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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5-2) - "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으로 " - 세계성만찬주일, 군선교주일 / 최병학 목사 > 창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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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5-2) - "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으로 " - 세계성만찬주일, 군선교주일 / 최병학 목사

관리자 2022-09-30 (금) 12:55 1년전 408  

본문) 출 12:1-14 고전 5:6-8 요 6:48-59)


1. 먹는 입


지난주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적은 무리들에게 필요한 먹고 마실 것에 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먹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특별히 먹고 마시는 것, 곧 성찬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번주는 ‘세계성만찬주일’입니다. 세계교회가 함께 주님의 성찬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먹을 것을 키우고, 만들고, 먹고, 치우는 문제는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키우는 것부터 볼까요? 누가 먹을 것을 키우나요? 그리고 누가 그것을 만듭니까? 또 그것을 먹는 사람은 누구이며, 먹고 난 다음 식탁을 치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술사회학 연구자인 이라영 선생의 책, 『정치적인 식탁: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 (동녘, 2019)은 ‘먹는 일’을 가운데 놓고 벌어지는 권력과 차별의 이야기를 종횡무진으로 펼쳐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릴 때 밥상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 가운데 누가 닭다리를 차지하고 누가 먼저 숟가락을 집어 드는지 잘 기억이 나시죠? 그리고 그 밥상을 준비하는 사람도! 또한 초대 받을 때는 누가 식탁에 초대받고 누가 바깥에서 서성거렸는지, 또 식당에서 갑질하는 이와 식당에서 거절당하는 이들은 누구인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은 사람들, 음식이 있어도 먹을 시간이 없어 죽은 사람들 이야기까지 이라영 선생의 책은 ‘식탁의 정치성’을 점점 넓고 깊게 파고들어갑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특별히 여성에 관한 부분이 많은데, 가령 21세기 한국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먹는 여성들을 ‘된장녀’로 취급하며 서구문화에 찌든 ‘골빈’ 여자로 봅니다. 그러나 왁자지껄한 곳에서 감자탕이나 꼼장어 구이를 먹는 여자는 ‘개념녀’로 ‘분할 통치’됩니다. 여기서 분할 통치는 여성들을 먹는 것으로 나누어 지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집 안 부엌에 여자가 서 있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기지만, 음식점의 조리실은 여성을 ‘셰프’로 인정하는 데 인색합니다. 대부분 남자들이 셰프로 불립니다. ‘주방 아줌마와 남성 셰프’ 이것이 주방의 정치이자, 식탁의 정치성인 것입니다. 주방뿐 만이 아닙니다. 학교나 회사를 청소하는 노동자들은 좁디좁은 휴게실이나 청소도구함 옆에서 음식을 먹고, 믹스커피를 탑니다. 먹는 곳, 장소의 분할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보면 먹는 것에 대한 우리 문화의 차별과 억압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 밥을 잘 차려 먹이지 않아 죽임 당한 여자들, 늦게 들어왔다고 오빠에게 매 맞는 여자들, 성폭행 뒤 살해당하고 신체가 훼손되어 내던져진 여자들! 몇 년전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의 배경이 되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찾았다고 합니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일대에서 10명의 여성이 살해된 사건입니다. 2006년 4월 공소시효까지 범인이 잡히지 않아,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 ‘이형호군 유괴살해사건’과 함께 3대 미제사건으로 불렸습니다. 


이 사건은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피해자 대부분이 목이 졸려 살해됐다는 점, 범행수법이 잔인하고 대범했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2019년 9월 18일, 사건 발생 33년 만에 경찰은 용의자 검거 소식을 밝혔습니다. 어쩌면 우리 문화는 신당역 역무원 사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남성들이 먹고 살기 위해 여성들을 짓밟은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성들은 발효식품부터 과일까지 이해할 수 없이 다양한 먹을거리로 환원됩니다. 된장, 김치, 스시, 간장, 밀크티, 미국 치즈, 물, 떡, 젖소, 영계, 꽃뱀, 앵두, 복숭아, 꼬막, 골뱅이 등등. 이라영 선생은 음식에 비유되는 여성이 그 자체로도 ‘먹히는’ 대상이 된다고 지적하며 매끈한 수면 아래 가라앉은 잔혹한 현실을 들추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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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빈치코드>



성서에도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장 유명한 식탁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한 ‘최후의 만찬’입니다. 거기엔 빵과 포도주, 그리고 남성 제자들이 함께했습니다. 여성 제자들은 배제 당했죠? 따라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1498)에서 예수님의 오른쪽 옆에 앉아 있는 제자를 여성으로 본 소설 『다빈치 코드』 (북스캔, 2004)는 식탁에서의 남녀평등, 곧 식탁의 민주화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죠? 론 하워드 감독 주연, 톰 행크스 주연의 <다빈치 코드> (2006)입니다. 


물론 소설과 영화 <다빈치 코드>에 따르면 이 인물은 예수님과 결혼한 막달라 마리아라고 합니다. 수염이 없고 갸름한 얼굴, 흰 피부와 긴 머리가 여성으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붉은 겉옷에 푸른 망토를 걸쳤고, 막달라 마리아는 푸른 겉옷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어서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입니다. 다빈치는 막달라 마리아를 그려 놓음으로,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결혼을 숨기고, 여성성을 철저히 배제해 왔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폭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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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부분 확대> 


그림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 막달라 마리아 옆에 앉아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은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그의 손을 보세요. 마치 칼날처럼 펴서 막달라 마리아의 목에 들이대고 있습니다.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후계자로 마리아를 지명한 데 대해 베드로를 위시한 남성 제자들이 반발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만, 아무튼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여호와의 유월절 제정과 예수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으로, 그 떡을 먹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인 유월절과 성찬을 통해, 구원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순전함과 진실함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 안에 낡은 누룩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2. 여호와의 유월절


오늘 구약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먹거리입니다. 그러나 이 먹거리는 구약의 가장 중요한 해방 사건인 출애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유월절 의식을 주신 내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애굽으로부터 해방만이 아닌, 죄악으로부터 구속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유월절 사건에 나오는 어린양의 피는 장차 오실 예수께서 흘리실 보혈을 상징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출 12:1-10)


이 말씀에 먹는 것 3가지가 나옵니다. ‘양고기’와 ‘무교병’, ‘쓴 나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먹는 방법이 이어집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11).” 허리에 띠를 띤다는 말은 집을 나서 여행을 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는 것이죠.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준비하고 급하게 먹으라고 합니다. 곧, 유월절에 먹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던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먹는 것은 반복적입니다. 예능 <삼시세끼>처럼 끼니를 거르지 않고, 먹죠? 그렇게 먹을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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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예능 삼시세끼>

 


그러나 이러한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하지만,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every firstborn: both men and animals)’과 애굽의 ‘모든 신(all the gods)’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 12:12-13)


그리고 이 심판을 피하기 위해 어린양의 피가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있는 집은 하나님께서 애굽 땅을 칠 때 넘어가(유월),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원의 날이자, 심판의 날인 유월절을 여호와의 절기로 삼아 영원한 규례로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출 12:14).”


이렇게 어린양의 피와 또 그 어린양의 고기와 무교병, 쓴 나물 등의 먹을 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알고 기억했다면 이제 복음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먹을 것이 됩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3.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


복음서 본문인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는 오병이어의 이적(요 6:1-15)과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모습(요 6:16-21)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병이어의 이적과 연관하여,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8).” 그리고 이 생명의 떡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 6:49-51)


예수님의 살이 세상의 생명을 위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으라고 합니다. 쉬울 수도 있지만, 어려운 비유입니다. 앞서 소개한 이라영 선생의 먹고, 먹힘에 관한 예리한 통찰을 소개했는데, 오늘 이 말씀을 깨닫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이라영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수년 전 낙산사 가는 길에 사마귀를 옮기는 개미떼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수백 혹은 수천 마리의 개미가 바글바글 모여 죽은 사마귀를 이동시키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상여를 지고 이동하는 장례 행렬 같았다. 어쩌면 그 사마귀는 개미들의 만찬 식탁에 놓일지도 모른다. 장례식인지 만찬 회동인지 알 수 없는 그 개미떼의 행렬을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먹는다는 건 매번 장례식이구나. 내 식탁은 늘 다른 누군가에게는 장례식인 셈이다. 내 삶은 누군가의 죽음을 흡수하며 지탱한다.”


그렇습니다. 나의 식탁은 다른 누군가의 수고와 죽음의 대가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생명은 다른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생명을 먹으며 오늘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튼 유대인들은 의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 초대교회가 로마로부터 핍박받을 때, 성찬식에 관한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3-55)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상징적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 6:56-57)

 

먹고 먹히는 문제를 하나 됨의 문제, 곧 생명과 부활의 문제, 곧 영생의 문제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8).”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요 6:59)”습니다. 사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도시로, 예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서 옮겨 오신 곳으로, 갈릴리 전도의 중심지가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자신을 먹히는 떡으로 선포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의 유월절 양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4. 유월절 양인 그리스도의 희생


바울의 선포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b).” 그러나 이 말씀이 선포된 맥락이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내가 심한 교회’라고 말씀드렸었죠? 오늘 본문의 배경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내의 근친상간과 같은 패륜적 사건들의 실상을 공개하며 그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와 교회 내의 성결을 촉구하면서 나온 말씀입니다. 말씀을 보겠습니다. 공동번역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여러분이 잘난 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낡은 누룩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다시 순수한 반죽이 되어야 합니다.” (고전 5:6-7a)


오늘 본문의 말씀만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앞 구절들을 살펴볼까요? 


“여러분 가운데 음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심지어는 제 아비의 처와 동거하는 자까지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자들은 여러분의 모임에서 제거되어야 할 터인데도, 그것을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잘난 체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는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그런 짓을 한 자를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이미 단죄하였습니다. 그 때에 한자리에 모인 여러분과 나의 마음이 우리와 함께 계신 우리 주 예수의 권능으로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어 그 육체를 멸망시키도록 판결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날에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고전 5:1-5) 


음행하고, 타락한 이들이 고린도 교회 내에서 당당하게 자랑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지금 한국 교회를 보십시오. 명성교회, 만민중앙교회, 사랑의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전중문교회, 사랑제일교회, 부평새소망 교회 등 교단법과 사회법을 무시하고, 타락하고 음행하고 부패한 교회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잘난 체하고, 자랑질을 하고 있습니다. 지지난 주에 장로교단 총회가 끝났는데, 한국 교회의 위기가 심각합니다. 우리 기장 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4년 전 저는 ‘기장의 미래를 말하다’라는 총회 분과 세미나에서 이렇게 총대 회원들께 말씀드렸습니다. 


“현재 우리 기장 교단은 침몰하는 배 위의 <뭉쳐야 찬다>팀입니다. 자기 영역에서는 레전드지만, 뭉치면 오합지졸입니다. 또한 집중력과 순발력도 없습니다. 집중력은 말씀과 복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순발력은 시대의 문화와 흐름을 읽어내는 눈인데 이것도 없습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신학(머리), 만우 송창근 목사님의 기도(가슴), 늦봄 문익환 목사님의 실천(손과 발)이 조화를 이루었던 과거 기장의 정신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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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예능, 뭉쳐야 찬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아니, 이 권면은 오늘 한국 교회 전체가 받아들여야 할 권면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유월절을 말합니다)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전 5:8).”


구약의 유월절을 이어받되, 그 형식이 아니라, 정신을 이어받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입니다. 중요한 것은 순전함과 진실함입니다. 순전함(εἰλικρινείας)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동기 자체가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계산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실함(ἀληθείας)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믿을 수 있고, 올바르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진리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누룩은 기본적으로 효모를 말하지만, 오늘 본문 맥락에서는 교회 내에서 음행한 자를 말합니다. 타락한 자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내가 한 말은 만일 어떤 사람이 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음행을 일삼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남을 중상하거나 술 취하거나 약탈하거나 한다면 그런 자와는 상종하지도 말고 음식을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고전 5:11)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쓴 편지에서 음란한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지만, 음행이나 탐욕이나 약탈이나 우상 숭배를 일삼는 이교도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고전 5:9-10)


이교도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 사람들, 혹은 다른 종교인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교회 다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있는 타락한 자들, 예수 믿는다하며 음행하는 자들, 부패한 자들! 그들을 심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심판할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 있는 그 악한 자를 쫓아내십시오.” (고전 5:12-13)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지만, 모범이 되지 못한 분들은 ‘묵은 누룩’입니다. 교회 다니며 부정을 일삼는 이들은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입니다. 이러한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을 나누는 것(고전 5:8)이 진정한 성찬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로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사람들은 이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5. 말하는 입과 사랑하는 입


앞서 서두에 이라영 선생의 책을 소개했는데, 그 책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음식이, 식탁이 소외, 차별, 배제의 매개가 아니라, 돌봄과 위로, 사과의 매개로서 한 사람의 속을 어루만지는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았던 식탁, 누군가를 익숙하게 차별했던 식탁과는 과감히 작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낯설어진 식탁 위에서 우리의 입은 배고픔만을 해결하는 일차원적인 입에서, 타자와 말을 나누고 사랑하는 다차원의 입으로 바뀔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이것은 환대의 식탁입니다. 이라영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의 권리를 생각하는 정치적인 식탁은 누구든 환대해야 한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동물적 존재에서 말하는 권리를 가진 정치적 인간으로, 나아가 타인과 온전히 관계 맺을 수 있는 사랑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환대의 식탁’을 차리기 위한 레시피북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식탁인 성찬도 그렇습니다. 환대의 식탁, 식탁을 준비하며 음식을 나누며, 뒷정리를 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평등과 ‘더불어 함께함’이 되는 세상, 바로 그것이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행하는 주님의 식탁이 될 것입니다. 세계성만찬주일에 우리의 식탁이 그러한 식탁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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