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상 2:1~10, 눅 1:39~56, 히 11:1~3, 8~16
1. 빛은 왜 필요한가
1) 날마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전국 어느 곳이나 밤이면 여기저기 가로등이 켜 있어서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밤은 훨씬 어둡다. 불이 별로 없는 곳은 칠흑같이 어둡다. 어두운 밤은 그 자체로 낭만적이지만 어딘가를 가야 하거나 무언가를 해야 할 때는 정말 갑갑하고 힘들다. 특히 캄캄한 밤에 자동차 라이트가 고장 나면 위험하고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등대는 생명의 빛이다. 우리가 어둠에 갇혔을 때 빛은 곧 생명이다.
2) 성경에는 불임 때문에 어둠의 삶을 살았던 두 여성이 기록되어 있다. 3천 년 전, 한나는 별로 부족한 것이 없는 여인이었지만 그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이 고통이고 상처였다. 2천 년 전, 엘리사벳도 경건하고 신실한 삶을 살았지만 아이가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었다. 옛날에 여성이 후손을 잇는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은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치욕과 아픔의 꼬리표였다. 후대에 한나에 대한 묘사를 보면 대부분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한나나 엘리사벳이나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3) 오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건강‧불안‧집‧취업‧가정‧일터‧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아픔이 묻어난다. 특히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하여 개인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교회 앞의 성남시의료원이 올 봄에 우여곡절 끝에 개원했다. 이 지역 전체가 기대감으로 술렁거렸다. 병원 근처 건물들이 재건축을 시작하여 주변이 훨씬 고급스러워졌다. 그리고 1층은 건물마다 약국이 들어섰다. 대충 세어 봐도 10개가 훌쩍 넘는다. 아마 임대료가 비쌀 것이다. 이것들을 볼 때마다 내가 다 불안하다. 다행히 돈이 많아서 여유 있게 운영하는 약국은 덜하겠지만, 있는 돈 다 끌어 모으고 또 대출까지 받아서 무리하게 시작한 이들이 많을 텐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모두 다 잘되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시 의료원이 잘 되어야 하고…, 그런데 시 의료원에 환자가 아직 많지 않다. 그러니 약국에도 손님이 별로 없다. 이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개업할 때 수지타산, 향후 전망 같은 것 따지지 않고 했을 리는 없다. 여러 가지 계획하고 검토한 결과 실행한 것인데 그 예상이 맞지 않은 것이다. 난 약국 앞을 지나갈 때는 다른 곳을 본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하루 종일 길거리 내다보며 손님만 기다리는 약사들에게 괜히 미안해서다. 인생과 역사에는 내 예상과 들어맞지 않는 불안이 있다.
2. 한나의 노래
1) 세상에 모든 짐을 진 것처럼 무거운 삶을 살던 한나와 엘리사벳에게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날마다 눈물과 아쉬움 속에서 살던 이들이 기뻐하였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삼상 2: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누가 1:41,44)
날마다 눈물짓던 한나가 너무 기뻐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이제는 체념했던 엘리사벳이 뒤늦게 아이를 갖게 되고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는 태중의 아이까지 기뻐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노래했다. 오늘 우리 삶이 이렇게 변하면 얼마나 좋을까. 한나와 엘리사벳이 기뻐한 것은 우선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의 소원이 내 몸에서 이루어졌을 때 얼마나 감격적인가.
2) 엘리사벳이 기뻐한 이유는 불임을 넘어 아이를 가졌다는 것뿐 아니라 그가 메시아를 잉태한 마리아를 만났기 때문이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누가 1:43)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1410년경,
독일 프랑크푸르트 실용 미술박물관
화려한 꽃이 가득하고 공작과 원숭이도 등장하는 에덴동산 같은 곳을 배경으로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났다. 둘 다 근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마리아는 요셉과 결혼하기 전에 이해할 수 없는 임신을 하였고 엘리사벳은 평생 불임으로 고통 받던 삶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 두 슬픔의 만남은 기쁨으로 전환되었다.
둘 다 머리 둘레 황금빛 아우라가 빛난다. 엘리사벳은 검은 색 그리고 마리아는 붉은색 햇살 무늬다. 둘은 친척이며 엘리사벳이 훨씬 연배가 높지만 엘리사벳은 머리에 너울을 씀으로써 마리아에게 분명한 예를 갖춘다.
6백 년 전의 태피스트리 장인은 재미있게도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뱃속 아기들까지 표현했다. 사실 저 때 세례 요한은 6개월 정도 되었고 예수님은 형체도 다 갖추지 않았을 테지만 둘 다 돌 정도의 아기로 그렸다. 당시에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의미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음으로써 메시아에게 예를 표하고 예수님은 앉아서 손을 들어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요한에게 복을 내려주신다.
메시아와 그의 선구자를 잉태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잔잔한 기쁨의 미소를 짓는다. 사실 이후 이들의 삶이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자식의 죽음을 보는 어머니가 행복할 수는 없다. 요한은 참수형을 당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을 통해 이룩하신 하나님의 구원임을 이들이 믿었기에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나의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3.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1) 우리의 아픔과 불안
오늘 우리는 사실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가 어디서 어떻게 감염될지 몰라 밖에 나가는 것도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식당에서 같이 밥 먹는 것도 두렵다. 집에서 그냥 식구들끼리 먹어야 그나마 좀 안심이 된다.
며칠 전 오래 전에 방영한 일본 경제의 붕괴에 대한 다큐를 보았다. 부동산 불패 신화를 확신하던 일본 사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땅과 건물에 너도 나도 빚내서 투자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예상치 못했던 거품이 1991년 한해에 빠지고 말았다. 부동산 가격은 추락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파산했다. 보통 한국이 일본을 많이 닮아간다고 하는데 이것도 닮는 것 아닌가 걱정스럽다. 물론 나는 부동산도 없으니 편한 면도 있지만 나만 해당사항 없다고 괜찮은 건 아니다. 우리 사회는 거미줄처럼 서로 얽혀 있어서 내가 잘되어야 이웃도 행복하고 이웃이 망하면 곧 나도 위험해진다. 지금 정부도 부동산 정책에 성공하지 못했고 지지율 급락의 첫째 원인도 부동산 정책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없이 상승하고 거기에 따라 부동산 가격도 올라가고 어느 지점에서 거품이 빠지면 무너질 수도 있다. 괜한 걱정인지, 만약 실제로 그리된다면 대안은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다.
이제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걱정도 든다. 옛날에는 은퇴하고 사망하기까지의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개인으로 보면 안타깝지만 은퇴 후 기간이 10~20년 정도 되었다. 지금은 20~30년 정도를 살아야 한다. 삶의 여건이 여유가 있고 건강하게 살 수 있으면 복이지만, 주거나 생활비가 안정되지 못하고 더군다나 건강하지 못하면 사는 것이 고통일 수도 있다. 가난하고 아프고 고독하고 지루한 기간이 길어진다면 장수가 행복이 아닐 수 있다. 나는 이 불행을 비켜갈 수 있을까…, 불안하다.
지구의 기후위기가 우리 코앞에 닥쳐왔다는 것을 사방에서 경고하고 있다. 지난 주간에 우리나라 어느 대학 연구소에서 중국과 몽골 그리고 한반도에 폭염과 가뭄이 서로 악영향을 주면서 더욱 거세지고 있다는 것을 260년 이상 된 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해서 발표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진행된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전문가의 의견을 방영했다. 아무리 이런 경고를 해도 사람들의 탐욕과 편리함의 유혹은 크게 줄어들지 않는다. 아무리 AI를 만들고 달나라에 가면 뭐하나, 인류가 이렇게 바보 같은 데 말이다. 정말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괜찮다고 확신할 수 있나, 나만 피하고 내 자식과 손주들이 이런 종말을 맞는다 해도 상관이 없는가.
정말 불안하고 우울하다. 성격은 좀 다르지만 한나와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지니고 있었던 불안과 아픔도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다.
어떻게, 왜?
2)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된 원인은 딱 하나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삼상 2:1, 한나의 고백)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누가 1;44, 엘리사벳의 고백)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이 변화한다. 오직 하나님이 나의 걱정과 불안과 고통을 기쁨으로 변하게 하실 분이다. 이 믿음이 소중하다.
3) 믿음을 집중적으로 기록한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1:1~2)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 걸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오늘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선조들은 내 인생과 역사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는 최종 해결책,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을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메시아라 부르고 2천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라는 한 인물에게서 그 메시아를 보았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 선진들의 그 고백을 보고는 허무맹랑하다 하지 않고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이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지점이다.
우리의 슬픔, 불안, 고통을 기쁨과 노래로 변화시켜주실 메시아가 오신다. 그 분이 내게 오시면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충만해진다,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인생과 역사가 시작된다. 그 분이 오시면 우리는 기쁨으로 뛰놀 것이다. 모든 근심‧걱정‧불안‧고통은 사라지는 날 - 대림절은 바로 그 날을, 이 분을 설렘으로 기다리는 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