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6:5~22, 막 7:1-18, 롬 1:18-25
더러운 세계와 깨끗한 세계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두 가지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더러움과 깨끗함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생각할 때, 더러움이 가득한 대표적인 장소는 시장입니다. 오늘의 본문 4절 말씀에서 “시장에서 돌아와”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은 시장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잘 보여 줍니다.
‘아고라’라고 부르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시장은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곳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시장은 경제적 행위가 우선적으로 일어난 곳이지만, 일종의 광장 같은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 사회, 문화적인 여러 생각을 말하고 주장하는 곳이었고, 때로는 재판이나 연극도 이루어졌습니다.
마가복음 본문이 정결례를 설명하면서 시장에서 돌아 온 때를 예로 든 것을 보면, 당시의 시장을 신앙적인 면으로 볼 때 부정적으로 본 것은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앙에서 보면 시장은 세상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당시의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영향과 문화가 제일 먼저 침투하는 곳이었을 것이며, 이교도적 문화가 독버섯처럼 퍼져가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당시의 유대인들은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보고, 시장이야말로 악과 더러움의 온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볼 때, 더러움의 상징은 시장이지만 정결함의 상징은 율법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수호자이며 시행자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깨끗한 무리들입니다. 자신들이 깨끗하기에 자신들의 세계는 깨끗하고 정결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은 율법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시장의 더러움에서, 그리고 세속적인 더러움에서 자신들을 지키는 방법은 정결법과 정결예식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제정된 전통과 예식에 따라 시장에서 돌아와 물을 뿌리고 음식을 먹으며, 손을 비롯하여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일 등을 통해 자신들의 깨끗함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더러움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생각과 태도가 하나님 속이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그들의 외식과 기만에 대하여 엄중하게 꾸짖으셨습니다(6절). 그리고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5, 16절)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깨끗함의 세상과 더러움의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에 온갖 더러운 것들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온갖 더러운 것들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품고 있는 이상, 성전이나 회당에 있어도 깨끗하지 못한 것이요, 율법을 읽는다 해도 정결하지 못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생각과 같은 온갖 더러운 것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1절).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더러움의 온상이요,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도 죄악이 시작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창 6:5)라는 말씀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된 죄악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신 후에 하신 말씀은 “참 좋다”는 것이었습니다(창 1:4, 10, 12, 18, 21, 25, 31). 하지만 인간의 마음에 탐욕이 생겨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욕심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창 3:5-6). 동생 아벨에게 폭력을 휘둘러 그의 피를 땅에 흘리게 한 것도 가인의 마음에 일어난 탐욕과 분노 때문이었습니다(창 4:5-6).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탐욕과 분노는 온 세상을 죄와 폭력으로 물들여 온 땅이 부패하기에 이르렀습니다(창 6:11-12).
결국 하나님께서는 물로 땅을 심판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물로 인간의 악한 마음을 씻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인간의 악하고 어리석은 마음에 대한 기록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롬 1:21)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마음이 더러움의 온상이 되는 것은 “정욕”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도록 하셨다” (롬 1:24)는 것입니다. 정욕이라고 해석된 헬라어 “에피쒸미아”는 육신적 쾌락을 위한 욕망 뿐 아니라 매우 넓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본질적인 탐욕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이 탐욕은 죄와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야보고서도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고 말씀했습니다. 야고보서에 쓰인 “욕심”이라는 말도 사도 바울이 사용한 “에피쒸미아”와 같은 말입니다.
깨끗하고 성결한 마음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혀와 같습니다. 혀가 사랑의 말도 하고, 증오의 말도 하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악한 것을 품기도 하고 선한 것을 품기도 합니다. 온갖 악한 것이 마음에서 나오기도 하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마음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이 함께 깃든 마음을 하나의 마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마 5:8)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순결하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섞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세상은 악하지만 우리는 선하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선하며 하나님 나라의 모상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몸담고 있기만 하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다고 해서 저절로 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악한 생각과 더러운 의도가 우리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못지않게 위선적이며 기만적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속이려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온갖 더러움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창조절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을 성결하게 하고 정결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