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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0-1) -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만물을 완성하라! " / 최병학 목사 > 창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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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10-1) -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만물을 완성하라! " / 최병학 목사

관리자 2026-11-04 (수) 09:27 1시간전 2  

본문) 사 40:12-26 엡 1:15-23 막 12:12-17


1. 자신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들의 음모


지난주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끝까지 부정하는 이들은 자신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이며 동시에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말씀과 같이 마지막 날에 일곱 대접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복음서의 말씀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잡아 가두고자 하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이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말씀인데, 자신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은 이처럼 남을 책잡으려하고 또 육체를 따라 판단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오늘 이렇게 남을 해코지하려는 이들의 양자택일의 질문은 교묘하여 둘 중 어느 것을 택하여도 불리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막 12:13-1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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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주인과 농부


여기서 그들은, 마가복음 12장 1-11절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주인과 그 아들을 죽인 농부들’의 비유에서 농부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막 12:12a)”였으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막 12:12)”버린 적이 있었던 이들입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잘 아시듯이,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 추수가 끝난 후 포도원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보냈지만 능욕하기도 하고 때로는 죽이기도 하여 마침내 자신의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고 주인의 유산을 가로채려고 합니다. 물론 주인은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을 부정하는 이들이 각각 다른 입장을 가진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선택하여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헤롯당 사람들은 헤롯 왕조를 추종하여 그들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하는 정치적인 사람들입니다. 헤롯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을 추종하여 그를 중심으로 유다 민족국가의 재건을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죠? 평신도와 서기관들의 집단이었습니다. 흔히 바리새인과 비교되는 제사장 집단인 사두개파 사람들이 글로 쓴 토라만을 유일한 계시의 근원이라 가르쳤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토라를 해석하고 현실 문제에 적용할 때, 인간의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합리적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아무튼 친(親)로마 성향의 정치집단인 헤롯당원들과 반(反)로마 성향의 신실하고 합리적인 종교집단인 바리새인들은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따라서 처음에 이들은 원수처럼 지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동의 적인 예수님 때문에 손을 잡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으로도 헤롯당과 입장을 달리하고, 또 종교적으로도 바리새인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적의 적은 동지죠?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정치와 종교가 결탁하여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합니다. 


2. 양자택일의 질문은 하지도 말고, 받지도 말라!


그러나 처음에는 예수님의 비유에 원한을 품고 그 비유대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은 예수님께 좋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참(ἀληθὴς, 진리)’되시다고 고백합니다. 오직 진리(ἀληθείας)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다고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추켜세워 놓고 원래 하고자 했던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막 12:14c-15a)”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요즘 “차별금지법을 찬성합니까? 반대합니까?”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이 질문은 “동성애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질문이기도 하죠? 맥락을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게 되면 대답해야 하는 사람은 당혹스럽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외식함, 곧 이중성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막 12:15b-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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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 <가이사의 동전> (1612)


예수님은 질문자의 물음에 그 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이 질문에서 예수님의 대답이 “세금을 바치지 마라.”가 되면, 로마의 통치를 받는 유대인들이 로마에 세금을 바치지 않을 경우, 반역죄에 해당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반면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하나는 정치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정치와 종교가 결탁하여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사실 헤롯 대왕은 질병에 시달리다가 기원전 4년 3월에 임종을 맞았습니다. 그는 유서에 안티파스, 아켈라오, 빌립 세 아들로 하여금 유대 왕국을 통치하도록 했습니다.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이들을 분봉왕(client king)이라고 부르도록 했습니다. ‘한 지역을 위임 통치하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고, 헤롯 아켈라오는 사마리아와 이두매(에서의 후손인 에돔 사람들의 땅)를 포함한 유대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이들의 이복형제인 헤롯 빌립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받은 갈릴리 호수 동쪽과 동북쪽에 있는 영토를 다스리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헤롯의 아들들 모두 로마가 그들의 왕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헤롯당은 친로마 정치 세력으로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금에서 일부를 취하여 자신들이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로마가 식민지를 개척한 이유는 노예를 통한 노동력 창출과 또한 세금징수를 통해 부를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식민지 모든 주민들에게 주민세(poll-tax)를 바치도록 했습니다. 기원후 6년 경, 갈릴리 사람 유다는 이 세금 징수에 반발하여 로마에 항거했었습니다. 이후 이러한 유다의 저항운동은 젤롯당(Zealots), 곧 열심당으로 반로마 항거운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세금을 바치지 마라.” 하시면 헤롯당원들에게 책잡히게 됩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유대교적 열정 때문에 로마에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젤롯당과 같이 극단적이지는 않았지만, 종교적 율법을 준수하여 선민이라는 민족적 자긍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세금을 바치라.”고 하시면 종교적 열정이 넘치는 바리새인들에게 책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입장인 정치와 종교가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a)”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부분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동전에 가이사의 얼굴이 나오니 그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옳은 해석입니다. 그러나 질문자의 상황과 입장을 좀 더 살펴보아야 이 말씀의 뜻이 밝혀집니다. 이 말씀은 질문자인 헤롯당에게는 로마와 결탁한 그들의 치부를, 또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말뿐인 그들의 외식함을 지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민족을 갈취하여 로마에 바치는 세금 중 일부분으로 먹고사는 헤롯당의 질문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말씀하며 그들이 유대 민족의 착취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며, 또 동시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않고 민족적, 종교적 열정을 가진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래라. 너희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해라. 제발 종교적 율법을 핑계로, 너희의 종교적 열정으로 다른 사람을 책잡고 죽이려고 하지 마라!”라는 뜻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막 12:17b).”는 말씀은 당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자택일의 질문은 하지도 말고, 받지도 말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적이냐? 동지냐?’, ‘이것이냐? 저것이냐?’, 진리의 영역이 아닌 이상 속 좁게 ‘내편 네 편’을 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정치적 입장으로 상대방을 옭아매지도 말고 종교 교리로 사람을 혐오하거나 책잡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다른 관점에서 그 질문의 근거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양자택일의 질문을 하는 이들 자체가 불의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질문하실 수 있고, 또 그 대답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어야만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우리의 좁은 생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또한 예수님을 판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을 어떻게, 무슨 형상으로 비길 수 있겠느냐고 묻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3. 하나님을 무슨 형상으로 비기겠느냐?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사 40:12-14)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지식과 지혜가 뛰어나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창조주를 넘어 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너무 깊어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의 능력 또한 너무 커서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사 40:15-17)


그리고 핵심적인 말씀을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사 40:18)” 그렇습니다. 그 어떤 형상으로도 하나님을 비길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匠色, 옛날에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던 사람)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사슬을 만든 것(사 40:19)”이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사 40:20)”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遮日,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치는 장막)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草芥, 지푸라기)같도다.” (사 40:21-24)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사 40:25).” 하나님과 비교할 이가 없으며 동등한 신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 세계를 눈을 들어 살펴보라고 합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 40:26)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또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에 오십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놀라운 말씀이죠?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본질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그 말씀이 바로 교회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4.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뤄진다!


본문 앞부분인 에베소서 1장 15-19절 말씀은 인사입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감사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내 바울은 교회의 본질에 관해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 1:20-22)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고 말씀합니다. ‘만물(πάντα)’, ‘충만(πλήρωμα)’, ‘몸(σῶμα)’ 어렵지 않은 단어이지만 함께 결합이 되어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으로 22-23절 말씀을 볼까요?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으며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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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이해가 쉽죠?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세상 모든 만물을 온전하게 완성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이죠? 최근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있지만, 결국 교회만이 희망입니다. 지금 정치가 세상의 희망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거대 양당이 끊임없이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또 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는 좋게 말하면 역동적입니다. 쉴 틈이 없이 발전합니다. 그러나 그 역동성에 내재한 잔인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등할수록 빨리 발전하지만, 발전할수록 불평등을 낳는다.”라는 역설입니다. 지금 민주화와 평등을 실현하여 우리 사회가 발전했지만, 기실 그 과실은 누가 누리고 있나요? 발전할수록 불평등이 강화되어 불의하고 힘 있는 자들이 그 과실을 독점하여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도덕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로남불’이죠? 상대적인 관점에서 서로 옳다고만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영적 리더로서 올바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것입니다. 


5. 4M 교회


미국 드류신학교의 석좌교수이자 기독교 미래학자요, 문화사역자인 레너스 스윗(L. Sweet)은 서구교회를 4M으로 분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전도와 선교를 열심히 하던 ‘선교적 교회(Mission Church)’로 세워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역만을 하는 교회(Ministry Church)’로, 그리고 이후에는 ‘현상 유지에 급급한 교회(Maintenance Church)’로 전락했다가 마침내 ‘박물관 교회(Museum Church)’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교적인 교회가 가장 바람직하고 본질적인 교회의 모델입니다. 모든 일을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우선시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적 사명을 잃어버린 교회는 그냥 사역 중심, 목회 중심, 행정 중심의 교회로 탈바꿈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가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그저 사명을 잃고 현상유지만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는가요? 그러나 현상만 유지하려는 교회는 더 이상 부흥과 발전이 없고 그냥 안주하는 교회로 변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역에 관심이 없고 모든 것을 귀찮아합니다. 그저 형식만 남아 껍데기만 있는 교회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는 박물관교회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생명도, 열정도 없고, 눈물도, 기도도, 헌신도, 순종도 다 박제되어 박물관에 있습니다. 뜨거웠던 혹은 순수했던 신앙의 열정은 그저 한 때의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박물관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박제된 미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 미라와 같은 잠자는 성도, 죽은 성도가 가득 차서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세상만물을 온전하게 하신다고 하는데, 우리 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교회의 새로운 4M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미디어 교회(Media Church)’로 각종 기기를 이용한 신 개념의 예배나 새로운 소통 방식을 개발한 교회입니다. 둘째 ‘매뉴얼 교회(Manual Church)’로 상황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소 가지고 있던 매뉴얼대로 운영하는 교회입니다. 셋째 ‘메모리얼 교회(Memorial Church)’입니다. 현대적인 매뉴얼을 갖추지 못해 그저 전통적인 모습을 답습하는 교회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모나스터리 교회, 곧 ‘수도원 교회(Monastery Church)’입니다. 미디어나 매뉴얼과 같은 시대적인 흐름을 외면하고 과거 속에 안주하는 교회입니다. 전통만을 답습하는 교회로 레너스 스윗의 박물관 교회와 비슷합니다(홍석진 목사의 칼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만물을 완성하고 구원하시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 여러분 자신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아신다면, 우리 교회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금 ‘선교적 교회’로 돌아가야 하며 시대 상황에 맞춰 ‘미디어 교회’로도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이러한 교회를 통해서 세상 모든 만물을 온전히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참된 본질과 사명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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