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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1-1) - " 창조의 회복-생명과 빛 " / 재일동포선교주일 / 개척선교주일 / 힌성수 목사

관리자 2026-09-03 (목) 22:46 1시간전 6  

본문) 창세기1:1-25, 요한계시록4:1-11, 요한복음1:1-5


   지난 8월 26일, 수요일, 티베트와 접경한 네팔의 북부 작은 마을에서 빙하호 대홍수가 발생했습니다. 예전에도 빙하호가 무너져 내려는 홍수가 간간이 있었지만, 히말리야 산악지대에서 발생한 이번 홍수는 대규모의 산사태를 일으켜 마을 전체를 삼켜버리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습니다. 빙하가 녹아서 생긴 빙하호가 터져서 20km가 넘는 마을까지 내려 오는데는 불과 7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빠르게는 시속 170km 이상의 속도로 부서진 바위조각과 진흙탕물이 마을을 습격한 것입니다. 비가 전혀 오지 않았는데도 홍수가 난 것은,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가로 600m나 되는 거대한 빙하가 1200m 밑으로 녹아떨어져, 아래에 있던 호수를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그 충격은 진도 5.2의 지진으로도 기록되었는데, 무너진 호수 역시 빙하가 녹아서 고인 호수였으니 재앙의 시작은 빙하가 녹은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만 년 동안 녹지 않고 지속된 얼음이라는, 소위 만년설에서 생겨난 빙하가 그 이름을 뒤로하고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는 것은 기후 위기로 인한 온난화 현상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지구가 뜨거워지는 원인은 환경파괴입니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으로 산소를 공급하는 숲이 사라지고 마실 물이 오염되었습니다. 공장과 자동차와 화력발전소와 쓰레기 소각장에서 내뿜는 해로운 연기가 공기를 오염시키고 지구의 온도를 높입니다. 대다수 선진국이 내뱉은 쓰레기와 오염으로 기후 위기가 촉발되었으나, 정작 그 피해는 청정한 공기와 맑은 하늘을 가진 가난한 나라들에게 가해졌습니다. 이 부조리한 현실은 오늘의 생태 위기가 단지 자연현상이 아니라 죄와 탐욕, 그리고 정의의 문제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기후 위기라는 말은 더 이상 먼 나라의 통계나 미래 세대의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와 함께 숨 쉬는 이 땅의 아픔이며,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고통하는”(롬 8:22) 현실 그 자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기후 위기의 재난 앞에서 우리는 단지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께서 지으신 만물을 보시고 “좋았다”고 하셨던바, 오늘 이토록 무너지고 신음하는 세상은, 그 “좋았다”의 상태로부터 무엇을 잃어버린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다시 찾을 길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을 붙들고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와, 요한계시록 4장의 보좌 앞 예배와, 그리고 요한복음 1장에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는 같은 후렴구가 여섯 번 반복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4, 10, 12, 18, 21, 25)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신 여섯째 날의 끝에는 이 표현이 한층 강화되어 “심히 좋았더라”(창1:31)로 마무리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여섯 번이나 반복된 “좋았다”는, ‘토브’(טוֹב)입니다. 저명한 구약학자인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이 말은 창조주의 단순한 미적 감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어진 것이 창조의 설계와 정확히 부합한다는 신학적 언어라고 말합니다. 역시 구약학자인 김창주 교수는 『창세기 마루』에서 토브를 존재와 기능으로 풀이합니다. 첫째, 토브는 존재를 뜻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그 본래적인 모습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둘째, 토브는 기능을 뜻하는데, 모든 피조물이 각각의 지어진 목적에 따라 역할을 하며,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다는 뜻을 가진다고 합니다. 토브는 창조 세계가 지속되고, 제 기능을 가능케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강력한 장치이며 동시에 치밀한 설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물질의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라는 존재론적 진술에 이어, 흑암과 혼돈과 공허의 세상에 각각의 기능과 역할과 자리를 부여하여 우주를 하나의 성전, 곧 하나님이 거하시며 다스리시는 질서 잡힌 처소로 세우시는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로 빛과 어둠이 나뉘어 낮과 밤의 기능을 얻고, 물이 나뉘어 하늘과 바다의 자리를 얻고, 땅이 식물을 내며, 해와 달과 별이 때와 절기를 주관하며, 물과 하늘의 생물과 땅의 짐승들이 각기 종류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자리를 얻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어진 목적에 따라 정확히 제 기능을 하고 제 자리를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토브’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브는 단순히 겉으로 아름답다는 심미적 판단을 넘어, 존재와 기능이 일치하는 상태, 곧 지어진 모든 것이 창조주께서 부여하신 목적과 질서 안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그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피조물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관계와 질서 속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해가 해의 자리에서 빛나고, 바다가 바다의 경계를 지키고, 나무가 나무의 열매를 맺고, 사람이 사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갈 때,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보시기에 심히 좋은” 세상, 곧 토브의 세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근 네팔의 산골 마을을 삼킨 빙하 홍수와 해마다 기록을 갈아치우는 폭염과 가뭄과 산불, 사라져 가는 빙하와 산호초와 숲 등, 이 모든 현상은 신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피조물이 창조 당시에 부여받았던 토브의 존재와 기능을 상실했다는 표징을 말합니다. 물이 제 경계를 지키지 못하고 마을을 삼키며, 얼음이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며, 기후가 제 질서를 지키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닫는 것, 이 모든 것은 창조 질서의 균열이며 토브의 훼손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 균열의 원인을 자연 자체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과 연결합니다.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땅을 다스리며 정복하라는 사명, 곧 청지기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것은 착취가 아니라 창조주를 대신하여 피조 세계가 토브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돌보고 지키는 청지기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의 타락 이후, 사람은 청지기의 자리를 저버리고 스스로 창조주의 자리에 서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깨어졌을 뿐 아니라, 사람과 땅의 관계 또한 깨어졌습니다. “땅이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창3:17)라는 말씀은 인간의 죄가 자연 질서에까지 파급되는 사실을 명시합니다.

 로마서 8:19-22에서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한 것은 피조물 자신의 뜻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며, 그것은 곧 사람의 범죄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피조물은 오늘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을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소망하며 함께 신음하고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근대 인간이 세계를 인간을 위한 대상, 곧 정복하고 소비할 자원으로 축소시킨 것이야말로 생태 위기의 신학적 뿌리라고 지적합니다. 창조 세계에 대한 지배가 착취의 정당화로 오용될 때, 인간은 청지기가 아니라 폭군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후 위기, 최근의 네팔의 빙하 대홍수는 바로 폭군화된 인간, 곧 청지기의 사명을 저버리고 탐욕으로 자기 자리를 넘어선 인간의 타락이 낳은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기후 위기로 발생된 재난은 자연재해라는 이름으로 축소될 수 없으며, 그것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타락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기 자리, 곧 청지기의 자리를 벗어나 탐욕으로 창조 세계를 지배하고 소비할 때, 온 창조 세계는 토브의 존재와 기능을 상실하고 무너져 내립니다. 물이 넘치고 얼음이 붕괴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 먼저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기후 위기는 피조물이면서 창조주의 자리를 넘보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의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이 자원과 기술을 손에 쥐면서, 자신을 자연의 청지기가 아니라 자연의 주인으로 착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은 결코 땅을 파괴할 권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을 보살피는 위탁의 언어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청지기가 주인 행세를 하는 순간, 그 집은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너진 세계 앞에서 성경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은 로마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열린 하늘의 문을 보여줍니다. 밧모섬에 유배당한 사도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 보좌를 봅니다(계4:1-2). 보좌에 앉으신 이의 광채, 그를 둘러싼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 그리고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올리는 찬양이 이어집니다 -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계4:8). 이어서 이십사 장로는 자기의 관을 벗어 보좌 앞에 드리며, “주 우리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계4:11). 여기서 우리는 토브의 회복이 어떤 모습인지를 미리 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혼돈이 질서로, 무기능이 기능으로 변화되었던 그 창조의 드라마가, 계시록 4장에서는 온 하늘과 땅의 존재들이 각기 자기 자리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으로 다시 펼쳐집니다. 네 생물은 피조 세계의 대표로서, 이십사 장로는 구속받은 백성의 대표로서, 각자 자기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돌립니다. 이것은 토브의 회복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는 새로운 질서, 곧 처음 창조가 지녔던 그 아름다운 조화와 질서가 종말에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4장의 예배는 단지 하늘의 장엄한 광경이 아니라, 무너진 토브의 세계를 향해 주어지는 종말적 소망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 4장이 회복될 질서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 준다면, 요한복음 1장은 그 회복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 3). 요한은 “태초에”라는 말로 복음서를 열어 창세기 1:1을 구속사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신학을 요한 특유의 기독론으로 재진술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4-5절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4-5). 창세기 1장의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과 생명의 질서를 세우는 사건이었다면, 요한복음 1장은 바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으로써(요1:14) 잃어버린 생명과 빛의 질서를 다시 세운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말씀으로 지어진 세계는 오직 말씀으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창조의 근원이신 말씀(로고스)이 인간의 죄로 어두워진 세상 속에 다시 들어오셔서,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을 사람들에게 빛으로 비춥니다. 이를 두고 바르트는 「교회교의학」III/1에서, 창조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언약을 위한 무대라고 말하며, 창조와 구속이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창조는 언약의 외적 근거이고, 언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이다”라는 명제에 근거합니다. 이렇게 토브의 회복, 곧 처음 창조의 회복은 인간의 도덕적 결단이나 기술적 해법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생명과 빛으로 말미암아 시작되고 완성이 됩니다.


 이제 토브의 의미를 한 걸음 더 확장해 봅니다. 토브는 자연 세계의 회복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역사 속의 의로운 질서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해와 달과 별이 각기 때와 절기를 주관하는 자리를 지키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이 각기 종류대로 번성하는 자리를 지킬 때 세계가 토브였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자리를 충실히 지킬 때, 그 사회는 의로운 사회, 곧 토브의 사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고, 자기 자리를 온전히 지키는 것은 단지 개인적 성실함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창조 세계 전체를 토브로 이루어 가는 참여이며,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질서를 세우는 행위로 이어집니다. 목회자가 목회자의 자리에서, 성도가 성도의 자리에서, 그리고 세속의 직분을 가진 자들, 곧 정치인이 정치인의 자리에서, 기업인이 기업인의 자리에서, 근로자는 근로자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주신 부름을 따라 충실할 때, 그 자리 지킴이 모여 세상은 다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리를 넘어서는 탐욕, 곧 인간이 청지기의 자리를 벗어나 창조주의 자리를 넘보는 탐욕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마주한 기후 위기와 사회적 불의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의 세계는 토브였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기능을 다하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드러내셨던 아름다운 조화와 질서,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과 타락은 주어진 청지기의 자리를 저버렸고, 오늘 우리는 네팔의 산골을 삼킨 빙하 홍수 앞에서, 해마다 기록을 갈아치우는 이상기후 앞에서, 그 상실의 대가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상실로 끝나지 아니하고 회복의 소망으로 나아갑니다. 계시록 4장은 온 하늘과 땅이 다시 자기 자리에서 창조주를 예배하는 회복된 질서의 완성을 보여주며, 요한복음 1장은 그 회복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이 땅에 시작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말씀으로 지어진 세계는 말씀으로 다시 지어지며, 그 회복의 본질은 다름 아닌 생명과 빛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어둠 속에 있는 우리를 비추고, 그 빛 안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토브를 되찾아 갑니다. 전대미문의 기후 재난 앞에, 특히 네팔의 빙하 대홍수와 같은 전례 없는 재난 앞에서,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창조와 회복의 신학, 곧 말씀으로 지어지고 말씀으로 다시 세워지는 세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 위에서 우리는 청지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자기 자리를 온전히 지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빛 안에서 다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한 개인의 자리 지킴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물 한 방울을 아끼는 작은 실천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음가짐과 이웃의 몫을 탐하지 않는 정직한 삶과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과 빛을 받아 누리며 그 빛을 세상에 비추어 사는 삶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토브의 회복에 참여하는 실천이요 예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네팔의 마을이 무너진 그 자리에도, 언젠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빛이 온전히 임하여 다시 새 하늘과 새 땅의 토브로 세워질 날을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관을 벗어 드리는 이십사 장로처럼,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리며,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빛을 따라 살아가는 청지기 된 백성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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