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6:1-8, 계 15:1-4, 요 8:12-20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C. S. Lewis(Clive Staples Lewis, 1898-1963) 라는 작가가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아이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마치 사람이 재미있게 살아갈 만 하면 나타나서 그러면 안된다고 막아서는 분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장사가 조금 잘 되어서 이제 됐구나 싶으면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그렇게 살아서 되겠니?’ 하고 찜찜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아, 고소하다’하고 통쾌한 마음을 먹을라치면, 하나님은 또 나타나셔서 ‘사람이 마음을 그렇게 써서야 되겠니?’ 하고 물어 오십니다. 아이의 말대로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참 불편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도덕률은 우리가 인생을 잘 항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합니다.
C. S. Lewis는 우리 인생이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우선, 다른 배와 충돌하지 않도록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면서 가야 합니다. 둘째로, 각자의 배는 제대로 항해할 수 있는 엔진을 잘 갖추고 관리해야 합니다. 힘이 딸려서 지쳐버린다든지, 고장이 나서 제자리를 맴돌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세째로, 배는 목적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디로 가야하는 지도 모르고 우왕좌왕해서는 항해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인생의 항해를 할 때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참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서로를 사랑으로 배려하며 충돌하지 않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또 상처 입은 엔진이 회복되도록 고쳐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인생의 의미를 올바로 알게 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는지 깨우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면서 과연 우리가 항해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돌아볼 때, 각별한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나름대로의 이상적인 도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인류적으로 공통된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문화와 역사에 따라 다른 가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하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의로워보이는 이 가치가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진실(truth)을 외면한 사실(fact)이 되어 교묘한 자기 변명의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가 지향하고 있는 도덕적 이상이 아무리 좋아보여도, 그것으로 남을 평가하는 잣대로는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막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신 직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 심판한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요한복음 8:1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역시 심판의 기준이 상대적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심판하면 내 심판은 참되다(16절)” 하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얼마든지 심판의 권한과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심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의 손에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사람에게는 ‘용서’와 ‘사랑’ 이라고 하는 도구가 있다는 것을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사실 예수님께서는 “심판할 것이 많이 있다(26절)”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29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잣대 삼아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는지를 아는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은, 모든 인간적 미움과 원망의 잣대로부터 자유케 되리라고 예수님은 결론 내리셨습니다(32절). 우리는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님을 기다리지만, 정작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예수님은 심판자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신 주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진리가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항해의 규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도덕적 이상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여러분 인생 항해의 동력을 찾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 이사야도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이제 죽게 되었구나(이사야 6:5)’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대시며,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7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사야를 택하셔서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다음 장면입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한계와 그것을 뛰어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하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권능을 부여받은 이사야가 세상에 말씀을 전할 때에, 세상은 이사야의 말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신 걸까요?
사실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전하면서 당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요. 그래서 이 말씀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심판 받을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해서 좋을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어떤 오류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입술이 숯불에 지져야만 할 부정한 것임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립니다. 취약한 인간의 언어가 하나님의 뜻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 사랑의 말씀을 전달하는 우리들 자신의 한계 때문에 온전한 사랑의 전달도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심판자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미약하고 연약한 음성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으셨습니다. 오히려 핍박 받는 자가 되고, 미움 받는 자의 음성 속에 당신의 뜻을 담아내셨습니다. 그 소리가 미약해서 참으로 귀 기울여 듣는 자만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외롭게 남아서, 새로운 생명의 모태, 거룩한 씨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소식이 마치 전쟁에서의 승리 노래인 양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그렇게 떠들썩한 노래를 부르셨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심판하지 않겠다 하신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말씀에, 일곱 재난이 다 지난 후에 불이 섞인 유리바다 위에서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탄의 모든 권세와 핍박을 이겨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부르는 노래는 어린 양의 노래입니다. 어린 양은 승리의 상징이 아닙니다. 어린 양은 순결의 상징이요 희생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을 상징하는 사랑과 용서의 상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승리자는 그러므로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온 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운 사람입니다.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승리자인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많은 교회들을 보십시오. 사업의 성공이 있고, 재물의 축복이 있고, 치유의 기적이 있는 것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려 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싶습니까? 우리 교회로 오십시오’ 하고 광고하는 교회들의 독단적인 모습은 너무 흔한 일입니다. 강력한 엔진으로 남들보다 앞서가게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양날검이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남을 향한 것인 양 휘두르려는 이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만약 우리들 자신이 이와같은 가치를 추구해 왔다고 한다면 어린양의 노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노래에 화음을 맞출 수 없는 것입니다.
프랑스 개혁교회를 방문했을 때 인상깊었던 일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개혁교회의 헌법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세상의 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는 고백으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만이 정통이라고, 우리 만이 올바르게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고 주장할 법한데, 이들의 고백은 너무나 겸손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겸손이 자기 정체성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위그노라고 불리는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는 카톨릭 교회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전쟁과 박해의 과정을 거쳐 18세기 초에는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이 완전히 사라진 줄 알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마치 그루터기처럼 살아남아서 오늘까지도 그 신앙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역사를 가진 개혁교회가 루터 교회와 연합했다는 사실입니다. 루터교회는 독일 중심의 교회이고, 프랑스 교회는 캘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입니다. 이 두 교회는 500년 동안이나 다른 가지를 유지하며 지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합의 논의를 시작한 지 100년 만에, 그리고 연합이 거의 성사될 뻔 했던 일이 있은 지 40년 만에 완전한 한 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승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승리를 십자가가 대변하고 있다는 이 분명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노래는 승리의 노래가 분명하긴 하지만 그것은 어린 양의 노래였습니다. 사랑의 노래였습니다. 우리의 항해는 거대한 몸집으로 옆에 있는 작은 배를 위협하며 전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뜨거운 사랑의 엔진으로, 세상 끝까지 울려나는 어린 양의 노래 그 고동소리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아름다운 여행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어린 양의 노래를 비웃습니다. 내 안에서부터 회의와 의심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 이긴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분노가 아니라 용서가 하나님의 뜻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일곱 재난이 놓여 있다 할지라도 끝내 이기는 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씨, 그루터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 부활하신 주님 예수와 더불어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