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40:27-31, 눅 18:1-8, 계 7:9-17
올해도 변함없이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019년부터 시작된 코로나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운 국면의 삶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불편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고 거리를 유지하여야 하고 교회도 비대면 예배로 전환해야 하고 모임이 제한되었습니다. 상권이 죽어서 폐업이 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코로나 이전으로의 회복을 원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 세계 사망자가 126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기후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불편한 감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항상 좋은 일에서만 감사를 찾을 것이 아니라 안되는 가운데서 감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길가에 가시 꽃 감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인류 역사의 중대한 재앙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과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Thank와 Think는 말은 같은 어근이다. 그러므로 한 치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유발하라리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명상을 제안합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기도입니다. 신앙입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설명해주고 해답을 주지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다시 인문학이 유행하는 것도 경제만이 아니라 다시 인간 내면을 통찰하라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탈 인간에서 우주로 탈성장으로 탈서구에서 동양으로 탈종교에서 비종교사회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자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 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하여 기도로 강청하라고 권면합니다. 헨리 나우엔의 마음의 기도에는 고독, 침묵,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 말 많은 세대의 콘텍스트에서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사막 교부의 권고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을 때 우리 하나님 앞에 나아와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고 교회 성장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의 업적과 성취를 자랑하려고 하였습니다. 교회도 물욕과 명예에 눈이 멀었습니다. 내가 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차별이 극대화되어 버렸습니다. 차별을 없애라고 성경에는 말했는데 약자의 호소를 묵살하고 그들의 인권을 짓밟는 데 기독교가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음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과 문자에 얽매어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16에는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배부르게 하시고 우리의 슬픈 눈물을 다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불편할 때 감사해야 합니다. 불편한 외침 편안한 침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편하지만 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침묵과 방관을 하게 되면 내게 아무런 일이 없어서 편하기는 합니다. 우리는 편할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어렵고 힘들 때 병으로 신음할 때 우리는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전립선 수치가 높아서 암 조직검사를 했습니다. 입원을 3일 하였는데 이제까지 해보지 않는 입원 생활을 통하여 암 환자들의 아픔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도 암 환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하여 농촌에는 한해의 수확으로 말미암아 감사합니다. 우리는 양파 낙지 논과 밭의 작물들에 대한 감사를 하게 됩니다. 하루하루를 지켜 주심에 우리는 감사하고 우리의 건강을 지켜 주심에 감사합니다. 매일 눈을 뜨고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건강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병원에 가면 환자들이 북적입니다. 수많은 질병이 있습니다. 이문열 소설가는 사람의 아들에 대한 신관에 대해 신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신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 좋은 세상이 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늘 우리를 도와주셔서 오늘도 우리는 감사하고 불편해도 감사하고 늘 불만족해도 그래도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조선 중기 구봉 송익필은 족함과 부족함을 노래했다.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족하며 소인은 어찌하여 늘 족하지 아니한가. 부족하나 만족하면 늘 남음이 있고 족한데도 부족하다 하면 언제나 부족하네. 즐거움이 넉넉함에 있으면 족하지 않음 없지만, 근심이 부족함에 있으면 언제나 만족할까? 때에 맞춰 순리로 살면 또 무엇을 근심하리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해도 슬픔은 끝이 없네. 내게 있는 것을 구하면 족하지 않음이 없지만, 밖에 있는 것을 구하면 어찌 능히 만족하리. 한 표주박의 물로도 즐거움은 남음이 있고 만금과 진수성찬으로도 근심은 끝이 없네. 고금의 지극한 즐거움은 족함을 아는데 있고, 천하의 큰 근심은 족함을 알지 못함에 있네.
진나라 이세가 망이 궁에서 베게 높이 했을 때는 죽을 때까지 즐겨도 충분할 줄 알았네. 당나라 현종이 마외 언덕에서 길이 막혔을 때 다른 삶을 산다 해도 족하지 않다고 했네. 필부의 한 아름도 족함을 알면 즐겁고 왕공의 부귀도 오히려 부족 하다오. 천자의 한 자리도 족한 것은 아닐진대 필부의 가난은 그 족함이 부러워라. 부족함과 족함은 모두 내게 달렸으니 외물이 어찌하여 족함과 부족함이 되리오. 내 나이 일흔에 깊은 계곡에 누어 남들이야 부족하다 해도 나는 족하네. 아침에 만 봉우리에 흰 구름 피는 것을 보노라면 스스로 갔다 스스로 오는 높은 운치 족하고, 저물녁엔 푸른 바다 밝은 달을 토하여 내는 것을 보면 가없는 금물결에 보이는 경계가 족하네. 봄에는 매화 있고 가을엔 국화 있어 피고 짐이 끝없으니 그윽한 흥취가 족하고 책상 가득 경서에도 도의 맛이 깊어 있어 천고를 벗 삼으니 스승과 벗이 족하네. 덕은 선현에 비교해 비록 부족하지만, 머리 가득 흰 머리털, 나이는 족하네. 내 즐길 바 함께 함에 진실로 때가 있어 몸에 책을 간직하니 즐거움이 족하네. 하늘을 우러러 땅을 굽어보아 능히 스스로 있으니 하늘도 날 보고 족하다고 하겠네.
정약용은 노년을 보내는 여섯 가지 기쁨을 차례로 노래했다. 중머리여서 망건을 쓰지 않는 것, 이가 다 빠져 치통의 근심이 없는 것, 눈이 나빠져서 경전 주석에 골몰하지 않고 강산의 풍광을 즐기게 된 것, 귀가 어두워져 세세한 일에 신경 쓰지 않아 집안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하게 된 것, 중국 시단을 추종하지 않고 조선사람으로서 조선의 시풍을 추구하는 것, 바둑 둘 때 하수와 대국하여 신경 쓰지 않고 소일하는 것 등이다.
나의 삶을 돌아보아도 늘 부정적 염세적 그리고 불만족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족의 정신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