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40:12-46, 엡1:15-23, 막 12:13-17
1.
예배당 예배를 가정 예배로 전환하려면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게 됩니다. 그런데 올여름에는 주저 없이 예배당 예배를 즉각적으로 ‘셧다운’ 하였습니다. 광화문의 한 ‘선동자’(煽動者)로 인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위해 그를 어떻게든 자제 시켜야 한다는 말에 누군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합시다.
“선동은 사람에게 나거나 하나님에게 난다. 만일 선동이 사람에게 난 것이면, 망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만일 선동이 하나님에게 난 것이면, 막을 수 없다. 누가 하나님의 역사를 감히 막으려고 하는가? 가만히 구경만 하는 것이 상책이다.”
궤변이라는 생각이 드시는지요. 하지만 이것은 적지 않은 성도들이 명(名)연설로 기억하고 있는, 율법 교사 가말리엘의 발언을 간추린 것입니다. 사도들이 피살당하게 생겼을 때 그는 의회원들에게 이 딜레마 논증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구해줍니다(행 5:34-39).
딜레마 논증 형식은 인류가 발견한 논증 형식 중에서 가장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수사학적으로 중요하고 실제 연설에서도 자주 사용됩니다. 그러나 모든 딜레마 논증에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말리엘 논증도 뭔가 수상합니다. 그러함에도 의회원들이 가말리엘의 결론에 수긍한 이유는 첫째, “온 백성에게서 존경을 받는”(34절) 그의 인품 때문입니다. ‘광화문 그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은 이러한 인품의 부재입니다. 둘째, 가말리엘의 마술 같은 연설 때문입니다. 그 비밀은 이것입니다.
딜레마 논증의 품질은 세 개의 핵심 전제에 달려있습니다. 가말리엘의 논증도 마찬가지입니다.
(1) 선동은 사람에게 나거나 하나님에게 난다.
(2) 만일 선동이 사람에게 난 것이면, 망하게 되어있다.
(3) 만일 선동이 하나님에게 난 것이면, 막을 수 없다.
하나하나 따져볼 때 성도 여러분의 마음에 제일 걸리는 것이 (2)일 것입니다. 가말리엘이 (2)에서 의미한 바는, 사람에게 난 것은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하나님께서 결국 망하게 하신다는 것이었고 의회원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이해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내 의회원들에게 의구심이 생깁니다. ‘언젠가는 망하겠지만 그때까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가?’, ‘결국에는 망한다고 해서 개입하지 말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가말리엘은 이런 질문을 “드다”와 “유다”의 생생한 사례를 통해 재빨리 잠재우지요. 임기응변에 능숙한 대가의 모습이 보입니다.
2.
가말리엘은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해 딜레마 논증을 사용하였지만, 많은 경우에 이 논증은 상대방을 난처한 상황에 몰아넣기 위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딜레마 논증(추론)을 통해 적대자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작전이 설계되는 것이지요. 이렇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두 개의 입장을 제시한 후 상대방에게 어느 쪽이냐 묻습니다. 그가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검토해 둔 딜레마 논증의 (1)번 전제가 현실이 되고 예상대로 그는 궁지에 처하게 됩니다. 이런 공격을 예수님께서 많이 당하셨는데요. 요한복음 8:1∼11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도 딜레마 논증을 가지고 작전을 짭니다.
(1) 예수가 돌을 던지라고 하거나 그러지 말라고 할 것이다.
(2) 만일 돌을 던지라고 하면, 율법은 지키지만 냉혹한 자로 취급당한다.
(3) 만일 그러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안 지키는 불법자 취급당한다.
(4) [결론] 예수는 냉혹한 자로 취급당하든지 불법자 취급당할 것인데 어쨌거나 그에게 타격이다.
가말리엘 논증의 경우 (2)를 검토할 필요가 있었지만 이 논증의 (2)와 (3)은 참일 개연성이 큽니다. 현실을 반영했기 때문입니다. (1)은 상식적이어서 무난합니다. 이제 (1)을 만족시키는 예수님 발언만 있으면 됩니다. 준비는 다 되었고 적대자들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여자를 돌로 죽여야 합니까? 아닙니까?”.
오늘 마가복음 본문의 “세금 논쟁”과 그다음의 “부활 논쟁”도 예수님 적대자들이 총출동해서 벌인 비슷한 공격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께 이런 올무를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사두개파 사람들은 다른 저의를 가지고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모세의 가르침을 반대합니까? 아니면 부활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양자택일”을 강요당하시는 이러한 예수님 처지가 어떤 것인지 요즘 실감합니다. 이편 아니면 저편이라는 진영논리, 찬성 아니면 반대라는 흑백논리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제3의 편을 언급하면 양편에서 비난받고, 찬반을 유보하면 양쪽에서 비겁하다고 합니다. 엄살이 아닙니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The Social Dilemma)에 의하면 이런 분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심해졌다고 합니다. 소셜 미디어에 설정되어있는 알고리듬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입장을 강화하는 정보만 접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뇌라는 심리 기제가 결합하면서 사람들의 판단 시야(視野)가 점점 좁아지는 듯합니다. 제3의 길은 점점 안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사회 현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딜레마를 대하시는 예수님에게서 두 가지 신앙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대립하는 양자 속에서 제3의 길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돌로 죽여야 합니까? 아닙니까?”라는 선택지 대신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조건부> 답변을 하셨습니다. “모세의 가르침을 반대합니까? 아니면 부활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라는 양자택일은 정면으로 거부하셨습니다. 모세의 가르침에도 맞고 부활도 맞다는 것이지요.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는 질문에도 조건부 답변을 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평서문은 “만일 황제의 것이라면”으로 시작하는 조건문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자택일하지 않으시고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할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아야 할 경우가 있다고 대답하신 셈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응은 적대자가 아닌 제자들과의 대화(요 9:1~3)에서도 나타납니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면서 제자들이 “이러한 시각장애가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둘 다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고통이라는 것이지요.
둘째, 예수님께서는 사안을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심층적으로 다루셨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답변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어야 한다”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말씀으로 세금을 둘러싼 깊이를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성으로 로마 황제의 상대성을 드러내고 계시는 것이지요. 황제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것은 하나님의 것에 원리적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과 에베소서 본문은 이러한 포괄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사 40:18), “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사 40:25),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1~22). 예수님은 이렇게 사안을 심층적으로 접근하셨고 그 바탕 위에서 여러 가지 대안을 신중하게 고려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철학자 달라스 월라드(D. Willard)에 따르면, 논리에 대한 관심은 어떤 지적 기술들을 요구할 뿐 아니라 인격적 헌신과 도덕적 삶도 요구한다고 합니다. 명료하게 집중하고 타당하게 대화하고 진리가 어디에 도달하든 그 진리를 기꺼이 존중하는 태도 같은 헌신과 함께, 끈기와 용기를 가지고 지적 위선과 천박함을 피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월라드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모범을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런 종류의 모범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대립하는 양자 속에서 제3의 길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사안을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심층적으로 다루셨습니다. 가짜 뉴스와 독단적 주장이 난무하는 세태 속에서도 성도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뜻과 진리/진실을 붙잡고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