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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11-1 )- "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할 때 "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3-11-10 (금) 04:11 5개월전 242  
본문) 이사야 40:27-31, 누가복음 18:1-8, 요한계시록 7:9-17

어느 수도원에 새로 들어온 젊은 수사가 있었습니다. 젊은 수사는 아침잠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수도원 원장은 기도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수도 생활이라는 것은 기도 생활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지요. 젊은 수사에게 새벽 4시부터 시작하는 아침 기도는 정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늪에 가라앉듯 잠에 빠져들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도 영락없이 깊은 잠에 빠져 버렸지요. 그 쪽잠은 얼마나 달콤했을까요? 비몽사몽을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등에 불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죽비를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죽비가 다른 날보다 유난히 강했습니다. 젊은 수도사가 눈을 비비며 원장에게 투덜댔습니다. “스승님,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아침 해가 뜨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면 그렇지요. 우리가 깨어 기도해서 아침 해가 뜨는 건 아니지요. 또 우리가 잠들었다고 아침 해가 뜨지 않는 것도 아니지요? 원장이 젊은 수도사에게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아침 해가 뜨게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잠들어 있으면 해가 떠오를 때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 그랬습니다. 젊은 수사는 내가 해를 뜨게 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했지만, 스승은 하나님께서 해가 뜨게 하시는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기도는 다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 욕심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기다리는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서에서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함께 읽었습니다. 어느 고을에 한 재판관이 있었지요. 그 마을에 과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과부에게 뭔가 억울한 일이 생겼습니다. 적대자에게 어떤 권리를 빼앗긴 것입니다. 내 권리를 빼앗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찾을까요? 내게 내 권리를 지킬 힘이 있다면, 당당하게 맞서서 되찾으면 되겠지요. 내게 그럴 힘이 없다면, 가족이나 친지에게 청해서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힘없는 여자에다가 과부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어쩌면 애초부터 힘이 없는 약자니까 자기 권리를 빼앗겼겠지요. 자신에게도 힘이 없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포기하고 잊어버리는 게 좋을까요? 아닙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힘없는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바로 그 고을에 있는 재판관입니다. 모름지기 재판관은 약자를 보호하라고 존재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재판관에게 사정을 호소하면 재판관은 그에게 주어진 공적인 그의 힘으로, 소위 ‘공권력’으로, 약자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입니다. 마땅히 풀어줘야 합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세상천지에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데, 그래도 재판관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과부는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재판관이 과부 사정을 친절하게 들어주고, 공정한 판결을 내려서,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재판관은 과부의 하소연을 들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재판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의를 실현해야 할 재판관이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우습게 여긴다면, 그런 법정은 어떻게 될까요? 세상은 또 무엇이 될까요? 법정은 강자들이 약자를 우롱하는 놀이터가 되고, 세상은 강자가 약자를 개돼지로 사냥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법정마저 야바위판이 되고 강도의 소굴이 되면, 정의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나저나 재판관은 예나 지금이나 왜 그 모양 그 꼴일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권리를 되찾아 줄 마지막 보루라 믿었던 재판관마저 적대자들과 한통속이라면, 이제 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온통 이 지경이면, 그냥 다 포기하는 게 맞겠지요? 그냥 팔자요 운명이라 생각하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과부는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의 과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만나주지도 않지만 계속 찾아갔습니다. 들어주지도 않아도 계속 사정했습니다. 열리지 않아도 끝끝내 두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침내 문이 열렸습니다! 그렇다고 재판관이 갑자기 정의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느닷없이 하나님이 두려워진 것도 아니지요. 그는 여전히 사람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생각을 바꾼 걸까요? 재판관의 넋두리를 들어나 봅시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나를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4-5절) 귀찮아서 그랬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도 사람을 소중히 여겨서도 아닙니다. 그 재판관은 개과천선해서 신앙인으로 거듭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도 법관도 바뀐 게 없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빼앗긴 권리를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합니다. 이 과부와 재판관 이야기는 뭘 말하는 것일까요?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과부와 재판관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에는 이 비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만 나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비유를 무엇보다 누가복음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이 무너진 이후 아시아와 그리스와 로마까지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쓴 복음서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복음을 이방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증언하는 복음서다, 그 말이지요.
그렇게 다시 보면, 이야기 속의 과부는 이방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의 처지와 상통합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지요. 그리스도인은 로마의 박해만 받은 게 아닙니다. AD 90년 이후 율법학자들은 로마의 허락을 받고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재건했습니다. 이방 세계에서도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서로 소통하고 서로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서도 쫓겨났습니다. 아주 작은 무리였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과부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실제로도 초대교회에는 과부들이 많았지요. 원래 ‘집사’가 과부를 보호하기 위해 생긴 직분이었습니다.
회당으로부터 쫓겨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법의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법, 로마의 재판관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의 황제를 두려워했습니다. 무엇보다 로마의 변방 법 집행관들은 거액의 뇌물을 황제에게 바치고 그 직을 산 사람들이지요. 로마의 재판관들은 정의와 공정을 표방했지만, 실제로 그 정의는 법보다 돈이었습니다. 로마의 검찰 권력은 황제와 귀족들의 권력과 돈을 지키는 충견들이었지요.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사람을 존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에 살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는커녕, 목숨까지 빼앗기는 박해와 순교의 때를 견디어내야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과부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고, 재판관이라는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존중하기는커녕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우습게 보지만, 과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요. 그러자 그 불의한 재판관도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기해서는 안 되겠지요. 끝까지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7-8절)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오실 그때를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의 때도 그랬습니다. 그때도 예루살렘이 무너졌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땅 바빌론에 사로잡혀가서 고통스러운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기약 없는 절망의 때가 계속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실망하여 절망의 나락으로 잦아들었지요.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제는 끝났다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들으시지 않는다고, 우리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깜깜한 절망의 시대입니다. 이 지독한 어둠과 혼돈의 시대에,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때 예언자 이사야가 일어나서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고, 하나님은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라고 외쳤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그들이 끌려온 이방 땅, 그 고난의 땅도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이 어둠과 혼돈의 땅에서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해서는 안 된다,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사 40:31)
요한계시록도 환란의 때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계시록은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린양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지요. 그들은 모두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종려 가지를 든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혹독한 박해의 때에 주님을 기다리며 믿음을 지켜낸,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환란을 견디어낸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악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그들은 얼마나 주리고 목말랐을까요? 무엇보다 주님은 어떤 열도 그들의 머리 위에 괴롭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화형을 당하면서도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뜨거웠으면, 다시는 뜨거운 것이 괴롭히지 못할 것이라 약속하셨을까요? 이토록 혹독한 환난을 견디어 낸 사람들에게 생명의 샘물을 주시고, 친히 그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 모든 환난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요? 무엇으로 고난을 이겨냈을까요? 다만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과부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세상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지치고 무력하게 하는 황막한 이방 땅 바빌론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심지어 달궈진 불가마에 던져지면서도 다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입니다.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새 힘을 주셔서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환난을 이겨낸 사람들을 생명의 샘물로 인도하시고, 친히 그 모든 눈물을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얼마나 불의하고 얼마나 거짓됩니까? 우리의 재판관들은 또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고 사람을 우습게 압니까? 우리는 지금 황막한 바빌론을 유랑하며 로마의 카타콤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하늘은 얼마나 무심하고 우리의 땅은 또 얼마나 혼돈합니까? 그러나 때가 악할수록 더욱 깨어 기도하는 사람들이 간절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지금 피조물은 신음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한 세상 앞에서 참으로 작은 사람들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를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말씀의 죽비로 일깨워주시기를 바랍니다.(서재경 목사 / 한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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