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40:27-31, 계 7:9-17, 눅 18:1-8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적대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아마 자기 땅이나 재산을 억울하게 빼앗겼던 것 같습니다. 뭔지 몰라도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당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이 사람이 아무리 호소해도 적대자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들어주지 않았지요. 왜 적대자와 사람들은 그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을까요?
우선 이 사람은 여자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여자가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야 하지요. 남자 랍비들은 선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웃고도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고, 아담을 미혹한 것도 하와였다면서, 여자의 말은 믿을 수 없다는 궤변을 펼쳤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자가 자기 권리를 찾는 게 쉽지 않은데, 2천 년 전 팔레스틴에서야 오죽했을까요? 게다가 이 여자는 과부였습니다. 여자가 자기 권리를 찾으려면, 보호자인 남자가 나서야 하는데, 그나마 남의 편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억울하지만 포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아닙니다. 이 과부는 자기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그 고을의 재판관을 찾아가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관이 과부의 사정을 들어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엎친 데 덮친다고, 재판관이라는 사람은 도무지 꽉 막힌 사람이었습니다. 그 재판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완고하고 꽉 막힌 자입니다. 그 알량한 품위와 권위가 하늘을 뚫고 올라간 사람이지요. 이런 재판관을 만나면 정말 대책이 없지 않습니까? 또 이 재판관은 한 술 더 떠서 사람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입니다. 참 점입가경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예 만나지도 상대하지도 않는 게 상책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과부는 자기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줄곧, 재판관을 찾아가서 호소했습니다.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달라고 재판관을 졸라댔습니다. 처음에는 본 척도 하지 않았겠지요. 문전박대하고 무시했을 것입니다. 어딜 감히 과부가 지엄한 재판관을 찾느냐고 모욕을 주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그래도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재판관을 졸라댔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이 재판관이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이 과부와 재판관 비유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지요. 이 이야기는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요.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그 말씀이지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안중에 없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인 불의한 재판관도 그 과부의 끊임없는 호소를 들어주었는데, 귀찮아서라도 들어주고 말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더욱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는 약한 과부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호소해서 지켜냈는데, 그리스도인이 어찌 기도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하나님,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를 ‘얼른’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귀찮아서 들어주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못 견디겠어서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우리의 기쁨을, 우리의 감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사 40:27)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며 부르짖은 탄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고역을 치러야 했습니다. 바빌론에서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오랜 포로 생활 동안에 피곤하고 지친 이스라엘 백성은 낙담하고 좌절했습니다. 자존감도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자신들이 마른 풀포기와 같고, 지렁이와 벌레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지요.
그런데 이렇게 낙담하고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사야는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특히 이사야 40장은 위로와 희망을 노래하는 장이기도 하지요. 이사야는 절망한 백성을 위로하며 희망을 일깨우려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희망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무엇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지금 눈앞에 닥친 어려움과 고통에만 매몰되지 말고, 눈을 높이 들어서,(26절) 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땅의 기초를 놓으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온 우주를 운행하시고, 온 세상을 섭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이지요. 눈을 떠서 보다 크게 보다 넓게 보다 깊게 보라, 그 말입니다.
그렇게 온 우주를 지으시고,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십니다.(28절) ‘피곤을 모르고 지칠 줄 모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이사야가 ‘피곤을 느끼지 않고 지칠 줄 모르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포로 생활에 몹시 피곤하고 너무 지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피곤하고 지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힘과 기력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피곤하고 지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힘을 주시고 기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로 운행하시면서도,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하나님을 희망으로 삼은 사람은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들의 사정을 이미 다 알고 계시며,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는,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 앞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 앞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는 것일까요?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속한 사람들도 아니지요. 이들은 모든 민족으로부터 나온 사람들이니까, 이방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큰 환란을 겪어낸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희게 빤 사람들입니다.(14절)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 받은 사람들이고, 큰 환란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환란을 당하는 시대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환란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쫓겨나서 떠돌아야 했고, 주리고 목말라야 했고,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권리를 빼앗겼고, 목숨까지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환란을 당하면서도 기뻐했고, 순교를 당하면서도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모든 권리를 다 잃어버리고도 기뻐하는 사람들, 환란을 당하면서도 감사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무슨 희망으로 혹독한 박해와 그 큰 환란을 견디어 냈겠습니까? 그것은 그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찾아주시는 권리는 그저 세상에 속한 세속적인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거룩한 권리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큰 환란을 견디어낸 사람들이 마침내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 앞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덮어주는 장막이 되어주시고, 그들은 다시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어떤 고통도 없으며, 어린양이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올해는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후변화와 코로나19로 아주 낯설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지요. 안팎으로 참 어수선하고 불안한 가운데 감사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곤하고 지쳐갑니다. 많은 젊은이들도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과부와 재판관 비유를 통해서, 낙심하지 말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어려운 때는 낙심할 때가 아닙니다. 깨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사야도 오랜 포로 생활로 지치고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에게 둔 희망이란 피곤하여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만 하나님께 둔 소망은 우리에게 새 힘을 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박해와 환란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시기일수록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얼른’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고통의 때에도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에 소망을 두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장막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생명의 샘으로 이끄시며,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어려운 중에도 우리를 여기까지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신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다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항상 감사하고 찬미하며 살아갈 때, 주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새 힘을 주시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