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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창조절(3-1) - " 주의 기도, 나의 기도 " / 이병일 목사 / 남신도회주일 / 한가위감사주일

관리자 2021-09-16 (목) 09:27 2년전 611  

본문) 사 55:6~13; 벧전 1:13~21; 마 6:5~15


예수님은 산상설교 중에서 유대인의 자선, 금식 그리고 기도에 대하여 비판과 함께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해마다 지키는 신년축제(Rosh Hashana)는 열흘간 계속되는데, 그 마지막 날은 대 속죄일(Yom Kipper)이라고 합니다. 새해를 시작함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먼저 영적으로 새로워지기 위해, 하느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기도와 구제에 전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에는 의무적으로 금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은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신앙생활의 3대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제(선행)는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기도는 하느님과의 바른 관계를, 그리고 금식은 자기 자신과의 바른 관계(즉 자기부인)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하게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당시 (샴마이 학파) 랍비들은 완전히 의로운 사람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완전히 사악한 사람의 이름은 죽음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중간에 속하는데, 그들의 이름은 아무 데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그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기 위해서는 신년 축제 기간 동안에 열심히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힘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년축제는 의로운 사람들의 명단에 오를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보상을 목적으로 한 행위가 자칫 형식적이거나 위선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는데,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월요일에 시내산에 올라가서 목요일에 내려왔다는 믿음 때문에 그리 하였습니다. 어느 금식일에 병든 유대인이 음식을 먹게 해 달라는 허락을 얻기 위하여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음식을 먹지 않으면 건강이 더 나빠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랍비의 집에 들어갔을 때 랍비가 점심식사를 맛있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 놀라서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는 자기가 본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면서 더듬거리며 물었습니다. “랍비님, 저는 아픈 사람인데. 오늘 제가 금식해야 합니까?” 랍비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소리요. 물론 당신은 금식해야 합니다.” 그 유대인은 그냥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주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결국 용기를 내서 다시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랍비님, 랍비님은 식사를 하면서 어떻게 저에게 금식하라고 명령할 수 있습니까?” 랍비는 웃으며 “나는 랍비에게 물을 만큼 어리석지 않아요.” 라고 말하면서 식사를 계속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바보는 너무 많은 질문을 한다.” 입니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성전은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고, 회당은 성서를 공부하는 곳이었으며, 기도는 매일 집에서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듯 하거나 남들에게 나의 의로운 행동을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점점 거리와 회당과 성전으로 나와서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행위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따라가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새겨들어야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빈말을 계속하는 것을 이방인들의 기도의 특징이라고 말씀합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 바알이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왕상 18:26)라고 외쳤습니다. 헬라인들은 기도할 때에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많은 신들의 명칭을 동원해서 기도함으로써 신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신에 대한 이름에 많은 수식어를 붙여서 반복하는 것은 이슬람교나 힌두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신의 이름이 죄를 소멸하는 불과 같다고 여깁니다. 우리의 언어적 표현으로는 그것을 공염불이라고 하죠. 위선자는 자기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말을 많이 하고 빈말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거죠. 종교적 행위의 형식화와 외식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라베누 하코데쉬에게 물었습니다. “하느님께 자주 기도하는 것이 옳은가?” 라베누는 “옳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왜 옳지 않은가?” “사람은 하느님과 너무 친해져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라베누는 다시 황제를 방문했습니다. 방으로 들어서면서 “오! 능력 많으신 황제여, 평안하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잠시 후에 돌아가면서 다시 “오! 능력 많으신 황제여, 평안하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화를 내면서 “웬 야단이냐? 분명 너는 나를 놀리려고 그러는 것이지?”라고 말했습니다. 라베누는 대답했습니다. “오 황제시여, 한갓 피와 살을 가진 황제께서 너무 자주 인사하는 데 대해 싫증을 느끼시는데 하물며 왕 중의 왕께서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주의 기도”라고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교회의 모임에서 수시로 주의 기도를 함께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 기도를 드리면서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번역상의 문제인데, 아직도 잘못 외우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먼저 “아버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아버지는 남성입니다. 여성신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하느님의 이름이나 성별이 남성이 아니라 통성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성의 구별이 아니라 자녀를 대하는 아버지의 속성을 염두하고 하느님을 부르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거리낌이 있다면 그냥 하느님이라고 해도 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에서는 주격 조사 ‘이’가 처소격 조사 ‘에’로 오해되어 “나라에”로 잘못 읽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나라에서 “당신의”를 생략하여 번역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수정하는 길은 “당신의” 혹은 “하느님의”를 “나라” 앞에 번역하고, 주격 조사 “이”를 “가”로 바꾸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라”는 ‘통치, 지배’를 뜻하는데, 이것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말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의 다스림입니다. “이름”, “뜻” 앞에도 “당신의”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번역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에서 오늘은 ‘하루 24시간’을 의미합니다. 자칫 우리는 “오늘의 시대, 최근의 시기”라고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정확한 의미는 바로 “오늘, 혹은 지금”이라는 의미입니다. “일용할”은 “필요한, 존재에 필수적인, 오늘을 위한, 다음날을 위한” 등의 의미로써 생존을 위하여 절박하게 요구되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대개”라는 말은 원래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 ... 때문이다”(hoti)의 의미입니다. 이 말을 “대체로”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의미는 지금까지 하느님께 간구한 이유, 즉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의 실현, 일용할 양식, 죄의 사함, 시험과 악에서의 보호를 간구할 수 있는 이유와 근거는 “하느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신앙의 총괄적 고백이며 찬양입니다.

이제부터는 주의 기도를 드릴 때에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온 마음을 모아서 드리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기도를 드릴 때에 위선적이지 않게, 중언부언 하지 않게 하기 위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이 유대교 랍비들이나 세례자 요한처럼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여서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이제는 하나의 주문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경계했던 중언부언에 해당하는 기도,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기도의 의미를 잘 모르고, 간절함이 없이, 삶에 대한 성찰 없이 드리는 기도는 공염불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제자가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랍비가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하기 전에 온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각 종교에는 일정한 기도문이나 주문이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주의 기도나 성모송을 낭송합니다. 유대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쉐마를 외우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최제우는 21자 주문을 만들어서 그것을 정성으로 외우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모든 일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하느님의 영기가 지금 저에게 크게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모시면 조화를 체득할 수 있고 하느님을 길이 잊지 않으면 만사가 저절로 깨달아진다.> 불교에서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민족종교에서는 천부경(天符經)을 많이 사용합니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위기 상황이라든가 징크스를 벗어나기 위한 주문이 있을 것인데, 그 때에는 간절한 마음이 그 주문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그 마음, 그 열정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형식은 어떠하든지 그 중심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기도하거나 주의 기도를 드릴 때에는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서 마음을 모아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거나 너무 흔한 것의 존재를 자주 망각하게 됩니다. 주의 기도도 너무 자주 외우기 때문에 그 뜻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여 삶을 성찰하게 하는 기도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의 기도에 있는 내용을 완전히 무시하는 삶을 살면서, 때가 되면 열심히 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를 말할 때에 “---한 사람은 주의 기도를 드릴 자격이 없다.”라고 극단적으로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의 기도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점이 많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위의 글에서처럼 우리는 때때로 주의 기도를 나의 기도로 바꾸어 생각합니다. 입으로는 주의 기도를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현실과 타협하거나 부패한 현실 속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는 진정한 마음으로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드립시다. 기도는 입으로 나오지만 온 마음과 온 몸으로 드리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는 그 곳, 우리의 몸이 움직이는 그 곳에 우리의 기도가 있습니다. 진지하고 신실한 삶은 그 자체로써 간절한 소망을 담은 기도이며, 우리가 입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성실한 우리 삶의 표현입니다.

성서일과의 다른 본문에서 기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야훼 하느님을 찾는 방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용서를 받는 길입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기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느님의 생각과 가깝게 하고, 하느님의 길과 같게 하기 위하여 나의 생각과 나의 길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서 받은 은혜를 간직하면서 전에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날마다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는 삶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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