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상 2:1-10, 눅 1:39-56, 히 11:1~3, 8~16
성서에는 여인들의 노래가 여러 곳에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누이이면서, 예언자이고 민중의 대변자 역할을 했던 미리암은 홍해를 건넌 후에 노래를 선창합니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출애굽기 15:21)
여자 사사 드보라는 적장 시스라를 죽인 야엘을 축복하면서 노래합니다. “주님, 주님의 원수들은 이처럼 모두 망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힘차게 떠오르는 해처럼 되게 하여 주십시오.”(사사기 5:31)
이스라엘을 침략한 아시리아의 총사령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유대여인 유딧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 때 멸시받던 내 백성이 고함을 치고 연약하던 내 백성이 큰 소리를 지르니 원수들은 겁을 먹고 질려 버렸습니다. 내 백성이 더 크게 외치니 원수들은 달아나 버렸습니다.”(유딧 16:11)
이 노래들은 모두가 민족이나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에 하느님의 도움으로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 구원을 이루신 일에 대하여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또한 나이가 늙어서 아들을 잉태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임신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돌아보셔서 사람들에게 당하는 내 부끄러움을 없이해 주시던 날에 나에게 이런 일을 베풀어 주셨다.”(누가복음 1:25)
이와 비슷한 내용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면서 본격적인 첫 예언자인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가 있습니다. 한나가 자식을 달라고 한 기도는 단순히 자기의 대를 이을 아이를 달라고 기도한 것을 넘어섭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평등공동체의 고리가 파괴되고 있으면서 야훼 하느님 대신에 인간인 왕을 세우려는 여론이 확산되던 때에, 한나는 자기의 아이를 통하여 이러한 공동체의 위기를 넘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 한때 넉넉하게 살던 자들은 먹고 살려고 품을 팔지만,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는다.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사무엘상 2:4-8)
특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노래는 그 절정에 있습니다. 마리아 찬가는 라틴어로 ‘마그니피카트’(magnificat)라고 부르는데, 이는 헬라어 메갈뤼네이(Megalu,nei; “높이다”)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느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누가복음 1:46-55)
이 노래들은 하나같이 야훼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 찬양의 근거는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구원과 해방에 있습니다. 억눌린 사람들이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의 변혁을 염원하면서 부른 노래들입니다. 마리아 찬가는 인민의 노래를 인민의 열망인 메시아를 잉태한 상태에서 인민의 대변자로 부른 노래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누가의 탄생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경건한 기도문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인 구원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사회정치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런 전제를 하지 않고 마리아의 노래를 읽는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은 분명히 혁명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 마리아의 노래는 이스라엘의 해방자인 하느님에 대한 찬양에 집중하고 있으며, 출애굽과 같은 해방의 사건에 대한 기억,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는 예언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노래를 부르는 마리아나 이 노래를 듣는 청중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사건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가나안의 왕들로부터 구조되고, 블레셋 족속으로부터 보호받았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마리아에게 임신의 사실을 알려준 천사가 가브리엘이었다는 것도 그 사실을 알려줍니다. 가브리엘은 계시적 비전의 상황에서 등장하여 백성들이 계약에 대한 헌신을 지속하고 압제자들에게 저항할 수 있도록 독려하며, 하느님이 그 백성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압제자의 지배를 머지않아 끝장낼 것임을 알려 주는 천사입니다.
본문의 49절부터는 비천한 여종인 마리아가 당당하게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찬양할 수 있었던 근거가 나옵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의 사람들이 극명하게 대립되면서 거론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교만한 사람들, 권세 있는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 부유한 사람들과 배고픈 사람들. 이 사람들에 대하여 거룩한 이름을 가진 전능자 하느님이 행하신 큰일은 그들의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 먹이시고, 치부하여 풍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내어 쫓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하여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높이시고, 권력을 휘두르며 통치하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립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풀어 동정하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을 흩어버립니다. 이 것은 하느님의 큰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강렬한 희망이 됩니다.
관계의 역전은 원한을 풀기 위한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역전이 없이는 비참한 궁지에 몰려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원한이 풀리지 않습니다. 뿌리 깊은 원한을 푸는 일은 관계가 역전되어 똑같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한 바탕이 됩니다. 원한(怨恨)을 풀고 서로 잘 사는 것을 해원상생(解寃相生)이라고 합니다. 해원이란 모든 생명의 원통함을 끌러내는 것입니다. 해원은 본질적으로 인간 생명의 문인 마음을 치유하는 길이며,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 역사, 문명과 자연까지 치유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6년 8개월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세월호 참사 관련 범죄의 공소시효가 만료되기까지 4개월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참사의 당사자들이나 살아남은 사람들, 그리고 유가족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은 그 이후로 알게 모르게 척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부모들이 겪는 가장 참혹한 고통은 바로 자식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는 참척(慘慽)의 고통입니다. 참혹할 ‘참’(慘)자와 슬플 척(慽)자를 써서 모든 슬픔 중에서 가장 큰 슬픔이라는 의미의 '참척(慘慽)'이라고 합니다. 이 슬픔과 아픔을 푸는 일이 해원입니다. 유가족들과 뜻 있는 국민들은 이 땅 곳곳에서 참혹한 그 척과 원과 한을 풀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청와대 앞에서 노숙농성과 단식을 하고, 4.16진실버스로 전국을 순례하면서 7주기 이전에 한을 풀기 위해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는 사회적참사특별법 개정, 대통령 기록물 공개, 피해자지원법 개정 등을 의결하고, 문재인 대통령과 국정원, 군 등의 정부 기구가 진상규명을 위한 수사와 조사에 적극 협력하고 관련 자료를 전면 공개하는 등 그동안의 약속과 국가기구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7주기까지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의지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과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에게 약속했던 성역 없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다짐을 이행해야 한다.”
아픔과 슬픔을 오래 방치하면 척이 되고 원이 되고 한이 되어 쌓입니다. 의학용어로 하면 만성 스트레스와 트라우마가 되어 그 사람을 평생 힘들게 합니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 국민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참사의 아픔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고,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처럼 사회문제와 결합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애도에는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 해원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첫걸음은 바로 진실을 규명하는 일입니다. 단원고 학부모들이 지금까지 갖은 고통과 수모를 견뎌내면서 줄기차게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애도와 해원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을 진정으로 애도하고 싶은 애절한 희원이 현실의 벽에 가로막힘으로써 평범한 부모들은 어느새 우리 사회의 비극적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아픔의 해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원과 상생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1에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교만한”을 다르게 표현하면 “마음[καρδία]을 이해하는[διάνοι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카르디아’[καρδία]는 욕망의 자리로써의 마음을 표현하는 단어이고, ‘디아노이아’[διάνοια]는 목적과 계획을 가진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즉 교만하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목적으로 삼는 행위”를 말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자기의 욕망을 극대화 하려는 세력들에 의해서 이 땅에서 해원을 통하여 상생하려는 길이 막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런 사람들을 키질하여 흩어버린다는 것이 마리아의 희망이고, 이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행하신 거룩한 일은 마리아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근거가 되고, 마리아가 이러한 하느님의 일을 찬양하는 것은 그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입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라 온 몸으로 그 찬양의 근거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미 굳어진 관계의 망을 뚫고 나가 기존의 배치에 저항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사유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고정된 관계의 질서 속에서 지배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지배질서에 저항하여 굳어진 관계를 바꾸는 것을 혁명이라고 합니다. 지금 올해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하여 해원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를 비롯한 성서의 많은 노래들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는 근거는 예수님이 그의 전 생애와 목숨까지도 바쳐서 이루려 했던 하느님 나라와 전승사적 맥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큰일이 실현된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기억하는 대림절 기간에 우리를 독려하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실천입니다. 해원과 상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마리아를 복 있는 여인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 마리아의 노래를 소리 높여 함께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