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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창조절(1-1) - "말씀이 육체가 되어" / 서재경목사

관리자 2018-08-30 (목) 18:01 5년전 5958  

본문) 잠언 8:22-31, 골로새서 1:15-20, 요한복음 1:1-14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은혜로교회사태가 방영되었습니다. 교회의 신도 400명을 피지로 이주시켜서 감금과 폭력으로 노동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피지가 성경이 점찍어준 낙토이므로, 거기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는, 참 황당무계한 사건이지요. 21세기 백두 대낮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람들을 이끈 교주는, 오늘날의 교회가 너무 돈에 눈멀고 성전을 꾸미는 데만 몰두한다고 비판하면서 사람들을 모았답니다. 선교해야 하고 무엇보다 낙토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비롯한 매체를 이용하여 현실 교회에 불만족하는 신도들을 선동해서, 모든 재산을 바치게 하고, 피지가 하나님이 예비한 낙도라며 그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타작마당이라는 폭력으로 세상의 모든 관계를 해체하게 하고, 교주 일가를 중심으로 하는 괴이하고 신성한’(?) 권력체계를 세웠습니다. 절대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 은혜로교회사태를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사이비 종교들이 그렇듯이 지독한 맹신과 황망한 탐욕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한국 교회의 참담하고 추악한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창조절 첫 주일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풍성한 은총의 결실을 찬미하는 절기에, 참으로 유쾌하지 못한 은혜로교회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이 은혜로교회사건 속에는 아주 중요한 창조신앙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은 더러운 욕망을 숨기고 순결한 낙토를 찾는다면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성서가 비밀스럽게 감추어둔 낙토를 찾았다며 낙토는 피지에 있다고 했지요. 낙토는 정말 피지에 있는 것일까요? 그 사이비 교주가 틀렸다면, 낙토는 또 다른 그 어느 곳에 있는 것일까요? 낙토가, 신비의 땅이 그 어느 다른 곳에 있다면, 우리는 다시 그 낙토를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낙토를 찾아 떠나는 것이 신앙일까요? 이 물음을 달리 바꾸어 물어본다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 우리가 창조절 첫 말씀으로 받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새겨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의 표제와도 같은 말씀입니다. 복음서 전체의 향방을 열어주는 길잡이 같은 말씀이며, 복음서 전체를 요약해 주는 결론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늘 우리가 던졌던 질문, ‘낙토는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서 빨리 육체의 감옥을 부수어 버리고, 영혼의 본향으로, 하늘로 돌아가자.” 이 말은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로마 세계의 대중 종교 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이른바 영지주의라고 알려진 헬레니즘 종교의 주장이지요. 그리스 로마 신화가 보여주듯이, 당시 사람들은 저 하늘에 신들의 세계가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저 신들의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정은 하늘의 신들이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것은 하늘에 있습니다. 반면에, 여기 이곳, 세상과 육체는 허상일 뿐이고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이란 하급 신이 만든 조잡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낙토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낙토는 저곳에 있습니다. 낙토는 저 타계에 저 하늘 저편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토를 건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떠나야지요. 이곳에 있는 것 다 팔아버리고,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은 다 바쳐 버리고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모든 무의미한 것들의 핵심인 것이 이 육체라면, 육체가 감옥이라면, 어서 빨리 육체의 감옥을 부수어버리고, 영혼의 본향으로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은 당시 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라를 잃고 낯선 땅에 흩어져 살면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에게 영지주의는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희망이 없어 보이는데, 세상도 역사도 다 부질없는 것이라면,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나마 견딜 만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영지주의 사상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절망을 환상으로 바꾸어줄 수 있었습니다. 차라리 육체를 부수어버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고 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서도, 이 세상은 무익하고, 우리의 육체는 악한 것이니, 타작기계로 부수어 버리고, 새털처럼 가벼운 영혼으로, 훨훨 낙토로 날아가자고 선동하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첫 이단, 영지주의였습니다.

 

이런 때에, 미혹으로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만물과 무관한 분이 아니라는 선언으로 복음을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요한복음의 첫 선언이지요. 모든 것이 창조되기 전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놀랍게도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생겼습니까? 모든 것입니다. 온 세상, 온 생명입니다. 말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어느 것도, 그 무엇도 말씀 없이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무의미하고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모든 것이 참 좋았듯이만물은, 모든 피조물은 귀하고 거룩하고 좋은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덧없다고 부수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것을 나쁘다고 한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은 그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그저 그림자에 불과한 허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짙은 어둠을 물리치시면서, 빛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는 처음부터 어둠을 부정하는 빛입니다. 하나님은 지독한 절망의 어둠, 참담한 고통의 어둠, 그 짙은 어둠을 물리치며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는 곧 희망입니다.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듯이 창조는 모든 절망을 이기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요한의 복음서는 결정적인 선언에 이릅니다.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 자체이셨으며, 모든 것을 지으시고, 생명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 마침내 무엇이 됩니까? ‘육체입니다! 그리스 말로 싸륵스입니다. 이 육체, 싸륵스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아마 그래도 가장 실감 있게 번역한다면, ‘비계덩어리쯤 되지 않을까요? 그리스 말에서 육체는 그저 몸(소마)이라는 말이 아니라, 순전하고 고귀한 ’(프뉴마)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 육체가 없어야 자유로울 수 있으니, 그래야 영혼이 가벼이 날 수 있으니,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므로, 육체란 벗어버려야 할 것이요, 깨부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거룩한, 더없이 순수하고 교결한 말씀육체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

그렇습니다. 이 요한의 선언은 모든 不淨否定하는 긍정입니다.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으로 인정하는 선언입니다. 이로써 세상은 도망쳐야 할 곳이 아니라 아름답게 변화시켜야 할 곳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역사는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으로 일어서야 할 것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고단한 삶은, 포기하고 타협하거나, 외면하고 도망쳐야 할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살아내야 할 것이 되었습니다. 삶은 거룩한 소명이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조신앙은 성서의 처음이요 또한 마지막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그 안에 가득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로 시작되고,(창세기)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시는 희망으로 끝나지요.(요한계시록) 뿐만 아니라 성서는 계속해서 거듭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게 하고 바라보게 합니다. 시편의 창조 시들은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답게 창조의 신비를 노래합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에서도 하나님은 세상을 지혜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한 지혜요 섭리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섭리로 운행되고 있다는 이 창조신앙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그 섭리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지혜, 자연의 순리를 역행할 때에, 인간의 오만과 탐욕을 따를 때에, 자연이 어떻게 파괴되고 삶이 얼마나 황폐해지는지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기뻐하고 그 섭리를 따라 사는 곳에 복이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구원에 집중한 사도이지요.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화해를 주목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제2 바울서신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인간 사이의 화해와 구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화해와 구원을 말하기에 이릅니다. 골로새서는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창조 이전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피조물, 만물의 화해와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인간만을 쏙 빼내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의 화해입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 창조절에 이 말씀을 기억하고 새겨봅시다. 이 말씀 속에 모든 창조 신앙의 알짬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저주하고 부수어버릴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롯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거기에 있으며, 하나님은 만물과 화해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보따리를 싸서 이곳을 떠나 피지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도 말씀으로 우리의 육체를,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깨끗하고 아름답게 지키고 가꾸어야 합니다.

어느새 폭염과 폭우를 이겨낸 들판이 노랗게 바뀌어 갑니다. 자연은 변함없이 하나님의 순리에 순명하여 신비롭고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이 창조절에 우리도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생명의 신비를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생활에도 풍성하고 향긋한 은총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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