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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창조절(5-1) - " 예수께서 베푸신 향연 " / 김진수목사

관리자 2018-09-28 (금) 12:43 5년전 4706  

본문) 출16:1-8, 13-15, 고전11:23-26, 요6:26-35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는 탯줄로 영양분을 흡수합니다. 그러나 출생과 함께 전혀 새로운 양식을 먹습니다. 그동안 영양분을 흡수해왔던 탯줄을 끊고 엄마의 젖을 먹게 됩니다. 수유기간을 끝낸 아이는 이젠 이유식을 거쳐 밥을 먹어야 합니다. 아이의 성장 단계에 맞는 양식을 먹어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아이는 성장하는데 여전히 엄마 젖만 고집하면 영양결핍증에 걸리고 더 이상 자랄 수 없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요1:12)가 되고 중생한 사람(요3:5), 새 사람(고후5:17), 새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새 백성, 새 사람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새 양식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새 존재, 새 사람이 되었는데 먹는 양식은 옛 사람, 옛 존재가 먹던 그 양식을 그대로 먹고 산다면 새 존재에 걸맞은 새로운 삶, 거룩하고 성숙한 삶은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내려주신 하늘의 ‘만나’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그의 백성을 건져 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는 거칠고 험하며 나무 한 그루 없고 물 한 모금 얻을 수 없는 곳, 인간의 생존이 거의 불가능한 곳입니다. 낮에는 폭염이 내리쬐고 밤에는 추위가 엄습하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험한 길을 해쳐갈 계획도 준비도 없이 하루아침에 오랫동안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뛰쳐나온 대책 없는 출애굽 방랑자들에게 광야는 바로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그곳으로 인도한 모세와 아론을 향한 불평과 원망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원망 앞에 대답할 말이 없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출16:4) 그의 백성들이 지금껏 먹어보지 못한 새로운 양식, ‘만나’를 내려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새롭게 출발한 출애굽 백성이 먹어야 할 새로운 양식 만나는 어떤 양식일까요? 

 

땅에서 난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서 비같이 내리는 양식이며, 사람이 심고 가꾸어 얻는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양식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은총의 양식이요 우리의 공로나 수고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총의 양식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 누리면 되는 양식입니다. 출애굽백성이 광야 길을 걸으면서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먼저 아침에 이슬처럼 내리는 만나를 거두어들이고 그것을 먹는 일입니다. 우리는 일하기 전, 직장에 출근하기 전,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시행하기 전, 가장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이 하늘의 양식을 받아먹고 힘을 얻어야 광야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먼저 예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늘 만나로 오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사귐을 통해 새 힘(사40:31)을 얻어야 옥합을 깨뜨릴 힘을 얻습니다.

 

만나는 단 번에 창고에 쌓아두고 끝없이 소유할 수 있는 양식이 아니라 매일 일용할 만큼만 거둘 수 있는 양식입니다. 땅에 쌓아두는 삶을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하늘의 양식 또한 한 번 얻고 쌓아두면 평생을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만 받으면, 주일만 지키면, 평생 구원이 보장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매일 나가서 이 은총을 거두지 않으면 쫄쫄 굶고 기운이 떨어져 따뜻한 사랑, 너그러운 용서 한 번 못하고 마는 냉엄한 현실을 잊고 삽니다. 만나는 공로 없이 거저주시는 은총의 양식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매일의 수고와 노동, 절박한 기도와 땀 흘림을 동반해야 얻을 수 있는 양식입니다. 매일 빈 그릇을 들고 나아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가득 채워질 때까지 사모하며 구함이 없이는 누릴 수 없는 양식입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라야 거두어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입니다.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리라”(출16:4) 하늘의 새 양식은 매일 아침 필요한 만큼 새로 거두어서 먹게 하셨고 말씀을 거역하여 필요 이상으로 욕심껏 거둔 만나는 벌레가 나고 썩게(출16:20), 늦게 거두러 나가면 만나가 스러져 거둘 수 없게(출16:21) 하십니다. 여섯째 날에는 동일한 분량을 거두어도 배(倍)가되어(출16:5) 안식일에는 백성들이 거두어들이는 수고를 그쳐도 먹을 양식이 있게 하시고 안식일에 양식을 거두러 나가도 빈손이 되게 하심으로(출16:27)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들은 먹고 누릴 수 있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은 불순종한 만큼 누릴 수 없는 양식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광야생활에서만 필요한 양식입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간 후, 가나안 소산을 먹기 시작할 때부터 만나가 그쳤습니다.(수5:12) 만나는 광야에서의 생존에 필요한 음식이지 기름진 잔치음식이 아닙니다. 다양한 맛을 가진 여러 가지 음식도 아니고 풍성한 음식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항상 똑같은 만나를 먹는 것을 불평하며 애굽의 다양한 양념을 곁들인 음식들을 그리워했습니다.(민11:5-6) 만나를 떡이나 양식으로 부르지 않았고 사실상 이름 없는 ‘만나’(이것이 무엇이 무엇이냐)로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출애굽 광야 공동체가 먹었던 만나는 장차 신랑이 올 때 신랑과 함께 먹는 풍성한 잔치음식이 아니라 신랑이 오기까지 잔치를 준비하며 먹는 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벳새다에서 베풀어주신 향연(饗宴), ‘오병이어’

 

  구약의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면 벳새다에서 예수님께 모여든 무리들은 초라한 오병이어로도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무리들이 풍성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이 벳새다에서 베푸신 풍성한 양식은 구약 출애굽 공동체가 먹었던 만나와는 다른 양식입니다. 만나가 광야에서 생존하기 위한 음식이었다면 벳새다에서 예수님이 나누어주신 양식은 오랫동안 즐기며 먹고 마시는 풍성한 연회(宴會/ banquet) 음식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푸른 잔디 위에 사람들을 앉게(정찬을 위해 비스듬히 눕는 자세) 하십니다. 떡 몇 조각이 아니라 코스요리를 베푸실 요량이십니다. 예수님은 마치 주방장이 되시고, 제자들은 섬기는 종이 되어 풍성한 코스요리, 다섯 종류의 떡, 두 종류의 생선을 배설하여 로마의 귀족들이 서로 토론하며 종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먹었던 바로 그 최고의 향연(symposium)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 향연을 베푸시고 친히 섬겨주시는 분 예수께서 성자 하나님이심을 감안한다면 로마인들이 배설했던 그 호화로웠던 향연조차 감히 비교될 수 없을 만큼의 영광스러운 잔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그 잔치는 로마의 억압과 고통 속에서 위로와 평안을 누리지 못했던 메마르고 갈증 난 영혼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이미 신령한 하늘의 양식으로 충만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온 무리가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많이 거둘 만큼 풍성한 잔치였습니다. 한 어린 소년의 손에 들려진 오병이어가 예수님의 손에 올려지자 수 만 명의 굶주린 무리들이 앉아있던 그 자리가 한 순간 향연이 벌어지는 자리, 주린 자들이 마음껏 먹고 배부름과 만족을 얻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혼자 먹기도 부족한 초라한 도시락 하나가 주님의 손에 들려지자 다만 먹을 양식만 충족될 뿐 아니라 천한 자들이 높임을 받고 존귀한 자로 섬김을 받으며 서로 즐겁게 노래하며 사랑의 사귐을 나누는 잔치자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짐승처럼 처먹는 존재가 아니라 식사하는(dining) 존재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들이 이 향연처럼 예배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빈부귀천 없이 성적 차별 없이 누구나 가장 소중한 섬김의 대상이 되고 우리 삶에서 지치고 억압받고 고통당했던 모든 상처와 아픔을 다 신령한 하늘의 양식으로 치유 받고 회복될 뿐 아니라 벳세다 향연처럼 사랑과 정성으로 가득한 식탁에서 함께 교제의 떡을 떼며 서로의 가슴 속 깊이 묻어 둔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며 서로 위로하고 치유하고 공감한다면 한 식탁에 앉은 모두가 한 식구, 형제자매가 되고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하늘의 잔치, ‘성만찬’

 

십자가를 앞두시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신 유월절 만찬을 매우 특별한 만찬으로 만드셨습니다.(고전12:23-26) 그것은 장차 십자가에서 예수님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흘리셔서 베푸실 놀라운 잔치를 제자들에게 미리 맛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가장 값지고 풍성하고 아름다우며 영광스러운 하늘 잔치를 제자들에게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이 잔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베풀어주시는 죽음과 고난의 잔치입니다. 잔치음식은 모두 자신의 생명을 죽여 먹는 자의 생명과 힘이 되어주는 음식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죽이고 희생한 음식을 먹음으로 생명과 힘을 얻으며, 음식의 고통과 아픔을 맛으로 먹고 삽니다. 이것이 생명과 삶의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제자들과의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친히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과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의 기쁨과 치유와 회복의 잔이 되어주셨습니다. 죽음이 없는 생명은 가짜입니다. 고난과 희생이 없는 즐거움과 기쁨은 거짓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 자기 죽음과 희생이 없는 성공, 기적은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지금도 주님은 이 죽음과 희생의 잔치자리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늘 잔치는 가장 값진 잔치입니다. 사람들은 값진 음식을 장만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큰 잔치에는 산해진미가 따랐습니다. 평소에는 맛볼 수 없었던 값진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이 잔치가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베푸신 이 마지막 만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떡을 삼고 그가 흘리신 피로 잔을 삼아서 베푸신 잔치입니다. 세상에! 도대체 그 어떤 잔치가 이렇게 값비싼 잔치일 수 있습니까?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치르신 대가는 감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크시면 그 같은 값을 치를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면 그렇게 값비싼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구원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는 쉽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과 그의 죽음으로 이루어 진 값비싼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하늘 잔치는 가장 맛좋은 음식을 먹는 잔치입니다. 이 땅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그의 말씀대로 의롭게 산 자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 뜻에 순종함으로 그의 기뻐하시는 아들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의 십자가를 통해 베풀어주시는 하늘잔치는 가장 기름지고 맛있는 하늘양식으로 가득 찬 잔치입니다. 모두가 기쁘고 행복한 잔치입니다

  

이 하늘 잔치는 참 생명의 잔치입니다. 이 세상의 잔치는 아무리 값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병들고 늙고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베푸신 하늘 잔치는 예수 생명(조에)을 먹는 잔치요 영생의 잔치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은 자입니다.(엡2:1) 죄로 인해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참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시간적인 영생 뿐 아니라 질적인 영생, 모든 고난 이기고 육신의 정욕, 세상의 유혹, 마귀권세, 사망까지도 이기는 생명입니다. 

  

이 하늘 잔치는 땅에서 하늘의 영광을 맛보는 잔치입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을 베푸시며 “나를 기념하라”(고전12:24, 25) 하셨습니다. ‘기념하는 것(아남네시스)’은 한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생하게 재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별한 아내가 임종 직전에 남긴 한 장의 손수건은 단순한 손수건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아내의 흔적일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아내와의 소중한 사랑이 다시 기억되고 생생하게 되살아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다시 경험하며 장차 주님과 함께 누릴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지금 이곳에서 생생하게 누리게 됩니다. 이 생명의 떡을 먹어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을 삽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늘 잔치로의 초대

 

  우리의 현실은 아직 광야입니다. 교회는 거칠고 메마르며 그 길을 가로막는 수많은 도전들 가운데 존재합니다. 아무리 약속된 미래가 있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커도 여전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절망과 고통과 위기입니다. 이 광야 가운데 있는 교회를 향해 오늘도 주님은 그의 풍성한 식탁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눈을 뜨자마자 이 식탁으로 달려와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은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식탁에 와서 예수 생명의 떡을 먹고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목마르고 거친 광야 길을 걷기 전에 먼저 이 생명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빛이 어둠을 이깁니다. 참 기쁨이 오면 슬픔을 이깁니다. 참 소망이 빛이 오면 그 어떤 절망도 사라집니다.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가난한 농부는 돌아가 기쁨으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마13:44) 진주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마13:45) 더 값진 것을 얻으면 다른 것은 다 팔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베푸신 이 하늘 잔치에 나오십시오! 이 놀라운 잔치에서 생명의 떡을 먹과 잔을 마심으로 하늘의 생명을 얻어 이 거친 세상을 이기며 영원한 하늘나라 잔치를 이곳에서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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