게 마지막을 매듭지었습니다. “평안히 잠드소서. 당신이 있는 다른 세상에서 당신이 상처를 준 여성에게 진심으로 속죄하고, 동시에 ‘영원한 여성성’이 당신을 구원하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 성폭력에 대한 사과를 하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사망했지만, 그만큼 만남과 화해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하늘나라에서 사과하고 그리고 그의 영혼이 자신의 작품 속에 나타난 영원한 여성성, 곧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속죄받기를 기도합니다.


2. 더 나은 본향,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질서, 하늘의 질서!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세상, 곧 아기 예수께서 오셔서 만드실 새로운 세상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서신서인 히브리서는 이것을 ‘더 나은 본향’이라고 말했지만, 결국은 구약 말씀을 통해 거룩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발을 지켜주시고, 악인들은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만드시는 그런 새로운 세상이라고 배웠습니다. 복음서 말씀도 마찬가지였죠? 갈릴리 나사렛의 보잘 것 없는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사, 만세에 복 있는 자로 세우시고, 큰일을 행하심으로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 먹이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시는 혁명의 새 세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나은 본향’, 곧 ‘아버지의 땅(father-land)’,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υ Θεου)’라고 하면, 내세나 혹은 공간적인 장소 개념을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말 ‘나라(kingdom)’라는 말에 들어 있는 선입견 때문입니다. 즉 우리 한국 사람은 ‘나라’라고 하면 조선 왕조를 생각해서 이씨 조선(朝鮮), 이조(李朝, 물론 이것은 일본이 조선을 얕잡아 한 말입니다만), 곧 ‘이씨 왕의 나라’, 즉, ‘장소(place)’나 ‘체제(system)’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셈족 언어에 있어서 나라는 가시적인 공간의 개념이 아니고, 행위의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원래 공간개념으로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나안 땅에서 다윗 왕국을 세우긴 했지만, 그 마저도 분단되고, 나중에는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는 등. 구체적인 장소 개념으로 나라의 개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행위가 있는 곳, 곧 하나님께서 통치(reign)하시는 나라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질서가 지배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통나무, 2019)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의 질서는 타락한 ‘땅의 질서’ 즉 예수께서 목도하고 있는 갈릴리의 현실적 질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의 질서는 하늘이라는 ‘공간’ 속에 갇혀있는 질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땅으로 내려와, 새로운 땅의 질서가 되어야만 하는 질서입니다. 주기도문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따라서 하늘의 질서는 땅의 질서가 되어야 하는 새로운 질서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늘의 질서’,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질서’,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십니다.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 곧 새로운 하늘의 질서를 만들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준비하는 손길들을 보여줍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은 세례 요한의 탄생을 보여줍니다. 요한의 이름은 ‘자비로우신 주님(야훼)’이라는 뜻의 성서 속 이름인 ‘예호하난(יהוחנן)’을 줄인 이름인 ‘요하난’에서 왔습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예비자를 보내어 외치게 하십니다. 그 이가 바로 세례 요한이죠? 그리고 그 외침의 내용이 구약 이사야 말씀인 것입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 40:6-8)


말하는 자의 소리가 무엇을 외칩니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 외침은 아름다운 소식, 복된 소식, 곧 복음이 됩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사 40:9)


따라서 복음을 듣고, 보고, 만진바 된(요일 1:1) 우리는 빌립보서 말씀처럼, 기뻐하고 관용하며 기도와 간구와 감사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3.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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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 토레토 <세례 요한의 탄생> (1540)


먼저 요한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신약 말씀부터 볼까요?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 한 이가 없다 하고,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눅 1:57-63)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들 이름을 관례에 따라 아버지의 이름인 사가랴가 아니라,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인 사가랴를 아들에게 준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처럼 제사장이 되어 존경받고 또 안정된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가브리엘 천사가 말한 대로(눅 1:13) 요한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것이자, 요한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자, 사가랴의 닫힌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립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눅 1:64-66)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까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요한은 그 이름의 뜻대로 수많은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이 “당신은 엘리야요?”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하고, “그러면 오실 그 분이시오?”라고 물어도 아니라고 합니다(요 1:21). 그리고 오늘 이사야 40장 3절 말씀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요 1:23).”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요 1:26-27).”


자비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요한의 목소리는 바로 구약에서는 이사야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4. 강한 자로 임하시며, 그의 팔로 다스리신다!


사실 오늘 구약 본문 말씀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될 유다를 향하여 포로해방선언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니, 바벨론을 두려워하여 떨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위로의 말을 하라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그리고 본격적으로 외치는 자의 소리인 이사야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사 40:2)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았으나, 그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운 세상이 올 것입니다. 그 외치는 자의 소리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새로운 세상, 더 나은 본향, 하늘의 질서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40:3-5)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보게 되는 새로운 하늘의 질서를 만들기 위해 아기 예수께서 오십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사 40:10-11)


5.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렇게 주께서 오십니다. 따라서 아기 예수께서 오시는 대림절기에, 새로운 세상, 곧 하늘의 질서를 바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기쁨과 감사와 간구의 생활을 하도록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가까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그리고 두 번째로 관용하라고 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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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랑스의 시작


지금 우리 사회에 코로나로 심각한 위기인데도, 1년 이상을 끌고 온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검찰개혁과 공수처 설치였죠? 우여곡절 끝에 이제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을 견제할 공수처가 설치되었으나, 검찰개혁의 첫 단추는 이제 부터라는 생각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법의 여신 디케(dike)가 있습니다. 로마 신화에는 유스티치아(justitia)로 나오죠? 영어 정의(justice)는 유스티치아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무튼 우리나라 대법원 앞에 가보면, 전통한복을 입고 한손에는 법전과 다른 한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여신상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디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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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여신 디케


디케는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법을 대표하는 상징물로서, 들고 있는 저울은 똑같으나, 다른 한손에는 법전, 혹은 칼을 들고 있습니다. 어떤 여신상은 눈을 가리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손에 들고 있는 저울은 다툼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가르는데 편견을 버리고 공평하고 정의롭게 하겠다는 의미이며, 다른 한손의 법전이나 칼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고 제재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칼의 경우 양날의 검입니다. 상대를 겨눈 그 칼이 집행하는 자신에게도 향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법의 여신 디케(Dike)도 이렇게 양날의 칼을 가졌는데, 우리 검찰은 자신들의 불의를 질책하고, 또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이들을 향한 칼날만 가지고 있으니, 문제가 됩니다. 게다가 디케는 눈을 가리고 있지만, 우리 언론은 검찰의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죠? 그만큼 검찰의 권력이 무서운 것이죠? 따라서 검찰개혁 이후 반드시 언론개혁이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무튼 아기 예수께서 오셔서 만드실 더 나은 본향인 하늘의 질서는 이렇게 디케의 기능, 곧 정의의 기능이 제대로 시행되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검찰에게 양날의 검을 주는 것이고, 또한 그들의 눈을 가리는 것입니다. 눈을 가려야 편견이 없어지고 양날의 검이어야 자신도 돌이켜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관용입니다. 관용은 타자에 대한 편견이 없음과 자신을 돌이켜 보는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프랑스어인 톨레랑스(Tolérance)는 ‘정치, 종교, 도덕, 학문, 사상, 양심 등의 영역에서 의견이 다를 때 논쟁은 하되, 물리적 폭력에 호소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주 안에서 기뻐하고 관용하면 끝인가요? 아닙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한 가지 더 당부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이 춥고 또 코로나 팬더믹으로 이제 또 다시 비대면 예배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예배드리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매사에 관용하시기 바랍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에 의하면,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들이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불의한 세상에 아기 예수님을 보내, 새로운 하늘의 질서를 만드셨듯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 새로운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의 질서에 참여하는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다시 대면으로 만날 때 까지 아무쪼록 건강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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