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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9-1) - " ‘짤’없는 하나님 사랑, ‘짤’ 있는 이웃사랑 " / 종교개혁주일 / 이단경계주일 / 최병학 목사 > 창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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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창조절(9-1) - " ‘짤’없는 하나님 사랑, ‘짤’ 있는 이웃사랑 " / 종교개혁주일 / 이단경계주일 / 최병학 목사

관리자 2024-10-22 (화) 20:45 3시간전 1  

1. 기독교는 정말 세상을 살 만하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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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권의 종교 서적 가운데 하나인 『배제와 포용』(IVP, 2012)으로 유명한 크로아티아 출신의 미국 성공회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 예일 대학교 교수와 매슈 크로스문이 함께 쓴 책이 있습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 기독교는 정말 세상을 살 만하게 하는가』(IVP, 2020)인데, 그 시작이 충격적입니다. 바로 “기독교 신학은 길을 잃었다.”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이 세상에 좋은 삶에 대한 강력한 대안적 비전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 볼까요?


“우리의 신학이 좋은 삶에 대한 강력한 대안적 비전을 제공하지 않을 때, 신학은 그 목적을 위반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학문적 신학의 비극이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긴급한 질문에 응답하고 공동선에 기여하는 일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 신학의 도구는 먼지가 덮이고-심지어 특히 그것을 날카롭게 유지할 책임을 맡은 이들에 의해-방치된 채 구석에 쌓여 있다.”


이들은 좋은 삶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공하지 않는 신학을 ‘학문적 신학’이라고 언급합니다. 신학자들끼리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주제에 관해 심도 있게 토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문 지식이 급증하는 세상에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신학자들의 비참한 운명입니다. 따라서 볼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오늘날 학문적 신학은 거의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주제에 대해 오직 동료 전공자를 위해 글을 쓰는, 존경받지 못하는 학문 전공자들로 구성된다. 아마도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 심지어 어쩔 수 없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전문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시대 속 ‘나약한’ 학문 부문의 운명이자, 인간의 이익을 위해 세상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증대된 실용주의 시대에 종교를 연구하는 학문의 운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의 주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볼프는 ‘인간과 창조 세계 전체가 번영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들어 볼까요?


“신학의 주제는 번영하는 삶의 기본 성격에 달려 있을 것이다. 신학의 목적과 주제를 포함하는 신학 방법론에 관한 질문은 언제나 신학의 본질에 관한 질문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인간과 창조 세계 전체가 번영하는 삶은 인간과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집’-창조 세계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됨으로써 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에 달려 있는 존재 양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번영신학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는데, 기존의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란 재정적 축복이나 물질적 풍성함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신앙이 자신들의 물질적 부를 증가시킨다고 믿는 반성경적 신학입니다. 볼프는 그러한 번영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번영하는 삶’은 ‘참된 삶’, ‘좋은 삶’과 같은 맥락입니다. 

솔직히 기독교 신학이 ‘진리, 선, 번영하는 삶’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기독교 신학과 그리스도인의 삶은 의미가 없는 것, 우리와 무관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은 산속에 들어가거나, 혼자 독방에 들어가도록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 세속 문화 속에 그리스도의 가치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볼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번영에 대한 기독교적 비전이 문화적 차이와 개인의 고유성을 수용할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번영의 열쇠라는 신념에 근거하는 기독교적 비전은 모든 인간을 일반적 인간성의 동일한 표본으로 다루면서 단일한 틀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짧게 답하면,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무슨 말인가요? 사실 기독교 신학은 보편성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다양한 가치관이 있음을 생각해 볼 때, 기독교 신학의 보편성은 폭력적인 접근 방식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볼프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세상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는 모든 사상은 본래 보편성을 띤다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경쟁하는 여러 비전이 공존하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교조적이지 않으면서 여러 비전 간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느냐인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기독교가 정말 세상을 살 만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에 우리는 쉽게 “yes!”라고 말할 수 없죠?


2. 루터 종교개혁의 5대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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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종교개혁의 5가지 ‘오직’


그러나 우리는 지난주에 이를 위한 백신을 맞았습니다. 바로 ‘사랑의 백신’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백신을 맞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순종하여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나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세상을 살 만하게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십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해 주셨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백신을 맞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 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아름다운 창조절기를 보내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놀랍고 신비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서로 사랑하며 지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사랑의 구체적 내용과 결과, 그리고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은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 내용과 그 결과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인애를 베푸시나,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시며 멸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서 말씀은 이웃사랑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원수까지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기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사랑의 계명을 위하여 자신이 사도로 택정함을 입었다고 소개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종교개혁 507주년 기념 주일인데,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의 핵심은 ‘오직 말씀(Sola Scriptura)’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루터는 독일말로 성경을 번역하여 사람들이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본질이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히 이 말씀을 따를 수 없죠?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루터도 바울도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따라서 ‘오직 은총(Sola Gratia)’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사랑의 백신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Solus Christus)를 믿는 ‘오직 믿음(Sola Fide)’에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위해(Soli Deo Gloria) 완성이 됩니다. 


3. ‘짤’없는 하나님 사랑: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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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원래 신명기 7장 말씀은 하나님께서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정착 후,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원칙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특히 앞부분 말씀(신 7:1-5)은 가나안 일곱 족속에 대한 진멸의 말씀입니다. 굉장히 배타적인 말씀이죠? 그러나 이 말씀의 본질은 우상 숭배자들과 타협하고 동맹하는 것을 금하는 것에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의 탐욕과 교만, 인간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거짓 우상에 관한 경고라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 오늘 본문 말씀이 주어집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 7:6-7)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성민으로 부르시고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이 무슨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장 적고 약하기 때문에 늘 강대국의 위협과 힘에 짓눌려 살아야 했습니다. 때로는 노예살이, 곧 종살이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떠돌이 난민이었던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지키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신 7:8)


따라서 이스라엘은 알아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 보응하시어 멸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신 7:9-11)


4. ‘짤’ 있는 이웃사랑: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렇게 ‘하나님 사랑’에 관해서는 철저합니다. 우리 말에 “짤없다.”라는 말이 있죠? ‘봐줄 수 없거나 하는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사랑’에 관해서는 ‘짤’ 있습니다. 그 범위가 넓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사랑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소개해주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 (마 5:43-45)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해와 비를 악인과 선인에게, 또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에 관해서는 철저하지만, 이웃사랑에 관해서는 모든 문을 열어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이 누구인지 조건을 달지 않는 것! 이것이 원수 사랑의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온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6-48) 


5.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


이러한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정말 살 만하게 만들기 위해 예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 첫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따라서 오늘 서신서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롬 1:5-7) 


바울은 자신과 같이 로마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인사말이죠? 대표적인 교리 서신인 로마서는 이렇게 인사말에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신학의 핵심이죠? 바울과 신앙의 결이 다른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앙과 교리의 일치를 위해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서문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1-4)


사실 로마교회는 바울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은 교회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와 야고보 사도를 위시한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이 개척하고 세웠던 교회들과는 신앙의 성격과 믿음의 결이 다르죠? 결국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지신의 교리를 소개하고 또 그렇게 교리를 일치시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바울 자신이 저 멀리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로마교회의 도움을 받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아마도 기원후 30년경,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순례자들 가운데,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행 2:10)”이 세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순례객 중 누군가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를 체험했거나, 아니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후 다시 로마로 돌아가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영향 가운데 있는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 서신에 나오는 지중해 연안 지역의 교회(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골로새 등)와 달리 로마교회는 그 시작에 바울이나 베드로의 영향력이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40년대 후반까지 베드로는 팔레스틴을 떠나지 않았고(갈 2:11), 바울 역시 60년대 초까지 로마에 가지 않았기(행 28:14)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과 동역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로 로마교회의 창립 신도였기에, 교류는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40년대 말 이전에 로마에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49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해버립니다. 천막 만드는 직업을 가졌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추방당해 고린도로 오게 되죠? 거기서 같은 직업을 가진 바울을 만납니다. 아무튼 이때 유대인들 말고, 로마 시민들, 곧 이방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로마에 남아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교회는 계속 이어진 것이죠?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54년에 사망하자,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네로 황제는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정책을 바꿨죠? 이때 베드로가 고린도를 거쳐서(고전 1:12, 9:5) 로마를 방문하게 됩니다. 결국 베드로는 로마교회의 재창립자가 됩니다. 


따라서 바울은 베드로가 이미 로마로 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로마로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롬 15:20)”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바울은 로마에 가게 됩니다. 그때 약 2년간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지만, 로마교회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로마서는 남아, 가장 위대한 성서 가운데 한편이 되어 인류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역사로 바꾸어 놓았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물론, 많은 신학자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세상을 살 만하게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6.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과 신앙


앞서 언급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볼프는 신학자들은 이전 시대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을 반복하기보다는 동시대의 이슈 및 다른 비전들과 대화하며 시대에 맞게 자신의 신학을 즉흥 연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도 해당이 됩니다. 본질적인 부분인 하나님 사랑에 관해서는 ‘짤’없지만, 이웃사랑에 관해서는 ‘짤’이 있어야 합니다. 그 범위가 넓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볼프는 이러한 신학을 수행할 때, 균형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주제와 맞게 볼프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곧 하나님과 그분이 지으신 세계를 향한 사랑, 대화 상대자를 향한 사랑! 곧 ‘짤’없는 하나님 사랑과 ‘짤’ 있는 이웃사랑이죠? 이것이 볼프가 말하는 ‘번영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이에 감사하며 사랑하고 겸손하게 살아갈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볼프는 구체적으로 이러한 삶을 바울이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해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당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보여주었습니다. 곧,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의 기쁨”입니다. 또한 이것은 창조와 완성 사이의 시기를 육신을 입은 종말론적 존재인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예를 볼프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찾아 소개합니다. 들어 볼까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함께 읽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해방시키는 것 두 가지 모두 그 목적이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 가운데 함께하실 공간을 창조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볼프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으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죄로 신음하는 세상 속에서도 번영하는 삶의 완성된 비전을 지향하며 살아가기를 권면합니다. 그 ‘종말론적 긴장 안에서 선하게 인도되는 삶’, ‘평화를 이루는 삶’, ‘공존함을 기뻐하면서도 여전히 불완전한 모습에는 애통해하는 삶’, 이것을 다루는 신학이 바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이라고 주장합니다. 


놀라운 것은 볼프는 기독교 신앙의 일차적 주제를 에덴동산 이미지에 나타난 ‘창조’와 새 예루살렘 이미지에서 나타난 ‘완성’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구속’을 중심축으로 삼아 기독교 신앙을 이해한 기존의 교리적 이해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볼프의 말입니다. 


“죄와 구속은 창조와 완성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구속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이르는 것을 도와주지만 창조를 통해 세워지고 완성 안에서 약속된 삶의 비전은 목적지를 정해준다. 즉 구속은 완성의 조건이자 완성의 개시가 가져오는 효과이다.”


이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창조-죄-구속-완성!’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때까지 우리 개신교회가 죄와 구속만을 이야기하여 죄에 대한 열등감과 구속의 값싼 은총만을 이야기하여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면 이제 창조와 완성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번영을, 그리고 인간의 좋은 삶을 외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말씀의 본질이며 그리스도의 은총이 이를 가능케 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며 종교개혁의 본질입니다. 이 귀한 사실을 깨닫고 ‘짤’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짤’ 있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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