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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13-1) - " 부끄럽지 않은 구원 " / 신솔문 목사

관리자 2019-11-22 (금) 13:49 4년전 2122  

본문) 왕하 17:6-23, 막12:1-12, 롬2:1-11

 

1.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은 한 번의 큰 재해가 있기 전에, 그와 관련된 작은 사고나 징후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법칙입니다. 큰 재해와 작은 재해, 사소한 사고의 발생 비율이 1:29:300이라는 점에서 ‘1:29:300 법칙’으로 부르기도 하는데요, 예를 들어 큰 재해로 1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그 전에 같은 문제로 경상자가 29명 발생하며, 역시 같은 문제로 다칠 뻔한 사람이 300명 정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인리히는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큰 재해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전에 사소한 사고 등의 징후가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혀냈습니다(참고: 다음백과).

 

하인리히 법칙을 하나님의 징벌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징벌을 내리시거나 그것에 준하는 환경을 허락하시는 것을 ‘1가지’ 큰 재해로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이전에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내하시면서 ‘300가지’의 경고와 ‘29가지’의 환경으로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오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끝내 그 인도함을 무시하거나 거부한 결과가 “징벌”과 “그것에 준하는 환경”인 것이지요.

 

 

 

2.

 

이런 일이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벌어집니다. 호세아 왕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강대국인 이집트와 아시리아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다가 이집트의 힘에 의존하는 정책을 폅니다. 이에 분노한 아시리아는 군사를 일으키게 되고, 사마리아를 3년 간 포위한 끝에 주전 722년경 함락을 시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큰 재해를 겪게 된 것입니다. 역사학자에게는 호세아 왕의 어리석은 정치적 판단이 이 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겠지만, 열왕기하 17장 말씀은 근본적인 원인이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고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시내 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한 것에 있다고 합니다(7절). 이 근본적 원인이 저러한 결과로 나타나는 과정은 하인리히 법칙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인내로 인해 ‘원 스트라이크 아웃’으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300 경고와 29 조치’같은 기회를 주셨으나 그들은 끝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13~14절). 큰 징벌을 피할 수 있는 ‘300번 이상’의 기회가 있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2장의 포도원 소작인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 조성된 포도원처럼 이스라엘 민족들을 가꾸어주시고  이들에게 신성한 책무를 맡겨 주셨는데 이들은 주인 행세를 하며, 책무 다할 것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때리고 능욕하고 죽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는데 이 아들마저 이들은 죽인 후 쓸모없는 것 버리듯 포도원 바깥에 버리고 맙니다. 이제는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공의를 세우실 것이라는 암시가 예수님 비유에 담겨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작태는 어떤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로마서 2장은 두 가지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자신들은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3절).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음을 업신여기는 마음입니다(4절). 오판을 버리지 못하는 이러한 고집의 결과는 참담합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열 번째 재앙을 준비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5절).

 

 

 

3.

 

그런데 유대인(이스라엘 민족)들의 이 어리석은 생각이 우리들에게 왠지 생소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오직 믿음’을 목청껏 외치지만, 하나님의 뜻을 떨리는 마음으로 분별하고 그것을 애써서 실천하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 우리 개신교도의 모습이 로마서의 유대인 모습이고 이 유대인들이 품은 생각과 우리들 생각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부지불식간에 ‘예수 믿으니 하나님 심판에서 면제’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니 회개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들이 소위 칭의론을 매우 중시하는 교리를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고 이 칭의론에서 파생되기 쉬운 부작용이 이런 생각들이기 때문입니다. 작용을 누리다보면 부작용도 겪게 되지요.

 

사도바울은 이 부작용을 오늘 로마서 말씀을 통해 경계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6~8절).

 

“이신칭의(以信稱義)”가 “행위에 따른 심판”을 배제하는 것처럼 여겼는데, 오늘 말씀에서 다시 강조되다니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4.

 

둘 다 놓치지 마라는 것입니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한 복잡한 논의가 있습니다만, 성도 여러분들은 두 개의 비유를 기억해두십시오. 첫째, 로마서와 관련 있는 “재판정” 모델입니다. 판사의 선고(宣告)가 있기 전, 피고의 모든 행위는 재판에서 검토됩니다. 예수님과 연합된 자라는 것이 선고에 중대한 영향을 주겠지만 이전 단계에서 행위에 대한 심판(판단)은 피할 수 없습니다. 둘째, 고린도전서와 관련된 “건축” 모델(고전 3:9b~15)입니다. 신자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터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의 생활 내용이 그 집의 재료가 됩니다. 그 재료는 나중에 검증을 받게 되는데 부끄럽지 않도록 잘 지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분별력을 잃고, 실천이 없는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믿음과 은혜를 값싸게 만들고 있다는 개탄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내 구주로 인정하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뜻을 떨리는 마음으로 헤아리고 그 뜻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가는 노력을 함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신앙의 집을 지어가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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