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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11-2) -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이성호 목사(포항을사랑하는교회)

관리자 2023-11-11 (토) 19:37 5개월전 299  

본문) 사 40:27~31, 눅 18:1~8, 계 7:9~17

 

올해로 94세인 드봉 신부라는 분이 계십니다. 한국에 온지 벌써 70년이 된 그는 프랑스에서 신학수업을 시작할 무렵부터 한국에 가기를 간절히 소원한 인물입니다. 지금까지 ‘가난한 교회’를 표방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회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인터뷰를 진행하던 사회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교사로 가고 싶은 나라가, 하필이면 왜 당시 전쟁 직후의 가장 가난한 나라인 한국이었나요?” 


그는 밝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교사가 선교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로 가려하지, 왜 잘 사는 나라로 가려하나요” 드봉 신부는 선교지가 한국으로 결정됐을 때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며 박수를 치며 그때를 회상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지지리도 못 살던 1945년 6월 배를 타고 두달 반을 돌고돌아 그토록 원했던 한국에 도착했던 작은 체구의 듀봉 신부, 아마도 한국에 묻히기를 희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역사의 화살촉’인 기장에서 작고 가난한 미자립교회를 희망하는 목회자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든 안 주어지든 교인수 많은 교회, 잘사는 대도시로의 상향이동을 사모하기 때문일까요. 교회가 좀 성장되면 능력의 종. 크게 쓰시는 주의 종 소리를 들으며 더 큰 교회로 향합니다. 그러니 부흥과 성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입니다. 2023년 한국 개신교의 현주소입니다.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으로 가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는 그가 남긴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당연히 가난하고 어려운 곳으로 가려하지, 누가 잘 사는 곳으로 가려하겠어요” 라는 고백과 미소야 말로 그 어떤 상급보다 귀한 ‘의의 면류관’입니다. 


우리가 이미 누리고, 즐기고 있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어버리면, 결코 자기도취와 허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 향기에 취해서 남의 향기는 맡을 줄 모르는 더 받기를 원하며 크고 좋은 것,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에 사활을 거는 우리는 어느새 ‘여호와를 앙망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을 많이 닮아 있습니다. 


1. 여호와를 앙망하지 않는 이스라엘 (사 40:27~31)

이사야 본문은 힘든 자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곤경에 처한 이에게 희망을 주는 구절로 가득 차있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1절)로 시작하는 40장은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을 선포합니다(4절). 그렇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때를 증언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새힘을 주는 메시지로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이스라엘을 꾸짖는 말씀의 종결구입니다. 


이사야 40장 전체 맥락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향한 위로와 희망임과 동시에 십자가 없는 면류관을 바라는 자들을 향하는 날선 검입니다. BC 587년에 당한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을 져버린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다음 세대로 이어진 이스라엘의 미래 세대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하나님 백성’(3절)이며,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9절)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자신들이 당하는 재난과 고통에 굴복하여 부당한 것으로 여기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임하는 것은 저주입니다. 저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렸다고 믿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떠났기 때문입니다(27절).  


사람들의 눈에는 피곤하고 무능하게 보일지라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흔들림없는 믿음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31절). 아멘. 믿음은 마음에 있지만 보여지는 겁니다. 저절로 드러나는 것과 꾸미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갇힌 말씀, 율법에 포로된 신앙, 종교에 갇힌 교회가 아닌, 광야에 피어나는 꽃과 같이 야비하고 삭막한, 숨이 막힐 것 같은 이 세상에서 거짓 없는 믿음을 살아내는 여러분을 뜨겁게 축복합니다.  

 

2.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1~8)

예수님은 간청하는 과부, 즉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없는 혼자된 여인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리 절박한 처지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을 놓지 않는 간절한 믿음에 대해 전하십니다(1-8 상반절). 그런데 8절 하반절은 뜬금없는 반전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과연 이 역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상황에 놓일지라도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을 당부하신 예수님은 왜 다시 오시면 우리의 믿음을 보겠느냐고 반문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과 더 자주 어울리셨고, 그들을 감싸 안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진정 가슴으로 품었고,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이 버린 사람들을 끌어 안는 지독한 사랑이었습니다. 믿음은 표어가 아닌 실제이며 실존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늘 누구인지를 묻는 존재입니다. 믿는 자라함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신앙의 유산이자 실천적 믿음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는 자’들이 과연 누구인지, 알려고 조차 하길 꺼립니다. 타인의 슬픔과 함께 울라는 외침이 버겁습니다. 그러니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는 자가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돌봄이라는 신앙적 실천이야말로,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할 것입니다.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믿음을 가졌다 말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계 7:9~17)

예수님은 때때로 ‘어린양’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순결한 제물로서의 대속물, 어린양 말입니다. 오늘 세 번째 본문 계시록에서는 그 ‘어린양’의 표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소수인 것 같았으나 사실은 셀 수 없는 큰 무리인 저들은 저마다의 환란과 곤궁에서, 주리고 목마른 가운데에서, 눈물나는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갖가지의 재앙을 두려워 하지 않았던 주의 백성입니다.


지난 기독교 2000년 역사 동안 우리는 참 많이도 시달였습니다. 한때는 십자군이 앞세웠고, 무수한 전쟁의 학살과 약탈에, 천국가는 입장료를 어마어마하게 받아내는 선전에 이용당했으며, 대한민국 기독교 100년사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더러는 땅투기꾼에게, 더러는 종교장사꾼에게, 때로는 출세주의자들의 선동에 이용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진정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교회의 성장보다, 매 주일 바르고 거짓 없는 예배와 말씀이 끊이지 않는 것이며, 잘먹고 잘사는 것보다 눈물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찢기고 조각난 세상에 새 살을 돋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와 사랑의 메신저로서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 공동체를 만들게 하며. 개개인의 내면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 귀기울여 듣고, 서로를 위해 베풀게 합니다. 외부를 향해서도 연대하며 공동체 안에서의 다양성을 지향합니다. 하나님은 철저한 자기 성찰을 통해서 자신을 부정하고 주께로 나아오는 여러분을 지키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이 고백이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날마다 개혁되는 여러분 삶의 증거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 가는 길 오직 주님이 아시오니 나는 기쁩니다”로 찬송하는 여러분의 이 한주도 주안에서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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