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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2-1) - " 예배 그리고 생활 " / 서재경 목사 > 창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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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12-1) - " 예배 그리고 생활 "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19-11-15 (금) 10:01 4년전 1815  

본문) 신 26:4-15, 약 2:14-26, 마 25:31-46 

 

유카리스트

우리는 왜, 무엇하러 교회에 갈까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 아이들에게 묻는다면, 놀러 간다고, 또는 먹으러 간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교회가 처음 생겼을 때,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왜 모인다고 하겠습니까? 그들은 먹으려고 모인다고 할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133절에 보면, ‘여러분이 먹으려고 모일 때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데, 교회에서 모이는데, 먹으려고 모인다는 말입니다. 처음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먹으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회에서 무엇을 먹었을까요? 말씀이겠지요? 그들은 교회에 모여서 복음을, 영원하고 참된 생명의 양식을 먹었겠지요? 그렇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모여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주린 배를 채우려고 교회에 모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모여서 오직 말씀만 먹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모여서 밥을 먹었습니다. 함께 빵을 떼었습니다. 처음 교회를 조사했던 로마 첩자들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정한 날에 모여서 함께 밥을 먹는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밥을 먹는 것을 유카리스트라고 합니다.

유카리스트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면서 차차 제도화되어서, 오늘날의 성찬 예식이 되었지요. 본래 유카리스트는 함께 밥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카리스트는 유카리스테오라는 그리스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카리스테오라는 말은 감사한다는 뜻이지요. 신약성서에서 이 유카리스테오라는 말은 39번 사용되었는데, 거의 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하는 마음, 감사의 기도, 감사의 찬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실 때, 오병이어를 들고 먼저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감사드렸지요. 그렇게 이 말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영광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떡을 떼고 함께 밥을 먹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이렇게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먹으려고 모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떡을 떼고, 함께 포도주를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미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45절에서 처음 교회가 탄생하는 장면도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신도들은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였지요. 그리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고,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함께 모여서 빵을 떼고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것이 처음 교회의 예배였습니다. 함께 밥을 먹으며 하나님께 감사 찬미하는 예배, 곧 유카리스트입니다.

 

첫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 찬미하며 함께 밥을 먹는 예배! 참 흥미로운 예배입니다. 전혀 새로운 예배지요. 그런데 이 예배는 또한 참으로 오래된 예배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드린 예배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명기 264-15절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어 첫 열매를 거두었을 때,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드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까? 이집트를 떠나온 한 세대가 다 광야에서 생을 마쳐야 했지요. 그렇게 오랜 고생 끝에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유산으로 주시는 땅을 받았을 때는 또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그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땀 흘려 농사를 지어서 마침내 첫 열매를 수확하였으니, 그 감동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얻은 그 첫 곡식, 첫 열매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세는 그 첫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가지고 간 첫 열매를 제사장이 받아서 제단 앞에 놓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렇게 첫 열매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할 5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우리는 이른바 신명기 역사 신조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선조 때부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돌보아주셨는지, 무엇보다 이집트에서 학대당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 그 역사를 기억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셔서 첫 열매를 수확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역사 속에서 베푸신 은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에 베푸신 모든 은혜를 되새기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감사드리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또한 생활 속에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첫 열매를 예물로 드렸으니, 이 정도면 예배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예배를 잘 드리면, 하나님께서도 만족하시고 큰 복을 주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첫 열매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신앙고백을 한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 곧 이방인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는 것입니다.(11) 레위 사람은 누구입니까? 성전 일에 종사하기 위하여 땅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지요. 수확할 열매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레위 사람들은 그래도 하나님의 일,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들과 함께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요. 그런데 외국 사람들, 이방인들도 함께 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아무런 지분도 갖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은 여기서 더 나갑니다. 세 해마다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는 모든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떼어서, 그것을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안에서 마음껏 먹게 하라는 거지요. 그리고 그렇게 한 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명하신 대로 우리 집에서 성물을 내어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다 나누어 주어서, 주님의 명령을 잊지 않고 어김없이 다 실행하였습니다하고 확인하며 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행한 다음에야 비로소 주님의 백성과 약속하신 땅에 복을 내려 달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신명기 26장이 말하는 예배란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순전한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허락하신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함께 먹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예배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람을 향한 감사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이며, 또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사회에서 힘없고 약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신명기가 말하는 예배는 참으로 놀라운 예배입니다. 예배의 혁신이라 할 수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예배를 위해 지독한 고역에 시달려야 했었지요. 파라오의 신전을 짓기 위해 채찍에 맞아가며 쉬지도 못하고 피땀 흘리며 일해야 했습니다. 또 파라오의 제물을 위해 모든 수확을 다 바쳐야 했지요. 그렇게 해서 파라오의 거대한 신전에는 세기적인 성대한 제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친 온갖 제물은 누가 다 먹었을까요? 그 제물을 바치느라 등골이 다 빠진 노예들이었을까요? 아니지요. 그 기름진 제물은 오직 파라오와 신전의 사제들이 누렸습니다. 이방인 노예로 학대받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 제물 근처에도 갈 수 없었지요.

 

마지막 심판

오늘 우리가 받은 마태복음의 말씀은 이른바 마지막 심판의 비유입니다. 마지막 날에 인자가 오실 때,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의 무리로 갈라서 심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이라면, 무엇을 기준으로 판정을 내리게 될까요?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했는지가 관건이 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무릇 모든 종교는 신도들이 그 신에 대하여 어떻게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마지막 심판의 비유는 전혀 다른 심판의 기준을 보여 줍니다. 여기 예수님의 비유에서 사람들을 양과 염소를 가르듯 가르는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인자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했는지 하는 것인가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고,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인가요? 아니지요.

여기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여기 있는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입니다. 그 작은 한 사람에게 어떻게 했는가, 그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그가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주고, 그가 필요할 때 돌보아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돌보아 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창세 때부터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돌보아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저 작은 선행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예배라 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한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고 정성스러운 예물을 드리는 것, 하나님을 찾아뵙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것이 예배지요. 그런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라면, 그게 곧 하나님께 한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예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며, 또한 사람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지요.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하나인 것처럼 예배와 생활 또한 하나입니다.

 

감사드리면서

오늘은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을 되돌아보고 감사드리는 주일입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날 모든 곳에 사랑과 은총으로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도우시고 날마다 필요한 것으로 채워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감사 찬미합니다.

일찍이 시편 시인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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