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해] 창조절(3-2) - " 하나님이 주신 짝꿍 " / 남신도회주일 / 김거성 목사본문) 창 2:18-25; 엡 5:21-6:4; 막 10:1-16 1. 실마리
오늘은 남신도회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 위해 함께 이 자리에 모인 교우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2. 도우미인가 짝꿍인가
우리가 구약성서 창조 이야기에서 얻어야 할 가르침들은 무엇입니까? 지난 주일 함께 나누었던 말씀과 같이, 창세기는 온 세계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향한 ‘영성’(spirituality), 또한 그 피조물인 자연의 관리자로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나아가 이웃에 대한 ‘연대성’(solidarity) 등을 깨닫게 해 줍니다. 창조절 셋째주일이기도 한 오늘, 말씀 제목을 ‘하나님이 주신 짝꿍’이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짝꿍’이란 단어를 보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무엇이었나요? 아마도 국민/초등학교 시절 바로 옆에 앉았던 친구였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창 2:18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에젤 크네그도’(עֵ֖זֶר כְּנֶגְדּֽוֹ׃)인데,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개역(개정)판은 ‘돕는 배필’이라고, 공동번역(개정판)은 ‘거들 짝’, 그리고 (표준)새번역은 ‘알맞은 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여기서 ‘에젤’은 ‘도우미’라는 표현처럼 옆에서 거드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 33:26과 29절에는 이 어근에서 나온 ‘에즈레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힘과 권력을 바탕으로 ‘함께 하는’ 방패요 칼이라는 뜻입니다.1) 그렇다면 ‘거든다’라거나 ‘배필’이란 번역은 그런 의미를 충분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하겠습니다. 이전에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왔으니 여자는 열등하다는 해석도 있었지만, ‘갈비뼈’, 히브리어 ‘첼라’(צְלָעֹת)2) 는 본질에서 다름이 없는 동질성을 뜻하며, 법궤의 양쪽편, 즉 ‘사이드’(side)를 언급할 때 사용된 어휘입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남자, 아담에게 ‘수호천사’처럼 늘 우리와 함께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전달하도록 만들어 주신 ‘짝꿍’이 바로 여기 나오는 여자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남신도 여러분에게 드릴 첫 번째 권면은, 남편으로서 가정에서 군림함 없이 아내의 ‘수호천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아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3. 순종인가 사랑인가
오늘 봉독한 사도서간문 엡 5:24에서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같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더욱이 23절의 이른바 ‘남편의 머리됨’(male headship)에 대한 표현은 여성 비하나 여성 학대의 근거인 것처럼 왜곡 해석되었습니다.3) 21절의 말씀, 즉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라는 권면은 애써 무시했습니다. 25절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를 내주신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과거, 교회에서는 이 본문을 잘못된 남성 우월주의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남성중심의, 또한 제 논에 물대기 식의 잘못된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차별하고 비하하고 학대하는 근거로 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성 사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늦어졌습니다. 여장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보면 여신도와 남신도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다행스럽게 이제 대부분의 교회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에서는 한국 교회 주요교단 최초로 여성 총회장도 나왔습니다.4)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만... 그렇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여신도회가 남신도회에 비해 훨씬 더 활발하고 또 능력도 출중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떤가요? 제가 판단하기에는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신도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남신도회는 이제 여신도회의 열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남신도들에게 드릴 두 번째 권면입니다.
4. 둘인가, 한 몸인가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릴 질문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막 10:2) 당시 힐렐(Hillel) 파와 샤마이(Shammai) 파로 나뉘어졌던 랍비 유대교 분위기에서 어느 쪽 주장을 편들더라도 반대편의 반발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부부 사이를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창세기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성서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흔히 부부 사이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과 사람이 서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넓은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막 10:9)”고 확언하셨습니다. 이 본문의 마태복음서의 평행구인 마 19:3에는 ‘무엇이든 이유만 있으면’이란 구절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 구실을 붙여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 아닙니까? 이념으로, 사상으로, 빈부, 종교... 그런데 그 갈라진 바탕에 실은 탐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파트너가 아니다. 내 이웃이 아니므로 내 책임이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 합리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해 주시면서 서로 돕는 짝꿍이 되어 함께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짝꿍됨 실천의 정수입니다. 예수께서 왜 우리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에 달리셔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아니고, 바로 주님의 짝꿍, 파트너임을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 알려주신 것입니다.
5. 세계인권선언
앞서 ‘무엇이든 이유만 있으면’이란 마태복음서 구절을 말씀드렸습니다. 무엇이든 이유만 있으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우리 현실 아닙니까? 우리가 이웃을 ‘짝꿍’이 아니라고 부인할 까닭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부모조차도 ‘고르반’으로 맹세했다고 내칩니다(막 7:11).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표어로는 내선일체를 내걸었지만, 현실에서는 ‘조센징’으로 온갖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3.1운동 때는 물론이려니와, 100년 전 간토대지진 때에도 수많은 조선인들을 학살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히틀러 나치는 이와 비슷한 이른바 ‘수정의 밤’(Kristallnacht)5) 을 기점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나아가 장애인이라고, 집시라고, 공산주의자라고, 동성애자라고, 나치 반대자라고 잡아 가두고, 그래서 수백만을 가스실로 보내 죽였습니다.
그처럼 1,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한 후 인류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냅니다. 바로 1948년 국제연합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입니다. 그 제1조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고 선언합니다.6) 이 내용은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7) 는 내용, 그리고 ‘자유, 평등, 우애’8) 라는 1789년 프랑스혁명의 표어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이유도 부인하며, 상대방인 사람에게는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인권선언 제1조는 이어서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형제애’(brotherhood)라는 단어는 프랑스혁명의 모토들 가운데 있는 ‘우애’(fraternité)의 영어식 표현입니다. 18세기에야 그렇다 치더라도, 20세기에 와서 세계인권선언 초안을 마련하면서 ‘파트너십’(partnership)이란 표현을 놔누고 왜 굳이 성인지감수성이 떨어지는 ‘형제애’란 표현을 놔뒀는지는 의문입니다.
6. ‘짝꿍됨’의 실천
하여튼 우애, 형제애, 파트너십, 연대성(solidarity) 뭐라 표현하던 간에 이러한 정신이 오늘 창세기 본문에서 사람을 ‘짝꿍’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창조질서와 상통하는 것임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자기의 옆에 있는 사람, 배우자나 부모, 배우자의 부모, 자녀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을 테지만, 길에 지나가는 피부색이 다른 사람, 언어나 국적이 다른 사람, 성별, 외모, 장애 유무, 연령과 지위의 고하 상관 없이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짝꿍’으로 보입니까? 그렇다면 신앙인이 될 첫째 조건을 갖추었다 할 것입니다.
둘째 조건은 무엇입니까? 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실천은 자기희생과 헌신을 동반하는 것이기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치매에 걸린 노인도, 장애인도 또 아프리카의 굶주린 어린이 등등 그 모두가 자기의 ‘짝꿍’임을 알고 실천하려 노력할 때, 그것이 우리가 신앙인임을 확인해 줍니다. 누구든 차별하거나 무관심, 냉대한다면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지 또 어떤 직분을 가졌는지 무관하게 진정한 예수의 ‘벗’, 그리스도의 ‘짝꿍’이라 할 수 없습니다.
7. 매듭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은 유한합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며, 우리를 ‘행위로서가 아니라 의도로서 심판해 주십시오’라고 빌 뿐입니다.9) 오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즐겁고 평안했던 가슴이 무거워졌다면 다행한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역사하신 까닭입니다. 이웃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짝꿍으로 실천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우리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힘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1) https://godswordtowomen.org/ezerkenegdo.htm. 2) https://biblehub.com/hebrew/strongs_6763.htm. 3) https://godswordtowomen.org/headship.htm; https://godswordtowomen.org/scholer.htm. 4)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4578. 5) https://en.wikipedia.org/wiki/Kristallnacht. 6) https://www.ohchr.org/en/human-rights/universal-declaration/translations/korean-hankuko. 7) https://blog.naver.com/uykim33/222025409487. 8) https://namu.wiki/w/자유, 평등, 우애. 9) A. J. 크로닌, <천국의 열쇠>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